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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란 생사에 대한 자신의 혁명입니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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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혜암 1994년 03월 145호
참선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없다
오늘은 신심을 내어, 생사에 해탈하는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합니다.
신심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일은 이 한 물건을 찾는것 말고는 없다고 믿는 것이 신심입니다. 참선은 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만을 들으러 절에 들락거리는 것이 신심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계행만을 잘 지킨다해도 참선 하나 잘 하는 사람에겐 당할 수 없어요.
스님이 되어서도 시주밥만 먹으면서 빚만 지고 공부들을 하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참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둥 어떤 부처님도 참선해서 부처가 되었지 다른 방법으로 부처 된 이는 반쪼가리도 없어요. 나는 큰절에 있을때 거지처럼 여기 가서 한 푼, 저기 가서 한 푼을 달라고 하며 돌아다닐 것이 뭐 있는가 내가 기도해서 관세음보살이 되고 보현보살이 되면 될 것이 아닌가 히는 생각으로 기도했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 모두 남에게 주어 버리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성인입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남에게 나누어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택시나 자가용으로 절 마당까지 와서 불공드리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공이 몇 푼어치의 공덕이 되겠습니까. 또 이런 불공이 돈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 수십리 길을 걸어와 부처님 앞에서는 것과 비교해 얼만큼의 공덕이 있겠습니까. 물질이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이 불법입니다.
스님네들도 없는 사람이 조금 가지고 왔다고 얕보면 지옥 갑니다 두메산골에 살며 어떠한 인연으로 불법을 만나 절에 오는가, 오히려 고마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땐 이주 기뻤어요. 그래서 도와주게 됩니다.

공부는 가난 속에서 해야
예전 지리산 산중에 혼자 살 때의 일입니다. 정월 초하룻날 신도 세 사람이 먹지도 않고 목욕재계하고 절에 올라오다가 큰 눈을 만났습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절엘 찾아오다 기진맥진해 다 죽게 되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두 사람은 전생에 산삼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절까지 찾아왔어요. “스님, 스님 큰일났어요ꡓ 이렇게 소리치며 두 사람이 절문을 들어서며 다급하게 나를 불렀어요. 그때만 해도 산을 다니다보면 다리가 잘려 절뚝거리거나 배가 뚫어져 창자가 쏟아져 나온 멧돼지를 심심찮게 보았고, 호랑이가 왔다 갔다 하던 때라서, 옳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간 모양이구나 생각했어요.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미련해서 그런지 겁이 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기회에 호랑이에게 법력을 보이려고 했어요. 감히 네가 어디 이 청정 도량에 나타났냐고 호령하려고 단단히 벼르며 신도들을 따라나섰어요. 나고 죽음에 자유로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수월하기를 바라셔야 되겠습니까. 목숨을 내놓고 공부하고 있었으니 은근히 내 법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작대기를 하나 짚고 배꼽까지 내린 눈길을 헤치며 가보니 눈속에 사람이 파묻혀 죽어 있었어요. 두 사람은 같이 오다 너무 지쳐 쓰러져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가 버렸지. 참 난감하더군요. 그래서 죽어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사람을 등에 업어 지팡이로 받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해 암자로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 누워 있어요. 그래 업고 온 사람을 마루에 뉘어 놓고 방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 마루에 뉘었어요. 경황중에도 언 사람이 따뜻한 방안에 있다 그대로 눈을 감으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이불이나 있습니까. 있는 좌복을 모두 꺼내어 깔아 눕히고 미음을 끓여 좀 정신 깬 사람에게 주니 조금씩 먹어요. 그렇게 시간이 조금지나니까 먼저 올려온 두 보살이 깨어나 정신을 차리더니, 죽어 늘어져 있는 보살을 저희끼리 주무르고 난리를 쳤어요. 그러니까 죽어 있던 사람이 눈을 뜨고 일어났어요. 저희끼리 한참을 붙들고 울더니 스님 덕분에 살아났다며 인사 치레까지 하고 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그 보살들은 내가 있는 곳에 오던 길이 아니고 다른 암자에 있는 비구니 스님을 찾아가다 눈을 만나 그만 이리로 들어섰다는 얘기였어요.
목기 그릇 장사를 한다고 했는데, 그 죽을 고생을 하며 눈길 속에 자기 몸 하나 끌고 오기도 힘들었을 터인데 스님에게 줄 목기 그릇이랑 쌀이랑 하나도 내 버리지 않고 보듬고 올라온 거예요. 참 미련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정월 초하룻날 먹지도 않고 그 먼 길을 쌀이랑 이고 올라온 그들의 공덕을 오늘날 자가용 타고 절 마당까지 올라오는 신도들이 당해 내겠습니까.

고양이가 쥐를 잡듯, 닭이 알을 품듯
손을 털고 고향에 돌아가니 아는 사람이 없구나. 그러나 한바퀴 둥글고 밝은 달은 창 앞에 걸려 있더라는 말 가운데에, 걸려 있는 달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있으니 저 법은 달이 보이지 마음이 없으면 밝은 달이 보입니까. 허공이 크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없으면 허공이 어찌 큰 것을 알겠습니까.
한산 정언 선사가 자신을 찾아와 예를 갖추고 절을 하는 동산스님에게 묻습니다.
“너는 신(믿음)이 섰느냐”
“제가 불법이나 스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여기를 찾아 왔겠습니까“
“네가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를 지켜야 영험이 있을 것이다. 만일 계행이 없으면 허공에 누각을 세우는 것과 같을 것이니, 계행을 지키느냐?“
“지금 오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물은 것은 그런 소소한 오계를 말함이 아니다. 화두를 들 때 분별사량을 하지 말 것이며, 내가 누구인가 하는 대목만을 알려고 해야 한다. ”
설사 부모를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나를 모르는 죄보다 더 크진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만 안다면 부모를 죽이고 날마다 오입질을 하고 다녀도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림자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쥐가 한 구멍맏을 뚫어야 수지가 맞듯 오로지 한 구멍만을 뚫어야 합니다. 화두도 ‘이뭣고’ 한가운데만 뚫어 나가야지, 재미가 없다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 공부가 안됩니다. 재미도 없고 알래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들어가야 깨칠 수 있습니다. 알아지면 벌써 귀신이 덤벼듭니다. 갈수록 깜깜해야 해요. 화두를 크게 깨쳐 도인이 되려면 분명히 모르는 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비법입니다. 스승이 없이는 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경이나 어록을 보려고 하지말고, 간단히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만들어 앉으나 서나, 일이 있으나 없으나 물 흘러가듯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이뭣고‘ 하되, 고양이가 쥐를 잡듯, 닭이 알을 품듯 끊일 사이 없이 해야 합니다.
아직 깨치지 못했으면 늙은 쥐가 판대기를 쪼듯 옮기지 말라.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꼭 그 대목만 알려고 해라. 공부를 짓는 식이 이렇습니다. 만일 도를 깨달아 열반 락을 즐기려면 세상에 인연을 다 버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식이나 돈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집착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돈을 써도 쓰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먹어도 먹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마음이 귀중한 것이므로 세상의 반연을 끊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 분상에서는 여자와 같이 살아도 애착이 없으면 여자를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고집이나 삿된 마음을 버리고 진실되게 생사, 나고 죽는 큰 공부를 하면 우린 죽지 않습니다. 옷 입고, 밥먹고,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몸을 버려도 우린 죽지 않아요. 더 좋은 몸을 받으러 가지.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