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사면, 복권의 화합조치가 필요하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4년 02월 144호
임기의 시작을 돌아보며
1986년 8월 22일 당시 24대 총무원장인 녹원스님이 사의를 표명하였다. 녹원스님은 84년 8월1일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선출된 이후 만 이년 만에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였다.
녹원스님의사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25일 개최된 제86회 임시중앙총회는 제25대 총무원장을 뽑는 과정을 밟았다. 재적의원 육십아홉명 가운데에 육십칠 명이 참석한 종회에서의 투표 결과 사십여덟 표를 얻은 의현스님이 열입곱 표을 얻은 밀운 스님을 제치고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선출 뒤 교계의 기자들에게 밝힌 소감은 “안정과 화합의 기반을 다져 불교중흥에 헌신하겠으며 자신의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사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25대 총무원장 취임식은 9월 14일로 잡혀 교계 내외의 유명 단체와 인사에게 초청의 뜻을 알렸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연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현대사를 흔든 100대 사건’의 하나로 기록된 9.7해인사 승려대회’때문이었다. 총무원장 취임식까지 연기하게 된 이 대회에 신임 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의현스님은 당시로서는 ‘과격’하다 싶을 만큼의 공식 발언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80년 ‘10.27법난’때 신군부에게 당한 고문을 폭로하였고 호국불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호국불교란 정권의 안정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내용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부정 또는 비판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많았다. 따라서 일반 언론에서도 크게 가시화하였다.
연기된 취임식이 9월 28일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의현스님은 다시 한국불교 현실에 대해 겸허히 반성하고 전 사부대중이 화합 단결하여 불교 현실을 타개하자고 재차 강조하였다.
그렇게 출범한 의현스님의 총무원장 임기가 중임까지 맡으면서 올 8월로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다. 그 동안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더욱이 중임까지 치루어낸 그 기간은 한국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때였으므로 종단의 행정 책임자로서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누가 뭐라 하여도 이렇게 지난한 시기에 종단의 못된 전통인 임기의 도중 하차를 깨뜨리고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크나큰 공덕임에 틀림없다.
주마간산 식으로 대충 꼽아 보아도 그 동안의 공을 넉넉히 알 수 있다. 86아시안 게임, 88서울올림픽 그리고 작년의 대전엑스포에 이르는 일련의 국제행사 속에서 한국불교를 국제화하는 불사를 원만히 치루었고, 불교방송을 필두로 하는 포교의 현대화가 진척되었으며 불교의 사회화도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화도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현재의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보여준 ‘친정부성’은 한국불교를 아끼는 일반인마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호국불교의 개념을 새로이 한다던 ‘초발심’은 그저 구두선에 지나지 않았다. 종권이 안정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불교중흥의 토대가 된 ‘개혁’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화합을 매번 강조했지만 여전히 내외의 분규가 그치질 않아 왔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더 심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현 총무원장이 다가올 임기 만료 이전에 마무리지어야 할 많은 과제 가운데 화합에 관한 항목의 일단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사면 조치 단행하겠다
새로 종정에 취임하신 서암스님은 신년 법어를 통해 “우리 승려 불자들은 크게 반성해서 각성하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불타의 근본 사상으로 회귀에서 육화정신으로 교단을 바로 이끌어 나아가야겠습니다”고 말씀하였다. 용서와 화해, 협조를 당부하면서 화합원융의 불타 교훈을 새겨 교단을 바로 세우자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신년 법어에 담긴 내용이 좀더 가식적으로 나타나려면 화합원융의 구체적 조치인 사면, 복권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의 시점에서 화합, 화해, 갈등 해소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옴은 올해, 특히 올 상반기에 치루어질 총무원장 선출과 관련되어 연상되기 때문이다.
90년 6월 22일 26대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종회가 열렸다. 월탄스님과 경합을 벌인 의현스님이 재선출되어 종헌상 규정된 중임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20일 취임식에서 의현스님은 앞으로 임기 동안 교권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종헌 종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종정스님의 재가를 얻어 대사면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곧 화합의 구체적인 조치로 그 동안 체탈도첩 등 징계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대사면 조치를 하여 그들이 다시 종단의 공권을 행사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제25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총무원 청사 난입과 관련하여 법진스님 등 4명이 체탈도첩, 원욱스님 등 아홉 명이 제적되었다. 86년 12월 7일 초심호계위에서 이렇게 결정, 88년 9월에 확정되었다. 87년 이후부터 총무원장에 대한 송사가 본격화되면서 애초 취임의 변으로 강조했던 종단의 안정과 화합은 반목과 징계의 악순환으로 자리 바꿈하였다. 정대스님이 총무원장직무집행가처분 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한 반면 이 스님에게 체탈도첩의 중징계가 내려졌다.
88년 6월에는 강화 보문사의 종진스님이 주지 해임과 관련한 소송을 민사지법에 내었다가 기각되었고 이 스님 역시 88년 9월 초심호계 위에서 체탈도첩의 형이 떨어졌다. 이 때의 초심호계위는 88년의 봉은사 사태와 관련하여 밀운스님에게도 역시 체탈도첩을 내렸다. 90년 1월 19일 열린 재심호계 위에서는 종진스님은 채탈도첩이 결정되었으나 밀운, 초우스님에게는 5년 동안 공권정지를 명했다.
사태가 악화되었던 88년 6월 3일 종단중진회의는 종단 분규를 우려하는 성명을 채택하였고”임기만은 지켜지는 풍토가 조성”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중임의 취임식에서 사면 운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정스님의 재가가 없었는지 아니면 아예 재가를 올리지 않았는지 어떤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대사면의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 뒤 91년 분규가 극에 달해지면서 7월에는 종단 집행부의 주관으로 해인사 승려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9월에는 집행부에 반기를 든 측에서 통도사 승려대회를 열었다. 이 와중에 월정사의 도명스님, 주지 해임 사건이 생기고 종회의장 정대스님이 사퇴하였다.
징계는 계속 꼬리를 물었고 징계 당한 당사자는 어떻게든 징계를 내리는 쪽의 부당성을 입증하려고 기를 썼다. 능혜스님이 그렇게 됐고, 92년 10월 27일 초심호계위에서 신흥사 혜법스님에게 체탈도첩이 내려졌다.
결국 사면의 대상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셈이 되었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화합은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화합의 양측이 최선의 합일점을 찾아 적절히 양보하면서 현실적인 실리를 찾는 타협을 통해 묵은 감정을 씻어낼 수 있다. 또 상대방에게 일정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양보를 통해 화합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당사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재의 분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제반의 악순환 - 징계, 갈등, 대립 따위들 - 의 고리는 올 상반기 이전에 확실히 끊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뒤로 미루다가는 감정의 골은 깊어져 도저히 치유 불가능의 중증만 더할 것이다.
비록 지금 늦은 감도 없지는 않으나 늦었다 싶을 때 과감한 실천이 있어야 시간을 벌수가 있음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일반 정치권에서 특정한 시기에 맞춰 단행되는 사면, 복권에는 여러 가지 의도하는 바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어제에 매이기보다는 내일에 대한 화합을 기도하려 함이다. 사면, 복권조치가 남발해서도 안 되지만 꼭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조치가 단행될 경우 그 영향은 크다 할 수 있다. 특히,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맞아 내일에 대한 밝은 전망이 갈구되는 시점에서는 반드시 요청되는 조치가 바로 낡은 감정의 해소가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건대 차기 종단 집행부의 구성이 어찌 될런지는 아직 미지수이긴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개혁 과제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 일단으로 징계로 말미암아 사문의 권리가 박탈 당한 이들에게 폭 넓고 화기 넘치는 조치가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