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보를 창고
선암사는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문화재의 보물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사찰 분규로 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리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많은 문화재급 유물들이 보물 창고나 전각 여기저기에 놓여 있어 인근 송광사처럼 박물관을 건립하여 관리하는 제도적인 개선책이 아쉽다.
우선 문화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불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석가모니 불상과 1685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상, 과거칠불상, 아미타불상, 53불상, 석가삼존상, 제자상, 16나한상, 사자상, 판관상, 철조약사불상, 지장삼존상 따위가 있다. 그리고1624년에 그려진 괘불과 화엄탱 등의 불화가 있다. 그 밖에도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2기와 입구의 돌다리인 승선교(보물 제400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금동향로 1기가 있다.
그 밖에 우수한 부도 2기가 경내에 있는데 특히 조선 후기의 특성을 간직한 사자탑인 화산대사사리탑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대복전이라는 편액과 천자와 인자를 결합시켜 천인으로 읽을수 있도록 한 글자씩의 편액이 있다. 이들 편액에는 어필이라고 씌여 있는데 순조의 친필이다. 정조가 태자의 출생을 석왕사와 선암사에서 기원한 결과 순조가 탄생하였으므로 정조는 석왕사에 부처님의 공덕올 기리는 비를 세웠고, 순조는 선암사가 큰 복의 밭이라 하
여 대복전이라는 글을 금자로 썼다고 한다. 그 뒤 순조는 다시 천자와 인자의 한 자씩을 써 주어 대복전 현판 양쪽에 걸어 ‘인천대복전ꡑ 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인과 천 두글자의 편액은 현재 대웅전과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법당앞에 쌍탑을 세운 이유
선암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담한 자태의 대웅전과 그 앞의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 4.7미터로 보물 제395호로 지정될 만큼 유명하다. 동서로 벌어진 2기의 석탑은 이중기단으로 하체가 날렵하다. 갑석은 윗면에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호형과 그 상하에 각형을 붙인 3단의 굄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하나씩 모각되었으며, 중석은 밑에 부연이 있고 윗면은 약간 경사진 가운데 하층기단 갑석에서와 같은 형식의 3단 탑신굄이 있고 추녀가 약간 반전 되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육개석을 각각 한돌로 짜 맞추었으며 각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모각되었으나 장엄 조각은 없다. 옥개석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받침수는 각 층 4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각각 각형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는데, 석재들은 본디의 부재가 아니다. 이 탑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상하기단의 탱주수가 하나로, 옥개석의 받침수도 각 층4단씩으로 줄어 건립 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불화의 보고
먼저 선암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탱화라는 불교 회화이다. 대각국사 진영은 장식적인 의자에 앉아 오른쪽으로 몸을 틀고 있는 자세로 당시 보편적인 영정의 구도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화기에도 있다시피 옛 영정이 잘 계승되어 계속 중수되었던 작품으로 생각되므로, 아마도 대각국사의 풍모를 그런대로 잘 전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교적 육뚱한 체구에 녹색의 장삼을 입고 이 위에 붉은 가사를 우견편단으로 걸치고 있는데, 가사의 깃과 이음은 정교한 꽃무늬를 금선으로 그린 점과 옷자락과
띠를 날카롭게 날리게 한 점 등에서 이 작품의 격과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말기 영정의 특징은 물론 앞 시대의 양식적 특징도 잘 전해 주는 당시 최고의 수준작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의 후불벽면을 꽉 채운 초대형의 영산회상도는 1765년에 만든 것으로 삼베 바탕에 채색하였다. 세로 590센티미터, 가로 394센티미터의 크기로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지금은 하단 끝이 말아져 있어 원래는 이보다 더 큰 건물에 걸린 것인데 그 뒤 전각이 축소되면서 말아진 것으로 보인다. 석가본존불은 거대한 화면을 압도하게끔 초대형으로 중상단에 걸쳐 배치하고 있으며 다른 협시상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문수, 보현 등 화면의 아래쪽 협시보살들은 비교적 크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고 있다. 넓지만 각진 어깨, 당당한 체구와 함께 둥근 얼굴의 원만한 표정 둥에서 앞에 앉은 괴체의 거대한 석가불상을 연상시켜 주고 있다. 육계 위에 큼직한 정상계주
만 표현된, 마치 털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 머리와 함께 각진 체구, 둥근 얼굴등은 해인사 영산회상도(1729년 작)와 비슷한 것이다. 광배도 본존불처럼 붉은 테두리와 녹색 바탕 등의 대담한 대비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본존불의 형태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기타 협시상에도 묘사되었으며 전 화면에 걸쳐 녹색과 붉은색의 대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이 불화는 압도하는 구도, 대담한 형태. 강렬한 색의 대비 등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불조전에 봉안된 조선시대 후기의 53불도는 1702년 작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중앙의 7불탱화를 중심으로 좌우에 53불도를 6폭으로 나누어 그린 형식이다. 53불은 대승불교의 성불사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53불도는 대개 불조전이나 천불전, 삼천불전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보광불에서 상만황불까지의 53불을 그렸다. 중앙의 7불 그림은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등 삼신불과 사방불을 그렸지만, 7불이 2단으로 배열된 송광사의 오십삼불도와 달리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여 좌우 각각의 명칭은 확인 할 수 없다. 53불은 9불 탱화가 2폭, 13불 탱화가 2폭, 5불 탱화가 2폭으로 되어 있으나 부처 각각의 명칭이 없어 역시 자세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그림의 주조색은 적색과 녹색이며, 이와 함께 백
색, 황색 등이 사용되었는데, 18세기 초기의 다른 불화들과 마찬가지로 밝고 명랑한 색조를 느끼게 한다. 인물들의 형태는 매우 도식화되었으며 신체 각부분에서도 형식화된 면이 두드러지는 등 18세기 초기 불화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송광사 53불도(1725년 작)보다 이십 년쯤 앞서는 작품으로 대화공 사신 비구가 그렸다고 한다.
