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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와 역사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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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명 1994년 03월 145호
음력 2월 8일은 싣달타 태자가 출가한 날이다. 석가세존은 왕이 될 사람에게 주어지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나섰다.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번뇌의 불꽃에서 번득이는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온 우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큰 여행을 얻기 위해서였다.
출가는 가출과 구별된다. 시골에 사는 소년이나 소녀가 막연하게 출세의 꿈을 안고 집을 나와 서울행 기치를 탈때, 또는 남편이나 시댁과 마음이 맞지않아 부인이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그것을 우리는 가출이라고 부른다. 가출은 세속적인 목적이나 이유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출가는 출세간적인 목적이나 이유로 집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삭발을 하거나 절 집에 사는 것만으로 출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든 욕망과 번뇌를 없애고 또 다른 이에게도 자신이 얻게 될 평화를 전해 주고자 발심할 때, 이를 출가라고 부른다. 여기서 집을 떠나는 것은 돈이나 명예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완전히 버리는 것을 뜻한다.
부처님은 출가한 제자들의 생활규범을 정하셨다. 새 옷이 아닌 누더기를 입어야하고, 밥은 구걸해서 먹어야하며, 거처는 편한 침대가 아닌 나무 밑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생활은 더운 지방인 인도에서나 가능했다. 추운 계절이 있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나무 밑에서 잘 수도 없고, 걸식하며 생활하기도 어렵다. 부처님의 생활규범을 “출가자는 아주 검박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부처님의 출가일을 맞아 필자는 마음에 찔리는 바가 크다. 고래등 같은 기와 집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조금도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포교를 한답시고 절을 더 좋게 꾸미고 싶어하고, 사람들을 더 많이 모르고 싶어한다. 다른 종교보다는 불교가 그리고 다른 절보다는 내 절이 더 번창하기를 바란다. 분중이나 신도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번 설에 많은 신도들이 세배를 하면서 돈이 든 봉투를 필자에게 가져다 주었다. 신도들은 출가한 승려도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출가승인 필자는 어느결에 직업승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청담스님은 일본 불교를 직업 불교로 규정했다. 그리고 결혼한 승려들은 한낱 삭발한 직장인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필자는 청담스님의 그러한 일본 불교 시찰담이 한국 승려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안다. 그런데 청담스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관찰해 보면, 지금의 한국불교 출가자들, 특히 크고 작은 절의 주지를 맡고 있는 스님네의 생활이 부처님의 출가 정신과 일치하는지 의문이 간다. 일본 승려들에 대한 청담스님의 혹평이 오늘날 한국 불교 주지승들의 출가 직업자상을 빗대어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스님네가 주지직을 버리고 모두 기도터나 선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외형적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가람을 수호하는 지금의 모양을 조금도 바꿀 필요가 없다. 부처님께서도 재세시에 이미 원시 불교 교단을 이끌고 계셨다. 번뇌의 불길을 잠재우려고 출가한 부처님이 다시 승단이라는 큰 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집은 그 전의 집과는 다르다. 이전이 집은 업의 몸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데서 나오는 순간적인 허망한 쾌락을 주는 곳이고, 출가 승단의 집은 위로는 해탈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해탈시키는 자비를 베푸는 곳이다.
부처님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부처님이 왕족 출신이라는 데 있지 않다. 출가했다는 데도 있지 않다. 부처가 되었다는 데도 있지 않다. 그것은 많은 중생을 구제했다는 데 있다. 부처님이 몸소 미혹한 중생의 역사 속에 동참했다는 데 있다. 자신을 구하는 곳에서 남을 구하는 곳으로 나아갔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수행자의 길을 출가, 수행, 견성 그리고 중생구제의 순서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의견은 다르다. 출가가 완전하면 그것이 그대로 수행도 되고 성불도 되고 중생구제도 된다고 생각한다. 석가세존이 정각을 이룬 내용을 이미 중생들에게 전해 주었다.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곧 “처음에 출가의 마음을 내었을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룰 때”라는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출가가 바로 중생 구제라고 해서 오늘 출가한 사람이 내일부터 부처님처럼 포교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출가자는 기본적인 수행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궁극의 깨달음을 기다린 뒤에야 불도를 전하는 일을 시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출가와 깨달음을 둘로 보는 이원론이다. 중생을 해탈의 법으로 인도하는 역사에 참여하면 그것이 바로 출가이다.
중생 구제와 출가가 둘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정한 출가는 외형적으로 집을 떠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거짓된 작은 나를 위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사느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삭발을 하고 깊은 산속 이끼 낀 바위 밑에서 산다고 하
더라도 자기를 위하는 데만 열중한다면 그는 속가에 있는 것과 같고, 아무리 시끄러운 시정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구하는 일에 자기를 바친다면 그는 출가해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정한 출가는 이판승이냐 사판승이냐 아니면 출가중이냐 재가중이냐로 구별할 수 없다. 부처님이 가졌던 출가의 마음을 갖고 부처님이 가르쳐 준 깨달음을 실천하고 전하느냐 마느냐로 구별해야 한다. 또 오늘 출가의 마음을 먹었다고해서 내일에도 똑같은 마음이 든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출가자는 시시각각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찰나찰나 새로 발심하고 새로 출가해야 한다. 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출가하는 마음을 내는 기간만큼만 출가라고 부를 수 있다. 석가세존 출가일을 맞아서 우리의 출가 자세를 다시 한번
되살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