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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를 읽자-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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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해설 - 신규탁 1994년 02월 144호
Ⅰ
「벽암록碧岩錄」은 설두 중현(980~1052) 스님이 옛부터 내려오는 선사들의 언행 가운데에서 수행에 지침이 될만한 이야기를 백 가지(본칙) 뽑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노래를 지은 것(頌)이다. 우리는 이것을 「설두송고」라고 한다. 이「설두송고」를 교재로 해서 원오 극근(1063~1135) 스님이 납자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이것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벽암록」으로 지금에 전한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선림고경총서’의 「벽암록」(전3권)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청동활자로 인쇄된 원문도 부록으로 실려 있어 자료적인 가치가 한층 높다.
다른 어떤 선서보다도 「벽암록」은 읽기 어렵다. 그 까닭을 몇 가지로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벽암록」에 나오는 원오스님의 논평 곧 ‘하어下語’는 너무 짧아 갈피를 잡기 힘들다.
예를 들어 어느 비오는 날 찻집에서 젊은 여자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앞에 앉은 사내에게 “도둑놈”이라고 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여자가 무엇을 잃었다고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둑놈!”소리를 한밤중에 들었다면, 이는 분명 물건을 훔쳐 가는 사람에게 지르는 외침일 것이다.
「벽암록」에는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곳이 많다. 그래서 어렵다.

Ⅱ
두 번째 어려움은 「벽암록」에 종횡무진하게 나오는 구어口語 내지는 속어俗語이다. 선서에 구어가 많이 쓰였다는 이야기는 그 동안의 연재에서 누누히 강조했으므로 그치기로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구어로 쓰인 문헌을 문어의 안경을 통해 보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너무나도 두드러진 잘못을 하나만 지적하면, “不妨~”이라는 말이 구어에서는 “참으로”라는 부사어인데, 문어에서는 “~해도 무방하다”의 뜻이다. 선서에서의”不妨~”은 거의가 구어로 쓰인다. 나는 아직 선서에서 이 말이 문어의 뜻으로 쓰인 용례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선서를 제대로 읽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은 없을까? 그것은 현대 중국어도 익히고, 또 고전 중국어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못하는 필자로서는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우리의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여 가구를 만들고 집도 짓듯이, 문헌을 연구하는 데도 연장이 필요하다. 그 연장의 하나인 「세설신어사전世說新語詞典」(張萬起, 北京, 商矜印書館, 1993년 5월)을 소개한다. 「세설신어」는 위진시대 사조 연구뿐만 아니라 구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전과 함께 ‘아래아 한글 1.52’로 입력한 「세설신어」를 이용하면 효과적이다. 간단하게 참고할 분은 한글 워드프로세스의 ‘바꾸기’기능을 이용하고, 좀 더 입체적으로 이용할 분은 MS-DOS의 FIND 명령을 써서 검색할 수 있다.
Ⅲ
세번째의 어려움은 개성과 말투가 서로 다른 여러 스님들이 한책에 등장하는 점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는 바이지만 정신이 없다. 말 그대로 ‘진짜 보물’만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거기에 실린 문체는 저마다 가락이 다르다.
「벽암록」이 그렇다. 한칙한칙이 모두 묵직한 공안인데다가 한 사람의 말투와 그 내력에 좀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주인공이 바뀐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설두스님의 천재적이 언어 씀씀이이다. 설두스님은 그 다양한 선사들의 가풍과 말투를 또렷하게 드러내 준다. 물론 언어와 문장을 통해서 말이다. 설두스님은 언어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그것을 ‘송頌’이라는 문학 장으를 통해서 드러낸다. 주옥 같은 언어로 엮어진 문학만이 선의 경지를 드러낼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원오스님은 설두스님만 못하다. 설두스님은 긍정의 논리(遮詮)로 일관한다. 구태의연한 부정의 논법이 계속된다. 「벽암록」100CLR 가운데에 앞 부분은 그래로 신선하다. 뒤로 갈수록 이 두 스님이 선문의 근본 정신인 돈오무심頓悟無心을 천양하는 점에서는 같다.

