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촬영 세트 장소
선암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강수연이 주연한 영화’아제 아제 바라 아제’이다. 고풍스런 절집 모습하며 처마 끝에 달려 바람에 한가로이 흔들리며 소리내는 풍탁... 신식 절만 보아 온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만다. 선암사가 이처럼 영상 매체를 다루는 사람들과 일반인에게 인기가 있는 까닭은 사찰의 깊은 속사정에 있다. 그것은 이 절집이 우리나라 태고종 총 본산으로서 불교 의식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오고 그에 따라 절집 모습도 옛스런 정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계산 산록의 인근 사찰인 송광사의 번성에 견주어 쇠락한 것은, 조계종과의 사찰 분규 여파로 선암사 재산 관리인이 승주 군수가 되어 건물의 신축 같은 일을 의욕적으로 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이유가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선암사로 만드는 데 얼마쯤 기여한 것도 같아 아이러니하다.
그 동안 선암사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는 별로 없었다. 탱화와 건축에 대해서만 단편적인 자료를 소개했을 뿐이나 다행히 1992년 ‘남도불교문화연구소’에서「선암사」라는 보고서를 펴내 선암사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아! 조계산
절집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선암사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좀 고루하더라도 천년 고찰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는 일은 답사 가서 사진 찍고 물 뜨고 노는 일 이상의 교훈이 스며 있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승주군 승주읍 죽학리 조계산 동쪽에 자리한 사찰이다. 조계산은 호남의 명산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명산과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중 여기저기 여러 갈래의 깊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자연스런 절경을 이루어 일찍부터 명승지로 손꼽힌다.
이 가운데 특히 조계산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에 천 년 고찰인 선암사가, 조계산 서쪽 산 능성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섬진강 줄기와 합쳐지는 곳에 송광사가 자리한다.
또한 선암사가 있는 산을 조계산이라 하고, 송광사가 자리한 산을 송광산(일명 조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미 1926년 육당 최남선이 심춘 순례 때 이 곳을 들러 기문을 남겼고 1989년 최완수 선생께서도 명찰 순례를 하면서 또한 기행문을 적은 것이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선암사의 발자취
선암사를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에 관해 우리는 믿을 만한 문헌 기록을 갖지 못한 형편이다. 단지 선암사의 창건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조계산 선암사 사적」(조선사찰자료 상, 1704년),「조계산 선암사중수비」(조선금속총람 하, 1707), 「순천부 조계산선암사제육창건기」(대웅전내 현판,1828년),「조계산선암사중수비」(경내 무우전 뒤의 비, 1921년),「승평속지」2사찰조 등이 남아 전한다. 위의 기록들을 작성 연대와 내용에 따라 둘로 나누어진다. 작성 연대로 살펴보면 십팔 세기 초기와 연대가 뒤진 십구세기이고, 내용에 따르면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아도화상이 법흥왕 때 청량산 해천사로 창건했다가 도선이 선암사로 개명 중창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선암사는 십팔세기 초기의 기록에는 도선이 창건했다고 하고, 이보다 연대가 뒤떨어지는 십구 세기, 이십 세기에도 아도가 창건했다고 그 연원을 높게 잡아 적고 있다. 이처럼 선암사의 창건주는 도선설과 아도설 두 가지 기록과 아도가 비로암으로 터를 다졌다가 나중에 중창하였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일까? 먼저 법흥왕 때 아도 창건설을 살펴보자. 아도가 활약한 시기는 신라 법흥왕 때로 불법이 전래되어 공인된 무렵이므로 신라 불교로서는 대단한 시기이다. 그러나 아도화상이 신라의 적대국인 이웃나라 백제 지역의 선암사에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어 그대로 믿고 따를 수가 없다. 또한 사료의 근거가 되는 철우옹의 「운림필기」는 그 신뢰성에서 많은 의문을 주는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조계산 선암사 사적은 아쉬운 대로 선암사의 연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선암사는 도선의 비보도량으로 창건된 사찰이었다. 도선이 비보도량으로 호남에 세 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삼암은 영암군 월출산의 용암사와 광양현 백계산의 운암사 그리고 승평부 조계산의 선암사로 기록하여 이후 모든 글에는 호남의 삼암으로 이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영암군 월출산의 용암사는 진주 영봉산 용암사의 잘못으로 이미 최완수 선생께서 동문서을 근거로 고증한 바 있다.
