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회의에 재심 호계위원으로 참여하셨다지요?”
초심 호계위원회를 거쳐 올라온,징계 받을 스님들의 잘못과 징계 내용을 검토하는 소임이었다.
“------참 어려운 소임이었어요.”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임을 맡기에는 부족한 사람 이라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으나 간곡한 청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회의 전 날 걸려 온 확인 전화에는 참석하겠노라고 해 놓고는 조계사 문 앞에서 서성대다가 두 번이나 발길을 돌렸다. 자기 정화가 수반되지 않은 외부 정화란 결국 “실패”가 아닌가 싶은 깊은 염려 때문이었다.
“순수한 수행승이라면 종법 운운 이전에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가 한 개인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스님의 이런 자성은 “죽을 각오로 진지하고 꾸준하게 정진해야 할 수행자들의 나태하고 안일한 수행 태도에 관한 질책으로 이어졌다. “교육은 행자 시절에 시켜야 해요. 스님이 되고 나면 힘들어지지 . 속세에서도 먹고 살려면 대학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승가대학에 들어갔다가 중도에 파기하고 나오는 것을 예사로 생각해요. 스님만 되면 집 걱정, 옷 걱정, 밥 걱정이 없어지니 골치 아파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행자 교육은 적어도 삼년 이상은 시켜야 해.
양보다 질이지요? 스님은 그래서 이번에 개혁회의에서 선원법에 관련하여 마련된 “기초 선원” 개설 법안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다. 세속의 이른바 ‘특수 교육, 천재 교육’ 따위에 견줄 만한 이 제도는 산문에 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심이 된 사람은 강원을 이수하지 않고도 바로 선원에 들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원 교육이 한문 교육에 그치고 만 점이 없지 않은 만큼, 기초 과정은 승가대학이 중추적으로 맡게 하고, 강원에서는 대학원 수준의 교육이 펼쳐져야 한다고 무여스님은 생각한다.
“승려의 자질은 품성이 좌우하는 면도 있지 않겠습니까.” “승려는 품성에 힘 입기보다는 교육 기관에서 만들어 내야 할 바이야. 규격화된 작품이라도 만들어 내야지. 총력을 기울여야 해. 안 그러면 종단의 앞날이 어두워요. 기초 선원이 제대로만 된다면 한국 불교가 달라질 기틀이 마련되는 것 아닌가 싶기까지 해요. 수행은 앞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인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제대로 시행하려면 지독하게 해야 해요.”
포교 문제에 있어서도 불교가 이즈음 들어 많이 활성화되기는 했다지만, 활성화 이면의 “비불교적인 요소”와 바람직하지 않은 제반 현상에 대한 깊은 자경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여라도 “자신도 잘 믿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말씀만 옮기는 행위는 또 다른 업을 짓는 일일 따름이다. 행자 둘과 스님 다섯 사림이 있는 이 곳에서 중 노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시냐고 물었더니 “부처님 말씀대로만 살라고 하지”하셨다. 말씀대로라면 호락호락한 자세로 수행에 임하는
스님에게는 큰 부담이 될 터였다.
“왔다가 떠나는 사람이 좀 됐어”하고는 웃으신다. 스스로 율법에 엄정한 삶의 태도를 본보이기만 하시나 했더니 , “산중에서는 이 옷이 어울리나 시내에서는 시내 풍습에 걸 맞도록 승복도 깔끔하고 보기 좋게 디자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유연한 일면도 갖고 계셨다.
“왜 출가하셨습니까?”
살아가면서 삶의 큰 흐름을 거스르게 할 만한 계기가 누구에게나 두어 번 있을 법하다. 그것이 속가를 떠나 수도자의 길로 접어드는 일임에랴. 답변은 뜻밖에 싱거웠다. “그냥 절이 좋대요”
경북 금릉군인 속향인 스님은 절에만 들를라치면 꼭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했다. 병약한 데다가 말수도 적고, 그저 “뽀시락 장난” 이나 하며 집을 뱅뱅 돌던 아이적에 그러나 스님은 절에 가면 밥도 잘 먹히고, 마구 뛰 놀고 싶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곤 했다. 서울에서 경제학도로서 대학에 적을 두게 된 것은 경제학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도 인접 학문-정치, 사회, 문학, 철학,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다른 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커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연은 무심하게 왔다. 대학 재학중에 입대하여 육군 본부에서 군복무를 하던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조계사에 들렀다가 반야심경 가운데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한 법문을 들었는데 그것이 스님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때부터 읽은 불교 관련 서적이 발심의 계기가 되었다.
