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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가정의 해,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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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정수 1994년 02월 144호
Ⅰ
갑술년 새해는 세계 곳곳에서 “사회의 핵을 이루는 가장 작은 민주주의 공동체”인 가정을 복원하고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주요 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특별히 유엔이 정한 ‘세계 가정의 해 (International Year of Family IYF)’이기 때문이다.
94IYF는 ‘가족, 변화하는 세계 속의 인적 자원 그리고 그 책임’을 표어로 하여 가정 관련 정책의 수립, 집행, 감독을 위한 국가기관과 국제 기구를 보강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국제 및 비정부기구간 협력을 증진하며, 가정 관련 주요 현안과 여성 어린이 청소년 노인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협력을 늘리도록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실현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세미나를 개최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정의 문제는 파편화의 경향, 다시 말하면 가족 공동체의 느슨한 연대의식으로 가족 구성원의 가정 내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의 끈끈한 응집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변화를 요구하는 전반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정치 경제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양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곧 급격한 산업자본주의의 이행에 따른 전반적인 생활 약식의 급진적인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격변기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참으로 불안하기 그지 없다.
우리 사회 가족 변화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정통적 직계 가족 제도에서 현대적 부부 중심의 핵가족 제도로 이행하는 제도적 변화 과정이며, 한편으로는 집단주의적 가치와 성역할의 고정 관념에 근거한 가부장적 관계를 극복하고 평등한 관계를 이루어 가려는 민주적 가족 형성의 변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서양의 경우 이 과정은 4~5세기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인 이행 과정이었으나 우리 사회는 최근 이십 년 사이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혼란과 변화의 갈등을 겪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공산주의 해체 등 세계는 동서 냉전체제의 해체와 동구 사회주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와 대립과 경쟁을 통해 보완과 발전을 해온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그 본디의 목적인 경제적 이익에 충실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정을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유럽 공동체, 북미자유무역협정, 아태지역경제협력 등 지역 경제 블럭화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등으로 자본의 국제화와 개방을 더욱 촉진시키는 경제 발전을 위한 국가간의 경쟁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기의 극대화라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역사와 문화 사회 속에서 융화되고 제어되었던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사회 전면으로 부상하고 이에 따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문화적 기제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이기심은 물질숭배, 물질 만능의 인간관계로 삶의 변화를 가속화, 유인화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에 충실한 현대인은 모든 가치의 척도를 경제적 이익에 두게 되어서 합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인간 관계 속에서 하나의 기능적 역할로 전문화되고 좁은 인간 관계를 선호하고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좁은 인간 관계의 기본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인은 변화하는 유동적인 세계에서의 정착 욕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변화에 대한 적응이 적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돌아갈 안전한 장소로서의 가족공동체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런데도 현대의 가정은 가족 구성원간의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가족 형태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가정 내 가족간의 역할과 관계 변화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속의 불안정을 가정이 진정시켜 주기에는 가족 생활 자체가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은 자녀 양육과 소비와 사생활의 중심지로서 개인 생활에 막대한 비중을 갖는다. 이에 따라 핵가족화를 둘러싼 가족 구조와 가족 관계의 문제는 사회 변동의 주요 쟁점이 되어 왔다.
핵가족이란 두 세대, 곧 결혼할 남녀와 그들의 미혼 자녀만으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이다. 노부모와 기혼 자녀 가족의 동거 형태인 전통적인 가족 개념과는 그 구성 원리나 운영에서 매우 다르다. 핵가족적 이념은 부부 중심이며, 가계 계승과 부모 봉양을 지상의 명제로 삼는 직계 가족 이데올로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핵가족은 작은 규모 안에서 밀접한 상호작용이 중요하므로 규범이나 제도화된 관계를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가정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된다.
