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의 완화-데바달다의 불만
부처님이 계율을 늘 고정시켜 놓거나 단단하게 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수행자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전제되고, 또한 계율 제정의 근본 목적이 억압이나 구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과 대중화합으로 정법을 오래 머물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수행자를 일컬어서 사문沙門Sramana이라고 하였다. 이는 집 없는 사람 , ꡐ숲속에 거주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생활 양식은 걸식으로 음식을 얻고, 남이 버린 천조각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며, 소의 똥오줌으로 만든 약을 사용(사의지四依止)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신도들에 의하여 집이 기중되고 음식물을 시주받는 형태로 바뀌면서 한곳에 머무는 승원價院생활로 바뀐다. 죽림정사나 기원정사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수행자인 사문의 모습과는 통 떨어진 것이었다. 이를 묵인하는 부처님께 데바달다(提바 達多)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사문은 일생 동안 임야에서 살고, 떨어진 옷만을 입고, 탁발에 의지하며, 실내에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단의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교단사에 나타난 최초의 불만인 셈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승원 제도를 허용하고 데바달다의 요구를 배척한 이유는 추측으로 밖에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사리불이 이 점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감각기관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삼림이든 지붕이 있는 집이든 다를 바가 없다. 세계의 어느곳 이든 다 선정을 위한 장소인 것이다ꡑ 하고 대답한 데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법(진리)에 의지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밝히려는 수행자에게 장소의 형식적 규정은 그렇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부처님은 생각하셨을 것이다.
2차결집- 상좌부와 대중부의 마찰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마하가섭에 의하여 계율이 고정된 뒤 백여 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계율에 철저하던 상조부의 야사耶舍 비구는 바이살리( 舍 ) 거리에서 비구들이 재가신도들에게 금전을 시주 받는 것을 본다. 그 또한 돈을 받으라는 권유를 물리치면서 이는 비법이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바이살리 비구들은 대중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그것이 바로 비법이라고 되받았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칠백여 명의 비구들이 모여 계율의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당시 얼마쯤 진보적인 바이살리의 비구들에게는 십사 十事라는 계율이 이미 나름대로 관행화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소금의 개인 저장 문제, 정오를 얼마쯤 넘긴 시간의 식사 문제, 부처님이나 스승들이 해 오던 관례를 따르면 설사 비법이라도 계율의 위반이 아니라는 문제, 금은 따위의 돈을 보시 받는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은 당연히 열 가지 일을 모두 비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율장의 결집을 통하여 교단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2차 결집이다. 상좌부의 끊임없는 호법 의지의 발로였다.
대중부의 분리
그러나 당시 열 가지 일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으며 계율의 위반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바이살리의 비구들은 교단의 분리를 선언하면서 대중부라고 이름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 이미 각 지역 승가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다만 공식적으로 분리를 선언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불교 교단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보더라도 교법이나 계율을 결정하는 중앙교단의 권위가 어느 지역 승가에도 부여되지 않았을 뿐더러 행정적으로도 중앙 집권적인 기관이 실상 없었다. 다만 1차결집의 결과에 의존하여 그 기본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각 지방과 각 시대의 형편에 띠라서 나름대로의 계율을 추가시키고 해석을 덧붙여 가는 양상으로 전개되어 그 지역 사정을 나름대로 수용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이것은 그 지역에 대한 승가의 적응 또는 토착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 역시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방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각 지역 승가의 독자적 계율 운영을 일러서 이른바 \'부파불교시대\' 라고 하였던 것이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부처님은 일이 있을 때마다 계율을 하나씩 제정했고, 또 부족한 부분은 언제나 그때그때 보충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임야 생활에서 승원 생활을 선택하면서 당시 보편적이던 4의지를 버리는 과감성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4의지를 지키던 유행 유행(유)行 교단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승원 생활을 확립한 불교와 자이나교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단의 미래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하가섭에 의해 부처님의 계율이 고정화되면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경직성은 부차적 조항을 덧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극복해 갔다. 대중부 역시 근본적인 계율은 그대로 둔 채, 십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계율(마하승가율)이 상좌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대
중부의 배경이 야사 비구가 머물던 곳과는 달랐다. 야사 비구의 지역 승가는 바라문교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고 불교 이외의 다른 종파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율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곳이었다.
반면에 바이살리는 캔지스 강변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에 따른 상업 도시로 경제 활동과 화폐 사용의 일반화에 따른 교단의 자연스러운 적응이었던 셈이다. 다른 부파의 각 율장도 마찬가지였다. 변할수 있는 것과 변할수 없는 것의 절묘한 조화, 이것이 율장이 안고 있는
영원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