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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실푸실 누 내리던 약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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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4년 02월 144호
지난 1월 26일 성관成冠 혜암慧庵대종사의 방장 추대식이 해인사 보경당에서 겨행되었다. 축하 손님으로 서암 종정예하를 비롯하여 사부대중이 운집해서 가야산은 잠시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편집실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어 이 번호에도 원고를 싣지 않으려니 지레 짐작하고 대장경연구소에 들렀더니, 편집장 스님의 눈이 근심과 원망으로 평소보다 두 배로 더 커 보였다.
나는 영락없이 잡혀 버린 꼴이 되었다. 내일까지 원고를 꼭 써놓고 미얀마를 가든 미국을 가든 알아서 하라는 엄명이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부랴부랴 원고를 쓰려고 약수암으로 갔다.
아침부터 한바탕 눈이 내릴 것 같던 하늘에서 때 맞추어 잡목 숲에 푸실푸실 눈이 내렸다. 가야산의 눈은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좀체 그치지 않아 마치 엷은 안개가 낀 것 같다. 조심스럽게 약수암으로 향했다. 오후의 약수암은 조용하였다. 작년부터 새로 고쳐 짓기 시작한 죽림선원은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결제철인데도 대중스님을 받지 않아 한결 고요했다.
조심스레 마당에 들어서자 마침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비구니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별 생각없이 “이 약수암을 왜 약수암이라고 하지요”하고 불쑥 멋없는 질문을 하였다.
“저기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이지요”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수각이 있어 가까이 가서 보니 돌확에 흘러내리는 물이 참으로 맑다. 약수라기에 몸에 좋을까 싶어 바라지로 떠서 마셔 보았다. 약수여서인지 씁쓰레한 맛이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 물로 많은 사람들이 속병을 고쳤기 때문에 인근의 많은 사람들에게 일찍부터 알려진 유명한 물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낙동강 오염으로 얼마나 한동안 신문과 방송이 시끄러웠는가. 웬만한 약수터마다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인파가 생각나서 “스님, 여기에도 물 가지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지요. 대구에서나 가까운 곳에서요”하고 묻자, 스님은 비구니 처소이고 선원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로 물 뜨러 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산중에 살면서 받는 혜택 가운데 좋은 물과 좋은 공기만큼 큰 혜택이 있으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큰 절에는 장경각의 장군수가 유명하다. 노스님들은 꼭 그 물을 떠다 차를 끓이고 그냥 먹기도 한다. 큰절의 장군수와 이 약수물 중 어느 물이 더 좋냐고 물었더니 아마 약수암 물이 더 좋지 않겠냐고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약수암은 지금으로부터 구십 년 전 구한 말 1904년에 성주性柱스님이 창건하였다. 1927년 도삼스님이 중건하였고, 정화 뒤에는 장일스님께서 비구니 수도처로 그 면모를 갖추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자 근처에 화엄의 종장 해봉海峯 유기有機(1707~1785)대사와 중창주 도삼스님의 부도가 있다. 대중스님네가 몇 분이냐고 묻자 상주대중이 이십여 명 되고 결제 대중을 합치면 늘 육십여 명이 수행한다고 일러주었다. 성주스님 권속들이 사냐고 물으니 자신은 장일스님 상좌라고 하였다. 이웃 국일암과는 자매처럼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침 방학이 되어서 강원에 갔던 상좌들이 돌아와 있노라고 하면서 방에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사양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없지만 칠십 년대만 해도 재미로 큰절 학인이나 선방 하판 스님들이 가까운 비구니 암자에서 재를 지내려고 해 놓은 음식을 훔쳐 뒷솔밭에서 먹고는 음식을 담았던 그릇만을 두고 가는 일이 있어 산중에 심심찮은 화재가 만발하곤 했다. 이제는 이런 낭만(?)은 없어졌다. 특히 약수암이나 국일암은 학인들의 단골처로 그 무용담이 지대방에서 자주 화재가 되어 웃음 바다가 되곤 하였는데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 때만 해도 먹을 것이 귀했고 교통 수단도 없어서 암자의 음식이 없어지면 으레 큰절 젊은 스님네들의 소행이거니, 서로 묵계로 이해되던 때였다.
특히 비구니 암자에서 공양청이 들어오면 그날은 산중의 축제였다. 두부로 속을 채운 만두와 칼국수, 떡국 들이 고작이었지만 그 정갈하고 정성스런 음식 맛을 어디 시중의 일류식당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비구니가 사는 도량은 어디나 그렇듯 약수암도 정갈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묵는 숙사는 선입견 탓인지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약수암의 맨 뒤쪽 건물이 산신각이나 칠성각 같아 보여서 저기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냐고 물었더니 본디는 칠성각이었지만 가야산의 호랑이인 성철 큰스님께서 방장으로 계신 뒤부터 약수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약수암도 대나무 숲이 일품이다. 그래서 선원 이름이 죽림선원인지는 모르겠으나 눈오는 오늘 같은 날 대숲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한가롭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아니고 조금씩 내리는 눈이기에 더욱 한가롭게 보였다.
나오는 길에 약수암 텃밭을 돌아보면서 여기에 암자 하나쯤 지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내려오는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머리에 싸락눈이 내려앉는다.
약수암에 부도가 있는 해봉스님의 시를 한편 적어본다. 조선시대의 승가 생활의 모습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 있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시이다.

한해가 다 가고 조금 남았으니
인정은 황망히 움직이고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니
서로 보내고 맞는 분주함이여

책걸망을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
남으로 북으로 헤매었나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닌
저 길고도 짧은 여정들이여

두 때를 죽과 밥으로
몸을 지탱하고
새벽마다 향과 등을 밝혀
나라가 융성하기를 기원했네

바루와 지팡이는 인연을 따라
어느 곳에 집착됨이 없었거니
경을 강의하고 논을 설하며
살아온 나의 일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