또한 도선은 사찰을 창건할 때에 산천배역을 진압하기 위해 탑을 건립하고 부도를 세웠고 역시 선암사를 창건할 때에도 철불 1, 보탑 2, 부도 3을 건립했다.
이 가운데 현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두기의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선암사의 도선 창건설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처럼 문헌 기록과 석탑의 조성 시기를 연결시켜 보면 선암사는 도선이 통일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해도 큰 억측은 아닌 듯 싶다.
대각국사 의천의 주석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사찰의 존재나 승려들의 활동을 알려 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다만 선암사의 존재 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이 전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 이들은 십 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선조암지 부도, 십 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무우전 부도, 대각암 부도가 그것인데, 세기의 부도를 통해서 고려 초기 선암사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선암사는 고려 중기에 의천이 잠시 주석하면서 절집이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인데 출가하여 화엄종 승려가 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두루 내, 외전을 섭렵한 뒤 송에 유학하여 화엄종, 법상종, 선종, 천태종, 승려들과 교류하여 폭넓은 불교 사상을 익힌 뒤 귀국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불전을 간행하였다. 의천은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천태종 개창을 염원하였는데, 당시의 정치적 실세로 왕군을 능가했던 인주 이씨와 연결된 법상종 세력에 밀려 지방에 은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는 1094년 여름 5월 화엄종 사찰인 흥원사 주지직에서 물러나 합천 해인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의천은 1094년 5월부터 숙종이 인주 이씨 세력을 꺽고 즉위하던 1095년 10월까지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쪽 지방을 순유하면서 산천에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지리산 화엄사에 들러서 시를 짓기도 하고(유제 지리산 화엄사)연기 조사의 진영에 참배하기도 하였으며(화엄사례연기조사영), 서석산(무등산) 규봉암에 가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의천이 전남 지방을 순유하던 중 조계산을 들러 선암사의 영경을 찬탄하면서 주석하여 불우를 경영했다고 한다. 그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했는데,「조계산 선암사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예종 원년 정묘 1147)에 따르면 당시 선암사는 법당 13, 전각 12요, 방 26, 산암 19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는 어려우나 다만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얼마 동안 머물렀으며 그 시기에 칠구선원을 세우는 등 선암사를 크게 중창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에 쓰여진 여러 대각암의 기록에 대각암을 대각국사 의천의 주석지소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각암에 있는 10세기 후반에 대각암 부도를 의천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재 선암사 응향각 안에 보관중인 대각국사의 금란가사는 중형인 선종이 의천을 위해 하사한 것인데 이 가사가 시중에 전해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가을이면 선암사에서 대각국사 탄신 기념행사(음 9월 28일)를 갖는 것은 선암사와 대각국사와의 깊은 인연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 충분하다.
