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도록 그리워지는 사랑 사랑 하나만을 먹고 살았던 일도 잊어버렸어요. 꿈에 꿈 을 먹고살았던 일도 잊어버렸어요. 온통 끼고 보드린 역사를 바라보면서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사랑으로 눈물 떨구던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꿈에 안겨서 조국을 그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여 오늘도 그 날에 그 꿈자리에 남아서 바람이 되어 바람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 날 그 꿈자리에 나는 앉아 있어요.
「리인모 선생을 생각하며」 6에서
절망에서도 좌절에서도 멈추는 일 없이 묵묵히 나아가는 진관스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시인이다. 승려이기 이전에 한민족임을 절감하며 깨어 있는 의식으로 세계를 응시하는 시인, 민족 시인이다. 꿈을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아가고자 하는 스님의 신념은 발걸음마다 하나의 씨앗으로 맺어져 작고 지리한 일상 속에 새로운 의미로 피어났음에 틀림없다. 검은 법복에 황색빛 나는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서 마주 대하는 이들을 향해 연신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스님의 얼굴은 동안이다. 웃음 탓인지, 아이 같은 커다란 몸동작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씩씩한 소년 의 모습을 닮았다. 금새라도 청와대 뒤 인왕산에 올라 세상을 향해 포효할 듯한 기개가 넘친다.
인사동의 십층 남짓 되어 보이는 건물에서 스님을 만났다. 은은한 한지에 단아하게 힘 주어 서필되어 있는 ‘전국불교인권위원회ꡑ를 보면 이 곳의 성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규모는 단출하게 느껴졌지만 흙 냄새 물씬 나는 현장의 꿈틀거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힘겹던 시절, 어디인가 있을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내딛은 발걸음은 계룡산 갑사에 이르러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ꡒ그 때가 열일곱의 나이였으니 기대한바가 컸는데, 맞닥뜨린 승려 생활에 대한회의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향곡스님을 열여덟이 되던 해에 뵈었는데, 제게 소중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향곡스님을 따라 동화사 상선원에서 용맹정진으로 한철을 보냈습니다. 하루 두 시간만 자고 계속 수행 정진을 했는데 ,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했습니다. 그 한철의 경험은 요즘에도 매서운 채찍이 되어 나태해지는 저를 다잡게 합니다. 그 때를 떠올리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얼마를 선방에서 보내다가 서울 조계사에 와서 살게 되었단다. 바로 그 무렵이 스님의 의식을 서서히 뒤흔드는 시기가 되었던 듯하다.
ꡒ출가하기 전까지 서당에서 공부를 했는데 , 맹자가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웠어요. 맹자는 대부분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있었나봐요. 맹자 공부를 통해 사회에 대한 스님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서울에서 체험한 여러 만남의 현장들은 스님의 가슴에서 바삐 움직여야하는 두 손을 이끌어 내기 시작하였다.
ꡐ70년대 초 정치 집회에서 대학생들과 만나면서 사회 교육의 필요성을 지각하였습니다. 스님으로서 시대에 맞추어 학문을 하리라는 생각도 들어 76년도에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개인적으로 의미 있던 한해였습니다.”
변화의 곡선은 그 선을 깊이 했고 의식 또한 튼실하게 성장해 스님이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한 것도 이 무렵이다. 법복 입은 승려의 보편적인 모습을 과감히 떨치고 일어서 부당하고 왜곡된 현실 앞에 의연히 대응하는 예지의 시인으로 변모한 진관스님을 볼 때, 의식의 변화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는 삶의 색채를 온전히 다르게 만드는 힘이 있지 싶다.
ꡒ시의 본질이니 상징적 의미니 하는것은 알지도 못했고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일상 가운데 한 부분처럼 시를 썼습니다. 한 가지에서 무수히 피어나는 싸리 꽃처럼 많은 시를 써서
팔만사천 편에 이르도록 하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서정시 , 자연시 만을 썼어요.
그리고 승려로서 쓸 수 있는 시만을 쓰고자 했습니다. 74년 시문학사 추천을 받고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저의 시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현실 속에 호흡하는 시, 의식과 둘이 아닌 시로 변했지요.ꡓ
시에 대한 스님의 열정은 대단했던 듯하다. 좀더 나은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이 솟아오를 때마다 시를 썼고 도움이 되는 책을 읽었단다. 그리고 85년에는 서울예전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쳤으니 시에 대한 애정이 얼마만했는지 짐작이 간다. 더구나 85년과 86년은 스님이 현실 참여의 발걸음을 어느 때보다도 빨리 했던 시기였음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시인이자 운동가 출가사문이 온몸으로 챙겨야 할 화두, 견성성불의 그 날까지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함이 본분이어서 인지 스님들에게는 글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멀리 해야할 것 가운데에 하나이다. 그런데도 진관 스님은 시인이며 학교도 세 곳이나 마쳤다. 게다가 이른바 운동권 스님이다.
ꡒ우리의 외로운 역사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힘겨운 수난과 침략속에서 우리의 불교는 어떠했습니까. 과거 우리 불교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역사의 거센 물결 앞에 나서서 함께 헤쳐 나왔던 불교였지 바람이 잔잔해지길 기다리며 숨죽이던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불교가 현실에 대처했던 그 위상을 되찾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스님의 본분이 아닙니까. 교육적인 신념으로 사회인들의 인식속에 불교 경전을 주입하고 포교할 계획입니다. 불교 경전을 통한 확실한 믿음과 신뢰만이 그 옛날의 불교위상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입 푹 다물고 시대를 지나치듯 흘러가는 종교가 절대 아니라고 스님은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스님의 삶은 철저한 사문의 자리에서 있는 것이다. 치열한 노력으로 이 시대의 깨어 있는 사문이고자 하는 것이다.
