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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수井華水에 정화수淨化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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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만우(시인) 1994년 02월 144호
소망을 기원하는 소박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정화수를 떠놓고 조상과 천지 신명께 치성을 드리는 것이다. 뒷뜰 한적한 곳에 단을 차려 놓고 이른 새벽 정성스럽게 떠온 물을 한 대접 올리고 가족의 안녕과 바라는 모든 일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어머님의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다른 진수는 차리지 않고 오직 한 그릇의 정성스럽고 깨끗한 물로 천지 신명을 감응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들은 오랜 삶의 지혜를 통해서 물이야말로 존재의 요소며 생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상태, 청정하고 걸림 없는 자유 세계의 상징으로서 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물을 매개로 천지와 교감을 이루어 삶을 보호받으려던 행위는 전통적인 몇 가지 의식에서 엿볼 수 있다. 지금도 우물가에서 용왕굿을 통해 액막음을 한다든지, 집에 샘을 팔 때 유명한 샘터에서 집까지 물을 뿌리면 물길이 연결된다는 생각들은 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는 소박한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물난리다. 홍수는 자연 재해가 아닌 인재에 의한 물난리다. 물이 왜 중요한가라는 물음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 그것은 생명이 왜 소중한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문 사항이 아니다. 부처님도 모든 존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구성되었다고 하였고, 그 무렵의 여러 사상가들도 물을 필수적인 존재의 구성 인자로 규정하였다. 물에서 모든 생명체가 시작되었다는 고대 철학자도 있다. 그래서 물의 오염은 단순한 물질의 오염이 아니고 생명의 오염이며 존재의 오염이다.
유해 물질을 방류해서 먹는 물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스스로 건강하고 축복 받는 삶을 포기한 양심의 방류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간접 살인이다. 물은 흘러간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체가 있다. 물이 병들면 모든 생명체도 병들 수밖에 없다. 이웃이 병들면 나도 위험하다. 이것은 간단한 상식의 문제이지 고도의 지식과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물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맑고 깨끗함보다는 오염되고 혼탁함으로 비춰지고 있다. 폐수가 더 많이 눈에 띄고 생활 공간, 특히 도시에서는 맑은 물은 보기가 힘들다. 청산녹수라는 말은 시구에서나 볼 수 있고, 맑은 실개천이라는 말은 사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시구가 되어 가고 있다. 물처럼 바람처럼 살라는 말은 덕담이 아니라 욕이 될지도 모른다. 폐수처럼 매연처럼 살라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을 병들게 하고 지구를 오염시키는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양심, 인간성, 가치관으로 표현되는 사고와 행동 양식의 오염에 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표어 가운데 가슴에 와 닿는 표어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슬그머니 버린 오물 슬그머니 버린 양심’이는 오염에 대한 우려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경구로서 매우 감각적인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절제할 수 모르는 무한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좀더 편리하고 좀더 많이 소유하려고 할수록 폐수와 매연이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참으로 잘 사는 것은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데 있지 않다.
경제 발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부여받은 목숨을 온전히 다른 생명체의 자양분으로 전이되는 자연 법칙과의 조화를 통해서만 이 두려움 없는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자각을 통하여 바른 안목과 지혜로써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미래를 밝고 깨끗하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저마다 각성하지 않으면 조금 남아 있는 자정 능력까지 소멸돼 버릴지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물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천에 옮긴다면 어머님 정화수 그릇에 예전처럼 향기로운 샘물이 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