고려 중기의 선암사의 모습으로는「신증동국여지승람」40 순천도호부 불우조에 보인 김극기의 시인데 여기에 나타난 선암사는 적막한 산골 속의 엄숙한 예배사찰로 비춰지고 있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한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되다시피한다. 조계산 송광사에서 보조 지눌을 중심으로 한 수선사의 정혜결사가 조직되어 기존의 타락한 세속적인 불교계를 비관, 반성하면서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새로운 개혁 불교를 제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격동의 시기에 선암사가 어떻게 존재했으며 불교 신앙 결사 운동에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지에 대해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나 관련 기록이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일주문과 삼층 석탑의 중수
조선시대는 주자학을 정치 이념으로 채택한 이씨 왕조가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사찰이 피폐해지고 승려는 천대를 받는다. 사원전은 국가에 몰수되어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으며 불교계는 통폐합되고 결국 선, 교 양종으로 정리되어 마침내 산문 불교, 부녀자 중심의 기복적 성격의 불교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선암사는 어떠하였을까? 조선 전기의 사찰들은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자신들의 기록은 거의 남기지 못하고 있는데, 선암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중종 35년(가정19년 1540)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조선 전기의 유일한 기록이다. 또 조선시대에 선암사 승려들은 동삼층석탑 안에 새로이 분청사리함, 청자호, 금동제팔각당형 사리기를 넣어 석탑을 보수하는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특별한 불교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정유재란으로 인한 소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전남지역 사찰들은 왜군의 침입으로 거의 불에 타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선암사도 정유재란 때 불에 타지 않은 것은 1철불, 2보탑, 3부도와 문수전, 뒷간, 조계문만 우뚝 서 있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불타 버린 불전, 당우를 오랫동안 복구, 중수하지 못하였다가 인조 22년(1644) 5월 단원선사가 대각암과 비로암을 중수하였다.
현종 원년 경자(1660)에 경잠, 경준, 문정 세 대사가 동지 열 명과 함께 사찰 중수에 착수하였다. 미륵전 옛터에 대법전을 세우는 등 팔 년 동안 복구, 중수사업으로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숙종 7년(1681) 봄에 언관, 영민, 두 장로가 동심 협력하여 대웅전 앞에 영성루를 그 해 가을 낙성시켰다. 이 때의 주지는 호암 약휴였다. (무용수연, 조계산 선암사 영성루기, 「한국불교전서」9•358) 숙종 17년 (1691) 신미년에 백암 성총이 선암사에서 화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앞서 백암 성총은 숙종 7년(1681) 임자도에 표착한 빈 배에서 「화엄경연의 초본」등을 얻어 숙종 15년(1689) 봄 낙안 징광사에서 목판을 새겨 숙종 21년 (1695) 전후 십오 년 동안 오천 판자를 분간하여 정광사, 쌍계사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숙종 18년 (1862)에 선암사에서 백암 성총의 주도로 화엄법회를 개설하여 사방에서 학인 납자들이 모여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이후 방광지지 곧, 화엄 교학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선암사는 교학이 융성하여 수많은 강백과 선덕을 배출하여 자못 교학의 연원이라 불리울 만하였다. 조선 후기의 불교는 교학의 연구와 잇따른 강회의 개최로 교학화의 경향을 띄게 되어 불전 간행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선암사에서도 불전 목판이 만들어지게 되어 많은 불서가 간행되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경각에 많은 경판들이 남아 있었으나 그 뒤 도난당하여 애석하다.
숙종 24년(1698)에 침광枕胱의 문인 호암대사 약휴가 당우를 수리하는 등 선암사 4차 중창과 승풍을 진작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약휴대사가 원통각을 세웠으며, 숙종 25년(1699)에 관음상 한 분을 조성하였다. 숙종 28년(1702)에 53전 단상을 조성했으며 29년(1703)에 대법당을 수리하고 오십전을 중건하였다. 33년(1707)에 12월에는 승선교를 축조했다. 이 석교는 초창 화주 호암당 약휴가 명경교식 가교의 공법으로 만들었다.
호암 약휴는 제4차 중창 사업의 마무리로 숙종 33년(1707) 채팽윤 찬撰, 이진휴 서書 「조계산 선암사 중수비」를 건립하였다. 호암당의 제4차 중수 이후 선암사의 규모는 법당 8위, 전사殿舍 12, 중료中寮 16, 산암 13, 속암으로 용안산 선적암, 운동산 도선암 등이었다. 이 당시의 주지는 단영 화상이었으며 승려는 350인 이었다. 호암당의 수년간 중수 사업에는 2국사, 3화상, 1침굉의 도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호암당은 문란해진 승풍을 바로 잡기 위해 도내 규정소를 설치하여 자신이 도승통에 취임하여 승풍을 진작하였다. 숙종 38년(1712) 계곡의 물이 불어나 석교에 피해가 있었다. 그 다음해인 숙종 39년(1713) 승선교를 중수하였다.