Ⅳ
네 번째 어려움은 논리의 전환과 말의 생략이 심한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장과 무장 사이 이른바 ‘행간行間’이 벌어져 있다. 이’행간’은 책을 읽는 독자쪽에서 채워 가야 한다.
이 ‘행간’을 채워 가는 작업을 나는 ‘읽는다’라고 이름 붙인다. 선서는 ‘읽어야만 한다’고 늘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이번 연재의 전체 제목을 ‘선서를 읽자’로 정했다. 많은 책 가운데에서 선서만을 읽자는 책 선전 구호는 아니다.
이제 그 읽는 작업을 해 보자 「벽암록」29칙의 ‘평창 評唱’에 소개된 위산潙山 영우靈祐(771~853)스님과 대수大隋 법진法眞(생몰연대 미상)스님과의 대화를 보자
대수 법진 화상은 대안선사의 법을 이은 사람으로 동천 염정현 출신이다. 그는 육십 여 명의 선지식을 찾아 뵈었다. 전에 한번은 위산스님의 회상에서 불때는 일을 맡았다. 어느날 위산스님이 대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 밑에서 몇 년 살았지만, 나에게 전혀 묻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자 대수가 대답했다.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이렇게 되묻자 위산스님이 대답했다.
“만일 그대가 무엇을 물어야 좋은지 모르겠으면,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묻게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수스님은 손으로 위산스님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위산스님이 말했다.
“이후로 일제의 모든 관념을 싹 쓸어버린 수행자를 만날 수 있을까?(以後覓箇掃地人也無)”
밑줄 친 부분의 “~也無”는 문장의 끝에서 의문을 표시하는 구어이다. 이 것을 문어로 읽어 “~마저도 없다”고 부정문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문제의 관건은 “소지인掃地人”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다. 곧 “소지인”을 ‘땅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어 ‘시중 드는 제자’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처럼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일체의 생각을 싹 없애 버린 참 수행자’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Ⅴ
먼저 “소지인”의 뜻을 밝힐 필요가 있다. 한 단어의 뜻을 추정할 때는 무엇보다 같은 책에서 그 용례를 모아 공통된 뜻을 추려 내야 한다. 중국의 경학가들이 한나라 정현鄭玄(127~200)의 주註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다음에 동시대의 문헌, 그 다음에 같은 계통의 문헌에서 그 용례를 찾아 의미를 밝혀야 한다.
먼저 「벽암록종전소碧巖錄種電銷」를 대본으로 한 「벽암록색인」(경도, 선문화연구소. 1992년)을 이용해서 “소지인”의 용례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용례는 이 곳 한 군데뿐이다. 단 ‘掃地’라는 말은 몇 군데 나왔다. 제12칙의 송의 평창과 19칙의 본칙의 평창에 보면 “만약 그렇게 이해했다가는 달마를 스승으로 받드는 선종은 싹 쓸려 없어지고 만다. (若恁磨會, 達麽一宗掃地而盡)”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소지’는 ‘싹 쓸려서 없어지다’의 의미이다. “掃地而盡”은”掃土而盡”(제74칙 본칙의 평창)으로도 쓰인다. 한편, 52칙의 본칙의 평창에는 “하루는 조주스님이 땅을 쓰는데, 어떤 승려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선지식이신데 어찌 먼지가 있습니까? ‘(一日趙州掃地次, 僧問, 和尙是善知識爲什麽有廛)”라고 나온다. 여기에서의 ‘소지’는 말 그대로 땅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지’의 뜻은 ‘땅을 쓸다’이고, 이 의미가 확대되어 ‘청소하다’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싹 쓸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소지인’을 ‘청소해 주고 시중드는 제자’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관념을 싹 없앤 참 수행자’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의 근원이 되는 이야기를 찾아보자. 「조당집」권 19에 대수법진장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경덕전등록」과 「송고승전」에는 항목조차도 없다. 시대는 좀 떨어지지만 「오등회원」권4에는 「벽암록」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단 밑줄 친 부분이 “僞歎曰, 子眞得其髓”로 되어 있다. 즉 “대수 그대는 참으로 핵심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위산스님의 입을 막은 대수스님의 행동은 잘한 것임이 확인된 셈이다.
또 「벽암록」보다 뒤에 만들어진 「종용록」제30칙에도 「벽암록」제29칙과 같이 위산과 대수 두 스님의 대화가 인용되었다. 다만 밑줄 친 부분이 더 들어 있을 뿐이다.(爾以後有片瓦蓋頭, 覓箇掃地人也無)
여기서의 “片瓦蓋頭”란 “깨진 기와조각으로 머리를 가려(눈이나 비를 피한다)”라는 뜻으로 아주 가난함을 나타내는 성어이다. 위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면 “그대 대수는 앞으로 가나한 처지에 있으면서 모든 관념을 싹 버린 참 수행인을 찾을 수 있을까?”가 된다.

Ⅵ
한 단어의 뜻을 고증하는 것은 그 단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들추어내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러면 어떤 사상적인 배경 속에서 이 말이 쓰이는 지를 보자.
「전등록색인」(경도, 선문화연구소, 1992년)을 이용하여 “소지인”이 들어있는 문장을 찾아보았다. 「한글대장경 182-전등록」권 26, 監院守訥章, 428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스님이 법당에 들어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불법의)핵심을 말로 다 설명하면 모든 생각을 싹 쓸어낸 무심한 사람이 없어진다.(盡令提綱, 無人掃地) 이 사실은 선방의 모든 형제들이 증명하고 있다. 늦게 발심한 무리가 의심이 있거든 물어보라.”
이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필자 임의로 생략)
“무엇이 부처입니까?”
“도리어 누구에게 묻는가(更問阿誰)?”
위의 밑줄 친 부분은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말로써 이러쿵저러쿵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결국 모든 관념을 싹 버린 참 수행자가 없어지다는 엄한 경계이다. 위의 문장에서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수눌스님은 “(그 문제는 네가 스스로 알아야 할 일인데)도리어 누구에게 묻느냐?”고 야단을 친다. ‘갱更’이라는 강조 부사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런 뉘앙스를 살리려는 배려이다.
선사들의 이런 태도는 저 유명한 동산 양개스님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돌아가신 은사스님의 깨달음이나 그 분의 도덕을 귀중하게 여기기보다는, 나에게 이러니 저러니
설명해 주시지 않았던 점을 귀중하게 여긴다.”이상의 예문을 통해 볼 때 위에서 인용한 「벽암록」을 ‘행간’을 메워서 읽으면 이렇다.
“그대는(그대처럼) 모든 관념을 싹 쓸어 없앤 참 수행자를 앞으로 찾을 수 있을까?(아-아-그대는 참으로 훌륭하다.)”나는 “소지인”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 언어의 강렬함과 상황에 딱 들어맞는 언어의 치밀함에 놀란 것이다. 단계적인 수행의 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일체의 관념을 싹 쓸어 없앤 무심도인의 경지가 이 말로 멋지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스님의 이야기는 육조 스님을 스승으로 삼는 조계선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스스로 몸소 깨쳐야 한다는 주체 정신과 부처니 조사니 하는 일체의 관념을 싹 쓸어버린 무심사상을 모르고서는 제29칙의 공안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벽암록」전체도 그럴 것이다.
조계의 후손들은 단계적인 수행의 절차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품을 몸소 활짝 깨치고, 그 뒤에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영원한 자유인으로 무심히 살아간다. 마치 성철선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