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四大)의 보이지 않는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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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훈
1994년 03월 145호
아름다운 것들을 다른 아름다운 것들과 비교해야만 한 아름다움의 형식과 질감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나는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비교해서 드러나는 특성에 바탕을 둔 진술이란 결국 이쪽과 저쪽의 상대성을 엮어 낼 뿐, 한 개별적 사물의 고유한 본질을 적극적으로 규명해 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비교에 의한 진술이 말짱 오류인 것은 아닐 터이나 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진술하는 인간의 언어가, 먼저 그 대상의 본질을 과학화함으로써 대상이 한 존재로서 온전해지기를 바랬다. 과학이 사물의 보편성과 법칙성을 설명하고 그 결과로서 사물의 개별성이 드러나기를 바랬다.
1993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반도의 선사시대부터 원 삼국시대에 이르는 토기土器들을 한자리에 모아 기획 전시회를 열었다. 그 전시회는 무척 감동적이고 고무적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정치적 강역과 출토지에 따른 유형 구분보다는 시대 양식에 따른 유형 구분이 덜 피상적이며, 그것보다는 원형의 추출과 그에 대한 성찰이 훨씬 더 진지하고 표현적인 언어를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는 품게 되었다.
굳이 정치적 강역에 따라 토기들을 유형화해서 말한다면, 고구려의 물건들은 실용성 그 자체를 당당하게 미화해내고 있었고, 신라와 가야의 물건들은 제의 적이고 주술적인 인간의 꿈이 물건의 선과 형에 투사되어 있었으며, 백제의 물건들은 제의 적인면이 상당히 약화되면서 실용성과 제의성 사이에 너그러운 조화를 이루면서 삶에 대한 경건성을 여유 속에 용해시키고있었다.
고구려의 물건들은 삶의 앞쪽에 서서 삶을 끌고 나가려는 인간들의 전향적 실용성이 미의식의 조작을 통과하지 않은 채 실용성만으로 단순한 아름다움에 도달해 있었다 그 토기들은 졸拙한 것이 왜 아름다운지를 그야말로 졸 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백제의 물건들은 삶의 깊은 안쪽에 들어앉은 인간이, 자신이 파악한 삶의 질감과 내용을 세계의 표면을 향하여 겨우 밀어 올린 것 같은 표정들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물건들은 문명 세계의 매체들과 관행들이 지배적 질서를 구축하기 오래 전에 이 세상 밖으로 떠밀어 올려져 본의 아니게 나들이를 한 인간 최초의 미의식이라고 할 만했다. 그 물건들은 한결같이 무슨 기쁨을 속으로 간직 했는지 웃고 있었고, 물건이 삶 속에서 배태된 그 출생의 근원 앞에서 경건하였으며, 그 웃음과
경건성으로 더붙어 수줍어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런 느낌과 그 느낌을 적어 내는 언어가 몹시 불안하고 안스럽고 또 두려웠다. 토기에 대한 나의 이 느낌들과 언어는 도대체 어떤 인식론을 근거로 하는 것이며, 그것을 옮기는 언어는 전달할 수 있는 것인가. 나의 느낌과 언어는 혹시,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선사 토기들처럼 세상에 의하여 감지되고 해석되는 것이 두렵고 수줍어 마땅히 입 다물고 스스로 고요해져야 옳은 것이 아닐까.
나는 중앙 박물관의 고대 토기 앞에서 난감하였다. 이런 난감함을 스스로 위로하려고 백제 토기를 재현해 내고 있는 토기 가마를 찾아갔다. 충남 부여에있는 ‘백제요’ 의 가마였다. 거기서 나는 오랫동안 가마의 어두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어둠은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이었지만 그 인공성을 제거하려는 또 다른 인공적인 장치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인공성을 제거하려는 또 다른 인공성에 의하여 우리는 자연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는 있는데, 그 때의 아름다움은 인공자연이다. 인공자연은 자연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인간 쪽으로 친숙하고,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해설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가마의 어둠은 물, 불, 바람 그리고 흙 같은 원소들이 서로 자연으로서의 성질들을 삼투시켜 가며, 그 삼투 작용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새로운 인공자연을 빚어내는 잉태의 공간이었다. 그 구조는 매우 거대한 여음 女陰과도 같았다. 나는 그 안쪽을 넋을 잃고 들여다 보았다. 도공들은 가마에 불을 때는 행위를 ‘가마 익힌다’ 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토기가 흙으로 빚어져서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 곧 토기의 회임에서 출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매우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토기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로 들렸다.
