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력으로 살다가 가신 청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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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4년 02월 144호
우리 행원정사에도 법당이 있다. 절이면 당연히 법당이 있어야 하지만 해원정사는 아무래도 절이라기보다는 도심 속의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도 스님들이 사는 곳에 법당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싶어 마루방에 작은 법당을 꾸몄다.
작년 여름에 종태스님의 소개로 안동 유하사의 불상을 모시고 왔다. 유리로 불장을 만들고 조촐한 불단 위에 모셨더니 법당으로서의 품격이 제법 갖추어졌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자연 행동 거지가 조심스러워진다. 방안을 들고 날 때는 마루방을 지나야 하는데 그 마루방을 법당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방에 들고 나는 것을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부처님께 절부터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방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부처님 얼굴과 마주치니 자연 그렇게 된다. 그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비로소 안 일이지만 부처님은 될 수 있으면 가까운 곳에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등상불이지만 부처님을 좀더 가까운 곳에 모시면 더욱 친근감이 생긴다. 부처님이 멀리 있으면 마음도 멀어져서 아무래도 친근감이 덜하다.
부처님은 외경스럽기만 한 분은 아니다. 매우 자상하고 너그러운 분이다. 경전에 보면 육안을 잃어버리고 대신 천안을 얻은 아나률 존자가 바늘귀를 못 끼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자 부처님이 말없이 바늘귀를 끼워 주었다고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말세의 사람들은 근기도 약하고 신심도 예 사람만 못하니, 우리들에게는 더욱 자상하고 너그러우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 행원정사 대중들은 이 시대의 불교를 어떻게든지 책임지겠다고 나선 원력보살들이니, 부처님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아직까지는 건강한 편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게으르고 잘못을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더 가까이 모시고 나날이 새로운 마음으로 신심을 가다듬어 수행자로서 또는 원력보살로서 자신을 점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 커다란 원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행자는 언제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 살아가더라도 언제나 자신의 지대한 원력이 퇴색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큰스님들은 출가자는 먼저 원력을 크게 세우라고 하셨고, 경에도 보살은 자신의 대원력을 실천하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옛날 스님들은 아무래도 요즘 스님들보다는 수행자로서 자시 자신에게 엄격했다. 얼마 전에 열반하신 성철스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것이 수행자로서의 삶을 철저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인욕보살에다가 원력이 출중한 분으로 알려졌다.
청담스님은 언제나 수행자는 살이 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밥을 적게 먹으라고 하였다. 밥을 많이 먹으면 자연 게을러지고 잠을 많이 자게 되고 그러면 살이 많이 찐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배불리 밥을 먹고 낮잠이나 즐긴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스님이 얼굴에 살이 피둥피둥 찌고 기름이 흘러서는 공부하는 스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큰스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유감스럽게도 차츰 살찐 스님들이 많아짐을 볼 수 있다. 특히 살찌는 것을 경계하신 청담스님 문하에도 살찐 사람이 많은 것은 웬일일까? 물론 살찌는 것이 무조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체질이 비대한 사람도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배가 나왔다. 요즈음에는 차츰 체중이 늘어나서 매우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원력을 세운 바도 없이 얼굴에 개기름이 낀 채로 낮잠이나 즐기고 수행에 게으름이나 피우는 짓은 절대 경계해야 한다.
스님들은 대개가 행자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행자 시절이 가장 힘이 든 반면에 그 때가 수행자로서 가장 진지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때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도선사 석불전에서 백팔참회를 했다. 지금도 가끔 백팔참회를 하지만 날마다는 못하고 있다.
행원정사에서는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고 절을 하는 것은 분위기상 어렵다. 그래서 절을 못하고 있다. 아니 벌써 오래 전 행원정사에 오기 전부터 백팔참회를 잊어버리고 있었다고는 해야겠다.
지금은 형편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도선사에 큰 스님이 살아계실 때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석 예불 뒤에 백팔참회 하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 되었다. 큰스님이 용납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그렇게 신심이 있었다.
큰스님은 늘 예불이 끝나면 오 분쯤 대중들에게 소참법문을 하시곤 했는데, 그 때 도선사를 떠나 다른 절에 가서 살더라도 반드시 백팔참회만은 잊지 말고 하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당신은 옛날 산길 백 리를 걸어도 절에 도착하면 먼저 법당에 들어가 절부터 했고 아침에 일어나 반드시 백팔참회를 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먼 길을 걸어도 피로가 쉽게 풀리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한번은 새벽에 일어나기가 싫어서 -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출가사문으로서 가장 힘든 것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다 - 꼬병을 부리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예불이 끝나고 큰 스님이 행자실로 들어왔다. 그 무렵은 전깃불도 없던 시절이라 어두운 방을 더듬어 촛불을 켜고 내 배를 만지면서 “배가 아프다고? 신심이 없어서 배가 아픈 것이다. 일어나 부처님께 절을 하면 금방 낫는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석불전에 올라가 혼자서 백팔참회를 했다.
도산사를 큰스님은 참회도량이라고 이름지었다. 원력성취를 하려면 먼저 부처님께 참회하여 업장을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 큰스님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절을 하라고 했다. 병이 있는 사람도, 세상 살아가는 데 어렵고 근심이 있는 이도 찾아오면 무조건 절을 하라고 했다. 모든 것이 속세의 업장 때문이니 절을 해서 업장을 녹이라는 것이다.
큰스님 법문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현대 한국불교가 또 다시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의 현실화 운동이다. 사람들이 한가로울 때, 신심이 두터울 때에는 사찰이 산중에 있어도 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이 분주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믿음이란 것을 갖기 어려운 시대에는 신도들과 승려들이 대화와 이에 소통으로 그 약한 부분을 메꾸어야 한다.
이밖에도 큰스님은 지금 우리들이 고민하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해오셨다. 어떻게 불교가 대중들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서부터 냉전시대의 남북문제에까지 관심을 보였다. 세계는 지금도 양대진영의 대립이 여전히 심각하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합되고 있다. 인도지나에서는 여전히 화염히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특혜를 받아 산업건설의 국가적 사명을 수행할 외자 기업체들은 대다수가 불치의 암을 안고 있다. 음성 부정 축재로 억대의 고급 주택 영유가 공공연하게 경쟁되고 절대 다수의 동포들이 빈한과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 큰스님의 사자후는 불교가 시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역사의 사멸을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한쪽에서는 큰스님을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 또한 그 사람들의 말을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정화운동의 방법에서 오류를 범함으로써 결국 정화자체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지적이 있다. 백 번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역사란 늘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법이다. 이 말은 당시 승려로서 불교사 앞에 행동하는 승려가 청담스님이었으며, 결국 한국불교는 청담스님에 의해서 움직여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된다.
청담스님은 어찌되었던 행동하는 스님이며, 원력이 있는 스님이셨다. 만일 10.27법난 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스님이 떠나고 없는 도선사가 옛날 같지 않으며 또 10.27법난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찰이었다는 것도 말해 두고 싶다. 아니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말해 두고 싶다. 지금 청담스님 문도 가운데에 누가 청담스님의 가풍을 계승하고 있는가. 큰스님은 평소에 “나는 다음 생에도 다시 한국 땅에 태어나 못 다한 정화운동을 하겠다.”고 말씀하였다. “성불을 늦추더라도 한국불교를 정화하겠다”는 원력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