숙종 45년(1719) 3월 일주문을 복구하였다. 7월 8일에 상량을 하였는데 상량문은 설찬이 지었으며 주지는 가선대부 칠탁이었으며, 당시 대중은 389명이었다.
주지를 맡은 칠탁은 숙종 39년(1713) 승선교 중수시 감역을 맡았던 칠탁과 같은 승려로 보인다.
영조 11년(1735) 5월 벽천 화상이 대각암을 3창하였다. 그 다음해인 12년(1736)에 비로자나불(현재 응향각에 보관중)을 조성하였다. 또한 동왕 29년(1753) 석가모니 괘불을 조성하였다.
상월미봉이 영조 30년 3월 15일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개설하였는데, 천이백여 명이나 모여들어 법회의 융성암이 금고에 없었다고 한다.(유일,「연담대사임하록」3「한국불교전서」10-253)
영조 35년 기묘년(1759) 봄에 선암사는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상월미봉과 서악등한이 선암사 제5차 중창불사를 화재 다음해인 1760년 시작하였다. 상월, 서악은 대법당, 명부전, 오십전 등 사십여 처의 불의, 승요를 중수하였다. 제5차 중창불사시의 화사는 상원, 서악 등 32명과 동서 양위역군 도수 551명이었다.
상월미봉은 중창 불사를 하면서 한편으로 7칸 정문에서 화엄 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사방에서 몰려드는 처녀 법도를 훈화하여 청허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해주록) 또한 산강수약한 선암사의 지세형국으로 화재를 자주 만나 불전당우가 빈번하게 불에 타게 되자 상월미봉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어 불렀다. 정조 21년(1797) 봄에 해붕당 전익이 화주가 되어 칠전을 신건하여 그 다음해 1798년 여름에 완공하였다. 칠전은 선객이 함께 정업을 수행하기 위해 눌암식활이 십이절목을 정하였다.
순조 19년(1819)에 대선루(대각암내)를 중수하였다. 23년(1823) 3월 30일 화재로 대웅전, 명부전, 정문루, 향로전 등 불의 4등과 승당, 선당 등 승료 6동이 불에 타버렸다. 이에 24년(1824) 해붕, 눌암, 익종 삼대사가 제6차 불사를 시작하여 대웅정, 명부전, 정문루, 향로전 등 4등을 중건하였으며 25년(1825) 3월 10일에 승당, 신당을 중건하였다.
1910년 선암사의 장금봉, 김학솔과 백양사의 박한영, 화엄사의 진진응, 범어사의 한용운, 오성월 등 청년 승려들이 임제종을 표방하면서 이회광 일파의 연합에 대응하여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부터 설립되어 오던 선암사승선학교를 1913년에 개편하였는데 당시 선암사에는 보통학교 2, 전문강원 두 곳이 설치 운영되었다. 선암사에는 도내 4본산 가운데 교육기관의 수 및 유학생에 있어서는 으뜸이었다.
1921년 여규형 찬, 김돈희 서의’선암사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당시 주지는 서용봉이었고 대중은 140인 이었다. 1923년 대응찬호 선사가 그의 은사 운병 돈각의 유촉으로 이천여 원을 희사하여 원통전을 중수하였다. 또 운병선사는 7전선원에 선답으로 70두락을 기진하였으며 사찰내 축대 전체를 쌓도록 재정적 지원, 또 유기로 된 대불기 사십 개를 희사했다. 같은 해(1923) 대각암을 중수하였는데 사재 천삼백 원을 들여 대수선공사를 1개월간 계속하여 음력 2월 25일 낙성하였다.
이태호•황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