80년 광주항쟁은 누구나 그러했지만 그 어느 사건보다 스님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단다.
특히 무력했던 우리 불교의 문제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한다. 불교가 지나칠 만큼 사회적인
문제에는 적응하지를 못한다는 지적이다. 사실 불교가 호국불교라는 미명 아래 어정쩡하게 권력의 그늘에 편승해 버리는 감도 없지는 않았지 싶다.ꡐ81 년도 중앙승가대학 교무 소임을 보면서 뜻이 맞는 승가 대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해 나갔지요. 참여가 필요한 곳은 어디나 찾아갔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려고 끝까지 노력했습니다.ꡓ
생각해 보면 텔레비전 화면에 스님들의 법복이 휘날리고 푸른 머리 빛이 비춰지던 때가 그 무렵이었던 듯하다. 스님들이 저럴 수가 있나. 아무리 옳은 행동이라도 좀 너무하지?
낯설고 조마조마한 느낌으로 스님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혼란스러운 내적 갈등을 체험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같은 여정을 걸어가는 다른 스님들조차도 퍽 이나 힘들었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진관스님의 어깨는 두 배로 무거웠을 것이다. 뒤에 든든한 의지 처도 없고 때때로 달려드는 따가운 시선이 있었으니 말이다.
ꡒ불교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의 손길이 스친 뒤에 두 손 묶고 관망만 할 수는 없지요.“
민불련 창립 , 10.27법란 규명 ,종회의원 직선운동 둥 불교계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스님의 운동 방향은 언제나 불교인의 확고한 입지 아래 정해졌고 이루어졌던 셈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 저 깊은 곳에 자리한 불교의 맥을 인식한다면 우리 불교가 어떻게 통일에 무관심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땅의 농토에 무심할 수 있겠냐는 스님의 따가운 질책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친다.
ꡐ민족을 위한 신념 아래 우리 불교인들은 민족의 주인은 우리 자신임을 깊이 각인하고 뿌리 없이 외세에 흔들리는 풍토를 바로잡는 일에 일조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뜻 있는 분들은
포교의 일선에서 대중의 생활 깊숙이 부처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경전은 당시의 삶을 기록한 것이고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대승적 차원에서 사회 의식과 현상에 대해 대중과 더불어 인식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ꡑ
스님은 사회와 동떨어진 불교를 걱정한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승려의 교육화를 누누히 강조한다. ꡒ전국 사찰에서는 각 대학마다 지원금을 보내 불자 대학생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 학자가 나오고 탄탄한 불교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이토록 무관심한 불교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해요ꡑ
지난 시절의 힘겨움을 얘기할 때도 진관 스님은 마치 좋았던 일을 되새기는 듯이 표정이 밝고 웃음도 맑다. 어두운 미래는 결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냐는 식의 낙관주의(?)인듯하다. 앞으로 이루어야 할 불교계의 일을 하나하나 지목하는 스님의 모습은 이 산적한 문제들을 한해가 가기 전에 모두 이루어 낼 성싶다.
요즘 부산에 설립한 ꡐ부산불교법률상담소‘ 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고 한다. 이 곳 ꡐ전국불교인권위원회, 도. 이제 더욱 여법한 세상 속에 넓디 넓은 도량으로 자리하려고 애쓰는 중이란다. “인권의 문제는 불교의 본질적인 얘기이기도해요. 그런데도 불교는 이를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우리의 또 다른 이웃에게 들려 줄 부처님 말씀을 묻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손길이 가장 많이 필요한 곳임을 인식해야겠지요.”
평생을 감옥에서 살다가 고향인 북녘으로 간 리인모 선생을 그리는 싯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날에 말했지 않아요.
내가 기도하면 꼭 간다고 분명히
비행기 타고 간다고 말했지 않아요.
어때요, 내 말이 맞았지요.
비행기 타고 간단 말 말이어요.
믿음과 확신이 빚어 낸 순수함이 동자의 목소리로 울린다. 붉은 태양이 굵은 붓의 흔적을
또아리 지며 화선지 위에 타오른다. 날개를 하늘로 힘차게 틀어 올린 두 마리의 학이 태양을 향해 날아 오른다. 통일 조국을 염원하는 마음을 천 년을 사는 학의 영원성을 빌어 그린 진관 스님의 묵화이다. 지옥문 앞에서 고통 받은 모든 중생이 구제되는 날, 그 날 바로 열반에 들겠다는 지장보살의 장엄한 원력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자 하기에 진관스님은 힘들고 버거워도 이 짐을 벗어 놓올 생각을 내지는 않는다.
새로운 조국, 불국정토가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쉼 없이 이곳 저곳을 찾아다닐 것이다. “견불광명 즉득수기見佛光明 則得授記” 광명을 봄으로써 부처님의 수기를 받는다는 이 경구가 스님에게 큰 힘이 되곤 한단다. 스님도 쉬듯이 머물 수 있는 날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기에 스님은 미륵경을 늘 수지하시는 것이리라. 용화 세계에서 너와나 없이 모두 하나되는 이상 세계가 바로 이 곳에서 이루어지기를 비라는 간절함 때문에 말이다. 그 때야 진관스님의 발걸음이 한가해지지 않겠는가 싶다. 이십세기를 마감해 가는 오늘날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불국토란 어떠한 세계일까.
푸르른 산과 들에 어리는 따스한 봄 기운 아지랑이 같은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 먼 세상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