천진도인 우화 노스님(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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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03월 145호
도를 잘 닦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은 대개 도를 신비한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매우 뿌리가 깊어서 실제로 도를 닦는 수행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세속 사립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얻어 보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수행자란 무슨 별난 사람이 아니다. 수행을 해서 얻는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니다. 설령 하늘을 날고 산을 뽑아 옮기는 신통이 있더라도 정법안장 正法眼藏의 본분사本分事에서 본다면 한낱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며 허망한 도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도가 높고 수행을 잘한 스님이란 어떤 사람일까. 바로 인격이 고매하고 자기 삶에 진실한 사람이다. 마음 씀씀이가 홉사 맑은 가을 하늘과 같아서 한점 티끌도 없는 사람, 그런 스님이 도가 높은 것이다.
칠십년대 초 나는 겨울 안거를 해인사에서 보내고, 4월 초파일올 지낸 뒤에 나주 다보사多寶寺로 갔다. 여름안거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는 일찍이 천진도인天眞道人이라고 알려진 雨華 노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노스님은 지월指月 노스님- 해인사 유나維那로 계셨음-이 열반하여 49재를 모실 때 해인사에 와서 뵌 일이 있다. 그 날 제방 선원의 조실 스님들이 많이 왔는데, 본방 대중으로 큰스님들 안내를 맡았다. 그 때 우화스님을 처음 친견하고 스님의 천진한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스님 회상에서 꼭 한번 모시고 살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가지 못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일 년여가 지난 뒤에 마침내 다보사로 가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다보사에 가 있던, 도반 정묵스님한테서 다보사에 스님 방부까지 들여 놓았으니 빨리 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초파일 다음날 곧바로 다보사로 달려갔다.
지금은 교통편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칠십년대초에는 읍에서 다보사까지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길을 걸어서 가야 했다. 읍내를 벗어나니 큰 저수지가 있고 옆에는 목로 술집들이 몇 개 있었다. 막걸리를 펴는 한 초가집을 지나가는데 농부 한 사람이 나를 붙들고 막걸리를 권하여 할 수 없이 한잔을 받아 마셨다. 사문이라 본디 술을 할 줄 모르는 데다 마침 속까지 비어 있었다. 빈 속에 막걸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온몸이 찌릿하게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걸어서 절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도 술이 깨지않았다. 정묵스님을 찾아 어떻게 슬며시 방안에 들어가누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주문을 지나 절 마당에 도착했다. 마당 한켠 고목나무에 활짝 피어 있는 벚꽃이 하도 고와 보여서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는데, 법당에서 정묵스님이 내다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 역시 반가워서 법당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법당안에는 조실이신 우화스님도 계셨다. 초파일 다음날이라 법당에서 행사 뒷설거지를하고 있었다. 정묵스님은 내게 들어와서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일을 거들라고 했다.
처지가 몹시 난처하였다. 일부러 마신 술도 아닌데, 어찌 되었든 공부하러 온 납자가 첫날부터 술이라니, 영낙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러나 어쩌랴, 일은 닥친 것. 법당으로 성큼 들어가 큰스님에게 절을 했다.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아따 그 스님 얼굴 혈색 한번 좋소이. 특히 코가 잘 생겼구마이. 저렇게 코가 잘생긴 사람은 얼굴에 단청을 해야되지라” 하시는 것이 이닌가. 어찌 들으면 농을 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은 거기에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꾸지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보사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원이라야 정묵스님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대중이 둘이니 자연 공부에 자유로움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이따금 게으름이라도 피우면 큰스님은 내 곁에 오셔서 귀에다 대고 아주 조용히 ꡐ또 얼굴에 단청하고 싶은가 보요잉ꡓ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금방 얼굴을 붉히고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우화스님은 일상생활에서 어묵동정 語黙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천진무구한 분이다. 가까이 모시고 살면 바다와 같은 그 천진한 세계에 크게 감화를 받는다. 나주읍에 오일장이 서면 큰 스님은 가끔씩 장을 보러 가신다. 몇 십 년을 입었을 두루마기를 말끔하게 다려 입고,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짐작도 안 되게 오래된 하얀 운동화를 신고 절에 있는 부목에게 지게를 지워서 앞세우고 아침 일찍 그렇게 장보러 길을 나선다. 가끔 나도 따라나서 보곤 했다. 절에는 학교를 다니는 일학년 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다. 노스님이 장보러 가는 날에는 이 아이도 등교길에 함께 간다. 아침 찬바람에 산길을 내려가니까 아이가 자꾸 콧물을 흘린다. 노스님이 슬쩍슬쩍 곁눈으로 아이 콧물 흘리는 것을 바라보더니 그만 당신의 깨끗하게 다려 입은 두루마기 자락 안쪽으로 아이의 콧물을 쭉쭉 닦아주는 것이 이닌가 절에서 입고 나올 때는 혹시나 깨끗한 두루마기에 먼지가 묻을까 봐 조심조심 하던 것을 아이 콧물을 보는 순간 잊어버린다.