‘먹고 살만한’ 중농의 장손이었던 스님은 제대 뒤에 잠깐 직장 생활도 했다. 그저 고향에서 농사를 짓거나, 살살 자건거나 타고 다니면서”교사나 면 서기 노릇을 하며 장손의 소임이나 해 주기 바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집안 가풍도 아니고 하여 엉거주춤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불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 그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의심은 확인해 보아야 후환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행길이 아니라, 그저 한 서너 달 지내다 내려갈 요량으로 해인사로 들어 갔는데 그것이 그대로 스님의 출가 길이 되었다. 지난해 입적한 희섭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니 무여스님은 보문스님의 손자가 된다.
방한암스님의 상좌였던 보문스님은 학승인 탄허스님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가 낳은 빼어난 선승으로서 무여스님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겨 주신 분이다. “청풍납자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분이지요.” 선승들이 정신 위주로 살기 쉽지 보살행은 어려운데 그 분은 그렇지도 않았어. 잘 사신 분이요.” 무여스님은 이 곳 축서사에 머무르면서 그 분에 관한 일대기를 적어 보려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여 이백 자 원고지 일천이백장 정도의 초고를 마련했으나 선뜻 세상에 펴놓지는 못하고 있다. “그 분에 관한 일화는 많으나 알맹이가 없어요. 오도송이나 법문 따위를 보완하려고 해도 보완할 만한 근거가 없어요”
대덕 스님들에 관한 전기물은 거의 전무한 우리 형편이고 보면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어려운 만큼 더욱 뜻 있을 작업임에 틀림없다. 무여스님이 축서사에서 일곱 해 동안에 이룬 일은 이 일 말고도 선 수행에 관한 방법을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있다. 남에게 읽힐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자신에 대한 정리와 결산의 뜻에서 적은 것이다.
아마도 이 내용은 이 곳에서 이미 터 닦기로 불사를 시작한 선방이 완성되면 수행의 지침서로 먼저 쓰이게 될 듯하다. 걸망을 지고 이 곳을 찾곤 하는 스님들이 수행할 곳이 마땅찮아 발길을 돌리고 마는 것이 안돼 보여 선원을 하나 짓기로 한 것이다. 한번 입방하면 여섯 달이나 한 해쯤 정진을 하게 될, 비슷하다면 갑사의 무문관과 같은 일당 백의 양질의 선방을 마련하고 싶어하신다.
선객이 열쯤 머물 수 있는 큰 방과, 쉴 때에 필요한 독방을 선객 수만큼 갖추게 될 이 불사는 앞으로 두 해쯤 더 결릴 듯하다.
스님은 새벽 두시면 일어나서 세시에 예불을 드린 뒤에 바로 좌선에 든다. 아침 공양은 들지 않으며 , 일곱시쯤 되면 가벼운 체조로 몸을 풀고, 여덞 시쯤부터 볼 일을 보되 , 별일이 없으면 다시 “자리에 앉아”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지를 “느끼며”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낸다.
점심 공양이 끝나면 오후에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외출도 하지만 바깥 출입은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무엇에 아직도 붙들려 계십니까.”
“없을 ‘무’자 한 자이네”
“무”자는 고불로 일컬어지는 조주스님이 만든 화두이다. 지나던 납자가 강아지 한 마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도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부처가 말씀하셨거늘, 여타 미물에 비할 바가 아닌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답변 속에는 그러나 깊은 뜻이 있으니, 그것은 수 많은 수행 승들이 즐겨 드는 화두가 되었고, 무여스님 또한 행주좌와하고 어묵동정하는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붙들고 오심悟心에 오심을 키워 나가는 명제로 삼고 있다.
새벽녘에 법당을 끼고 도는 계곡 옆에 서니 , 벗은 나무 사이로 난 개울물은 마르고 얼어 물기가 없었으나, 한동안 서 있자니 땅 깊은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 소리뿐이랴, 그 위로 무여스님이 즐겨 외시는 게송 하나 겹쳐진다.
일상사가 다를 것이 없나니
내가 스스로 하나가 될 뿐
무엇이나 취하고 버림 없으매
어디서건 어긋남도 없도다.
비단을 누가 귀하다 이르던가
청산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 없는 것을.
신통묘용이 무어냐 하면
물을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
방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