화엄경변상도는 1780년에 그려진 것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세로 279센티미터, 가로 248센티미터 크기의 이 그림은 7군데서 9번 법회를 열어「화엄경」을 설법한 것을 한폭에 그린 그림으로서, 구도는 제일 아래 큰 연못이 있고 이 위에 글자로 찰종이 쓰여 있는데, 이 윗 부분에 9장면이 배치된다. 곧, 아래쪽에는 지상에서의 설법 장면인 1,2, 7, 8, 9회의 그림이 나란히 배치되고, 그 위에 3, 5회와 다시 그 위에 4, 6회의 그림이 배치되었다. 또 화폭의 가장 아래에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화엄경변상도 역시 그러한 기본 구도하에서 그려졌는데 송광사의 화엄경변상도와 화폭도 거의 비슷하고 구도나 형태 등도 같이서 같은 유파의 회사들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상단부에 하늘에서의 네 개의 설법 장면, 하단부에 지상에서의 다섯 개의 설법 장면을 각 2열씩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구름과 분신불을 묘사한 복잡한 구도이지만 정연한 질서와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하겠다. 색채 역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비슷하게 청색이 남용된다든가 홍색,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점 등은 같지만 붉은색이 좀 탁해져 화면이 전반적으로 송광사의 화엄경변상도만큼 밝지 못한 느낌은 있다. 송광사 화엄경변상도와 더불어 18세기 후반기를 장식하는 보기 드문 화엄경변상도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단아한 절집
선암사의 절 분위기는 그야말로 단아함의 극치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조선 후기의 대웅전이 가장 압권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높이 1미터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 옆면에는 덤벙 주춧돌을 놓았다. 민흘림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둘러 기본 기구를 형성하고 그 위에 내 4출목, 외 3출목인 공포를 올렸으며 매칸마다 세 개의 주간포를 배열하였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이며 위에 교창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ꡐ井‘ 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을 세워 후불탱화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는 건물로서 1825년(순조25) 중수되었다.
다음으로 일주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이며 건물은 정면 1칸인 맞배지붕 겹처마집으로 서까래와 부연을한 다포식이다. 앞에 9개의 돌 계단을 설치하고 그 좌우로 용두와 비슷한 석상을 조각한 이 건물은 다듬은 돌초석에 민흘림의 기둥을 세우고 전후로 보조 기둥을 세우도록 되어 있으나 위로부터 30센티미터 중간에서 보조기둥을 절단하였다. 이는 다른 일주문에서 볼수 없는 기둥 앙편에 설치된 담장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둥위로는 창방과 평
방을 배치하고 그 위로 공포가 결구 되었는데 출목수는 외4출목, 내2 출목으로 중앙에 3구의 공간포와 역시 측면에도 1구의 공간포를 기구하였다. 또 내부는 좁은 천장인데 공간에 첨차를 부착, 외부와 내부에서 포의 균형미를 꾀하였다. 그리고 양기둥 위인 주두에 꼬리를 두고 서로 중앙을 향하여 곧 구름의 조화를 일으킬 듯한 용두를 조각하여 승과 속의 경계에 위엄을 더하고 있다. 전면에는 종서로 된 ꡐ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유재란의 병화를 입지 않았다는 사전에 의해 건립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인
다.
조선 후기 불전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된 팔상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인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바로뒤에 있다. 잘 다듬은 긴뱃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은 다음 민흘림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면은 다포계이면서도 평방은 쓰지 않고 창병만을 둘러 짜서 기본 기구를 구성하였으며, 측면은 대들보와 중량으로 2중량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정으로 보아 원래는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려하면서 정면의 공포만 다포작으로 바꾼것으로 판단된다. 선암사 중수비에 의하면 선암사의 건물들은 대부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뒤 1698년(숙종24)에 약휴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다시 불에 탄 것을 1824년(순조24)에 해붕대사, 눌암대사 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팔상전도 그 때 지은 것이다.
승선교의 비밀
선암사를 오고가는 길목에는 시원한 계류가 흐른다. 그 계곡물 가운데 둥그런 홍교인 승선교가 놓여 있어 구름다리를 놓은 듯 선경이 따로 없다. 조선 후기의 돌로만 짜 맞춘 홍교로 길이 14미터, 높이 7미터, 너비 3.5미터이며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다. 길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를 쌓았는데, 결구 솜씨가 정교하여 홍예 밑에서 올려다 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의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냇돌을 사용해 석벽을 쌓아 막았다. 다리 좌우의 측면 석축도 단석 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 기단부에는 아무런 가설도 없이 자연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다. 홍예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다리는 임진왜란 이후 선암사를 중건할 때 가설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곧, 1698년(숙종 24)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시현을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어 낙심하고 있자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 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선암사여 영원하라
선암사를 나서면서 심각한 불교계의 분규가 오히려 절 집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는 데 일조를 한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고풍스런 절집 모습을 갖춘 곳이 남아 있다니 참으로 천만 다행이 아닌가 부디 재산 관리자인 승주 군수의 높은 문화재 안목을 기대하면서 아무쪼록 분규가 잘 마무리되고 부도전에 늘어선 옛 고승대덕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번창하기를 바리는 바이다. 절집 건물부터 사람사는 모습까지 그 모습 그대로 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