내가 \"큰스님 그 깨끗한 두루마기에다가 어찌 아이 콧물을..“ 하며 바라보면,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일 없다는 표정으로 먼산을 바라본다.
천진한 성품이란 본디 어린 아이의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천진한 사람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 역시 천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노스님 역시 예외없이 아이들을 좋아하였다.
다보사에서는 그 무렵 조석 예불 시간에 백팔 번씩 관음보살 정근을 했다. 정묵스님이 목탁을 잡고 염불을 하는데, 노스님이 옆에서 염주를 들고 돌리다가 염불이 백팔번째가 되면 정묵스님 귀에다 대고 염주를 짜르르 짜르르 소리나게 당긴다 이제 그만 하라는 신호이다. 사실 백팔 번 염불은 잠깐이다. 그래서 정묵스님이 노스님의 이런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염불을 하면 노스님도 계속해서 정묵스님의 귀에다 대고 짜르르 짜르르하고 염주소리를 낸다. 그러면 옆에 있던 다른 대중들은 웃음이 나와서 그걸 참느라고 킥킥거리고, 그렇게 하다가 정묵스님이 정근을 끝내고 기도가 끝나면 노스님은 정묵스님에게 “아따, 그 동안에 스님은 염불 삼매에 들었던 모양이요잉ꡓ 하고 말씀하셨다.
대웅전을 지나서 나한전이 있고, 그 나한전을 지나면 선원이 있다. 절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여름이라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으면 방안에서도 아래 절이 환하게 다 보인다. 오후 한낮이 되면 가끔 노스님이 등 뒤로 차담거리를 감추고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올라오시는 것이 보인다. 굳이 조심해서 올라오시는 것은 우리가 정진하는 데 방해하지 않겠다는 마음씀씀일 것이다. 이렇게 올라와서는 가만히 선방 안을 들여다 보시고는 우리들이 좌선을 하고 있으면 들고오신 차담을 가만히 내려 놓고 내려가시고, 혹여 우리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시면 그만 실망해서는 ꡒ수좌들이 공부는 안 하고 웬 잡담들인 감ꡑ하고 혼잣말을 하시면서 들고 온 차담도 그냥 가지고 내려가신다. 우리는 그 때서야 어이쿠 하는 마음으로 급히 노스님께 달려가셔 “조실 스님, 우리가 내내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공부 시간이 되어 바로 입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실 스님, 뒤에 감추고 계신 차담은 이리 주십시오” 하면 그때서야 들고오신 차담을 못 이기는 척 주고 가신다. 그러면서도 노스님은 ꡒ이것 잡숫고 공부 잘 하시오ꡑ 하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이렇게 매사를 천진한 아이처럼 행동하시지만 그 속에는 매우 날카로운 경책이 들어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릿발 같은 질책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내놓고 하시는 꾸중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다시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잡아 더욱 긴장하고 분발하여 공부를 하였다. 이렇듯 우화 스님은 자상하고 친절한 선지식이면서 마치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 같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