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의 탈출과 귀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별기고 - 이정
1994년 02월 144호
요즘 호치민시(옛 사이공)의 탄손나트 공항에 가면 미국 정부가 발행한 누런 여행 허가서를 들고 입국 사열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여행객들이 자국의 여권을 손에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며, 탄손나트 공항이 아니면 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베트남 사람들보다 세련된 모습을 지닌 이들은 매우 큰 짐 보따리를 양팔에 들고서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지루한 줄서기를 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베트남 공산화 뒤에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베트남을 탈출한 이른바 보트피플이다. 해상 탈출 뒤 그리던 가족과 친지의 품을 찾아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한다는 기쁨을 아직 아물지 않은 과거의 상흔 속에 숨기고서 초조해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탈출 할 수 있었고, 지금 이들 고향 방문객을 바라보는 베트남 정부의 시각은 어떤 것인가. 그저 자유를 찾아 필사의 탈출을 한 것인가. 베트남 정부는 단순히 개방정책에 편승한 인도주의적 입장만으로 이들의 고향 방문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이들의 탈출 과정에는 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범이나 적과 협력한 자들을 거의 죽이지 못했습니다. 우리 베트남 불교계는 불살생을 주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정부의 살상 행위 기도에 강력히 대항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 정신에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은 무려 일백만 명에 이르는 대량 살상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우리 불교계는 정부와 타협을 이루었고. 반동분자들을 비롯하여 새 체제하에서 불안에 떨던 소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국외 탈출이 허용되었습니다.”
하노이에서 만난 한 스님이 필자에게 들려 준 이야기이다. 그는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베트남 불교계의 고위 인사이며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다. 그 때 통일에 공헌이 컸던 남북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살상 반대의 목소리를 높혔고, 이에 따라 이른바 공민부적격자들의 선박을 이용한 국외 탈주가 줄을 이었다.
정부는 불교계의 주장을 암암리에 수용하여 탈주자들에게서 오십 달러에서 이만 달러를 받고서 탈주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돈을 벌었고, 불교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신자들의 신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따라서 보트피플은 베트남 비극의 산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교 자비 정신의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특히 공산 통일 뒤 불교계는 공민부적격자들의 사상 전환 교육도 맡아 했다고 전한다. 베트남 지방 어느 곳에나 마치 마을 공화당처럼 있는 사찰에서 공민부적격자들은 일정 기간 동안 밤마다 교육을 받았다. 물론 강사는 그 절의 승려가 담당했다. 그러므로 이 교육은 공산당식의 사상 주입 교육보다는 부드럽게 진행된 듯하며, 불교적 신심의 고양에도 크게 기여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들은 베트남 불교계의 파워가 얼마나 큰지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호치민시에 있는 국립불교대학 학장이며 베트남 불교승가중앙위원회 부회장인 틱민차우 스님(77)은”불교와 사회주의는 서로 차이점도 많지만 유사점도 많다”고 말함으로써 불교와 공산주의의 동질성 차원에서 베트남 불교계의 파워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불교계의 파워를 공산 정부가 존중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남쪽 전통대로라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보유한 불교계이므로,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통일 전 고딘디엠이나 티우의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저항하고 쓰러뜨린 저력이 변함없는 민중의 신뢰를 유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칠천만 인구의 팔십 퍼센트가 불교인이며, 이들은 비교적 단련되고 단결된 불교인들로 변모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십구 년. 그러나 호치민시 거리에는 아직도 전쟁 기념물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레반탐 공원에는 열두 살된 아이가 폭탄을 들고 미군의 장갑차에 뛰어들어 폭파시킨 동상이 있고, 구엔초이가에는 미국대사관을 점령했던 인민해방전선 - 전쟁 당시는 남쪽 사람들은 인민해방전선을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베트콩이란 말로 불렸다 - 소속의 어는 장군 동상이 위세당당하게 서 있다.
전쟁박물관이나 기념품 가게에서는 전쟁 당시의 미군 소지품들을 팔고 있다. 지퍼라이터의 한 면에는 “베트남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나는 거기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베트남에 대한 증오와 회한의 시퍼런 눈길이 아직도 잠들지 않은 듯한 미군의 흘러간 고백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승전의 잔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으며, 미국과 월남의 쓰라린 과거가 남아 있는 땅에 보트피플이 하나 둘 고향을 찾고 있다. 미국 등지에서 자리 잡은 보트피플들이 망향의 설움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86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도이모이(쇄신)라는, 베트남의 개방 정책이 표방하는 인도주의 차원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매우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미국 쪽의 통계에 따르면, 92년 한해 동안 이만여 명의 미국계 베트남 공산화 직후부터 시작된 필사의 탈출 행렬이 이젠 본국으로의 귀환 행렬로 바뀔 것이지를 시험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 귀환자들이 풍기는’썩은 자본주의의 냄새’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베트남의 사회주의는 견고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트피플의 귀환에 베트남 정부가 장치한 장애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베트남 정부는 공산주의를 버리거나 배반하고 떠난 이들 ‘반동분자들’을 오히려 포용하려 애쓰는 있는 형편이다.
그것은 인도주의라는 대외적인 이유보다는 베트남의 개방 정책 이후 이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선물과 돈이 베트남 경제에 긴요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사람당 일만 달러씩만 들고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베트남 경제 형편으로서는 어마어마한 야의 외화 벌이가 되는 셈이다.
아무런 밑천을 들이지 않고 단지’그리운 혈육과 고향’이란 단일 상품으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음은 엄청난 경제적 이득이다. 결국 경제를 살리려고’썩은 자본주의의 냄새’가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인 듯하다.
베트남의 개방 정책이 사회주의 이념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베트남 정부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불교의 자비정신과 서양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외면하고 교묘히 만난 현장들이 이처럼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역시 정부는 그들이 탈출할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방관함으로써 이득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강가에서 방류된 회귀성 어류가 먼 바다에서 성어가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그 이득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것은 옛날과 다른 현상이다. 더욱이 그 교묘한 만남의 현장은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더욱 큰 폭으로 더욱 심도 있게 넓이와 깊이를 더해 갈 것이 짐작된다.
그러나 과거의 탈출에는 불교계가 앞장 서서 주장하고 관여했으니, 지금은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정부의 꿩 먹고 알 먹는 현상을 지켜볼 뿐이다.
어려울 때 도와 주었으면 됐지 돈 몇 푼 있다고 나눠 먹자 대들지 않겠다는 대인적 풍모를 견지하고 있다. 한때 갖은 고난과 기아에 허덕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보트피플을 영해 밖으로 추방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처님의 자비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