불은 물과 상극이지만, 둘은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물의 흐름은 지표 위에서 가장 자연스런 물리력의 유통을 보여 주지만, 불의 흐름은 공기 속에서 가장 자연스런 화학력의 유동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편안한 곳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들은 좁은 곳에서 넓은 곳을 지향하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력에 순웅하고 그 외력을 넘어선다. 가마안은 벽으로 구획되어 있고. 그 벽에는 불구멍(살창구멍)이 뚫려 있다. 불들은
그 구멍을 통해서 구획을 넘어간다.
가마 벽의 불구멍은 벽의 중심 부분에 뚫린 구멍이 작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구멍의 크기는 넓어진다. 불길을 가마의 가장 자리로 유도함으로써 가마전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한 개 한개의 그릇이 아니라 가마 전체를 ꡐ구워 내기‘ 위한 인공적인 장치였다. 불은
그 구멍을 통해 가마속을 흐르면서 흙과 물의 성질 속으로 삼투되어 흙과 물의 성질을 변화시킨다. 완성된 한 개의 토기 속에는 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물은 흙의 입자들을 서로 반죽시켜서 흙의 흩어진 알맹이들을 엉기게 한다. 흙은 물을 만나서 비로소 가소성을 갖는다. 물과 흙이 결합된 반죽은 물과 흙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지만, 더 이상 물이나 흙이 아니다. 물과 흙이 만나서 빚어내는 이 가소성과 응집력이야말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수 있는 자유의 터전이다. 그 터전은 인간의 꿈을 받아들여 주는, 귀화할 만한 터전이다.
흙과 물을 반죽할 때 반죽은 인간의 손바닥 손금으로 스밀 듯 인간의 살에 밀착한다. 반죽은 거의 인간의 살의 연장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꿈과 아름다움의 모양새를 그 반죽을 주물러 실현할 수 있다. 물레의 회전 운동은 그 꿈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공간화 시켜 준다. 물은 흙의 물리적 성질을 변화시키고, 불은 불과 흙 그 두쪽을 모두 화학적으로 변화시킨다. 손으로 빚어진 반죽은 그릇의 모양을 갖추었으되, 아직은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의 잠재력이며 그릇의 가능성으로서 아름답다.
그러나 불을 만나기 전의 반죽의 아름다움은 몽상 속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반죽의 아름다움은 흙의 깊은 안쪽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의 아름다움이다. 불이 그 가능성을 발현시킨다. 빚어진 그릇이 마를 때, 물은 흙을 떠난다. 물이 흙을 떠날때 물은 제 몸을 거두어 가고 그 기능만을 흙 속에 남기는데 흙은 물이 남기고 간 기능에 의지해서 형태를 유지한다. 그리고는 불이다. 기마 속으로 들어간 그릇의 가능성들은 익어가는 가마 전체의 틀 속에서 저마다의 운명을 발현한다.
토기의 색은 흙의 깊은 안쪽에 들어있는 것인데 그것들은 불의 힘에 의해 세계의 표면으로 끌어올려진다. 붉은 흙이 검은 혹은 푸른 토기 혹은 자주색 토기로 다시 태어난다. 그 색들은 원래 흙의 캄캄한 안쪽에서 서러운 가능성으로서 억만 년을 매몰되어 있던 색들의 잠재태일 터이다. 불이 그것들을 끌어올려 살아나게 한다. 그 색의 가능성들이 색의 발현태로써 끌어 올려지는 과정은 매우 길고도 즐거운 여정이리라.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쓰여지는 나의 글은 그 여정에서 보여지는 저 은밀한 이야기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나의 토기가 태어날 때 그것들은 물과 불과 흙과 공기의 모든 원소들을 그 안에 저장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토기는 그 어느 요소도 아닌 새로운 자연이다. 가마에 불이 꺼지고, 토기들이 쏟아져 나올 때, 완성된 토기는 저마다의 운명의 색깔로 반짝이거나 혹은 조용하다. 그것들은 저마다 개별적인 운명의 표정을 띄고 있다. 토기가 쏟아져 나올 때 그것들은 얼마나 많은 말들을 참고 있는 것인가 그것들이 걸어오는 말에 나는 응답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공통된 본질 위에서 개별적 운명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 비밀에 응답하지 못한채, 토기 한점을 사서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