과거에 우리가 유지했던 가치나 규범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재조정해야 한다는 사회 곳곳의 요구가 더 높다. 늘어나는 이혼, 변화된 성도덕, 가족간의 이완 현상들로 가정이 인간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는 가치가 무너지기 직전으로 보인다. 현대 가정의 최대 현안이 여기에 있다. 이제 세계는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사회학자에 따르면 건강한 가정의 두드러진 특성으로 응집력, 적응력, 커뮤니케이션, 역할 구조 등 네 가지를 들고 있다. 맨슬패티슨은 전인성과 개방적 공동작용 그리고 동질성을 갖는 건강한 가족 체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전인성 - 전체는 단순한 부분들의 합보다 크다는 개념으로 가족은 부부와 자녀들이라는 부분으로 이루어졌지만 단순히 각각의 결합이 아니라 각 구성원들이 함께 연결되어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둘째, 개방적 공동작용 - 전체를 이루는 각 구성원들은 함께 작용하여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을 강화시킨다. 셋째, 동질성 - 가족 체계의 목적은 가족 구성원들이 공유한다. 성숙한 가족 체계에서는 가족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가치와 가족 체계의 가치가 균형을 이룬다. 곧 가정은 유기체로서 가족 구성원 각자가 살아 숨쉴 때라야만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Ⅱ
우리 나라 가장인 아버지들은 직장에 묻혀 가정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 두고 있다. 자녀 교육은 아내의 소관 사항, 교육조차도 소비주의와 집단주의의 산물로 운영되고 있다.
피아노, 그림, 글짓기 등의 예능 교육을 자녀의 총체적 발달 단계나 취미에 맞추기보다 소비사회의 흐름에 편성하여 기능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자연과의 만남도 입시와 연관될 때만 의미 있는 교육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가정은 지나치게 주부에 의존하며, 주부에게 기대하는 역할 또한 다양하다. 가정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기능, 자녀의 교육과 사회화 기능, 이웃과의 유대 기능, 여기에 경제적 보완의 기능까지, 주부에게 가중된 가족 내의 역할 기대는 가정을 받치는, 본래적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가정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동기를 부여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집안 일은 선택으로 행하는 구체적 보상이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삶의 필수적인 일이다. 집안 일의 유일한 보상은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살아가는 건강한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평등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건강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재능에 맞게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일 가운데서 보람과 기쁨을 찾는 것, 동시에 일상적 삶 속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이루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 역할의 고정 관념으로 인한 가사 노동의 주부 편중화는 가족 공동체에서 주부의 소외 또는 여타 가족 구성원의 소외 현상을 만들어 가족응집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요즈음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 자기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하는 따위의 요즈음 젊은 세대를 두고 하는 말의 대부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적 품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별히 경로 효친의 사상이 퇴락하여 빚어진 현상은 아닐 것이다. 부부 중심의 가족 개념이 일반화되면서 관습적으로 역할 분담의 합의로 이루어져 온 전통적 가족 관계와는 달리 가족 구성원간의 역할 모델이 없어져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식된 도리로서 따위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교육과 학습 그리고 체험없이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현대 도시 가족의 모습이다.
최근 30, 40대 우리 사회의 중간층에 해당하는 계층의 가장들이 가정에서 바른 아버지 역할 모델을 만들어 내고 건강한 가정을 꾸려 가기 위해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고, 삶의 현장에서 각 사람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그러면서 정직한 어른을 지향해 가정과 사회에서 좋은 아버지상을 보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가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려는 모임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와 자녀가 서로 노력하여 행복을 찾아가는 가족들로 구성된 ‘한울타리 가족모임’에서는 좋은 가정 만들기 실천사항으로 하루에 세 번씩 활기차게 웃기, 대화 시간을 갖기, 다른 식구의 일 한 가지씩 돕기 등 가족이 함께 추진해 갈 열두 개 계명을 실천하고 가족간의 응집력을 높여 가족 구성원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핵가족 사회는 밀접한 상호 작용으로 규범이나 제도화된 관계를 쉽게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한울타리 모임 등 함께 고민하고 공감대와 대안을 모색하는 모임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건강성 회복의 밝은 미래를 열어 줄 것이다.
유엔이 세계 가정의 해를 맞아 각국에 권고한 사업 가운데에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 강조, 남녀의 가사 분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캠페인 전개, 학교 교과서에 가족 구성원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권리가 포함되도록 개정할 것들은 필자가 앞서 밝힌 우리 사회 가정의 현주소와 맞물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정의 형태와 가정 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문제가 있어도 여전히 인간은 가정 안에서 성장하고 인격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가정은 한 인간의 정상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자양분의 역할을 성실히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다. 건강한 가정을 지켜 내는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동시대인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