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농장 선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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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4년 02월 144호
흰빛으로 희끔하게 내려앉은 겨울 하늘, 바람결에 그대로 몸을 실어 대지에 묻혀 버릴 듯한 겨울을 인내하는 물기 바랜 잡목들.
허수아비 하나 사람 그림자로 나서서 휘적일 성싶은 적요한 평야.
차창으로 스치는 교외의 겨울은 그대로 동면의 순간처럼 고요하다. 계절이 오고 감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겨울의 침묵이다. 완벽한 만개를 준비하는 침묵.
넘실대며 저 너머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들의 아득함은 안개가 한자락 깔린 듯한 신비로움을 안고 있다. 멀리서 보면 꼭 키만큼 나즈막하다 싶은 둔덕들이다.
마치 담장 두르듯 펼쳐 놓고 들어앉은 안온한 평화로움이 여주 평야에 햇살처럼 드리워 있다. 잘 지어 놓은 움막처럼 쌓아 올린 볏 짚단들의 운치 또한 준비와 결실 그리고 기다림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을 안쪽 기름하게 도드라진 동산 위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성글게 줄지어 있다. 마치 인사하듯 이리저리 끄덕이고 있는데, 그 모습은 저마다 자기 이름으로 점 찍어 놓은 이들이 괘 많지 싶게 여간 곰살맞은 게 아니다. 그렇게 흐르듯 여주의 평야를 가르며 가슴으로 들어서면 시리게 푸른 남한강 줄기가 시원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깊숙이 흐르는 수맥을 살며시 내보이며 작은 연못 황지를 토해 놓은 태백이 남한강의 발원지이다. 이내 굽이쳐 울울한 영월의 속살을 헤집고 정선의 한을 아리랑의 곡조로 껴안으며 충주댐으로 탄금대로 흘러든다. 한스러움이 무거워진 물줄기는 여주의 넓은 평야를 만나 비로소 몸을 푼다. 이것이 여주의 젖줄인 남한강이다. 여주의 비옥한 바람에 한숨 돌리며 본목장에 닿았다. 본목장은 선본스님의 법명 끝자를 딴 이름으로 마을 외곽에 있다. 스님이 웬일로 목장을 다 할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조심스레 들어선 우리의 발걸음은 느닷없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대었다. 우리의 돌연한 침입에 개 십여 마리가 일제히 경보사이렌을 울려 대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놀란 쪽은 우리라고 우기고 싶을 만큼 그들은 사력을 다해 짖어 댔다. 철장 안에 있는 거위 세 마리도 입을 딱딱거리며 억척스럽게 쪼아 대었고 칠면조는 꼬리를 폈다 접었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그 난리통에도 정작 주인은 보이지 않더니 한참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푸라기 일어난 벽돌색 모자에 얼룩진 회색빛 츄리닝을 걸치고 고무장화를 신은 한 촌부(?), 목우(?). 선본스님의 첫인상이었다. 며칠 깍지 않은 꺼칠한 수염자락에 탁주향이라도 묻어날 듯 걸걸한 웃음으로 반기는 스님의 모습은 더 이상의 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형상으로는 위용을 갖춘 스님네도, 돈을 셈하는 세인도 아니지만 눈빛 바른 한 사문임을 어름한 우리의 가슴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목장 입구에 있는 허름한 방을 내어 주며 스님은 추운데 쉬라는 말만 남기고 급히 나간다. 소들 밥 줄 시간이라고 한다. 스물 다섯 마리나 도는 젓소들은 멀리서 보면 착하고 순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덩치가 얼마나 큰지 무섬증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들의 여물을 준비하면서 스님은 쉰 웃음을 흐드러지게 웃으신다. 스님은 소들이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다고 한다. 그들은 스님의 낮은 음성, 손짓만으로도 물꼬 트이듯이 가야 할 곳으로 군소리 없이 저벅이며 나아간단다. 소를 몰며 산등성이로 향하는 자그마한 선본스님의 모습은 소들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멀어져 간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펑펑 내리고 있다. 스님과 마주 앉으려면 눈발이 더욱 굵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기에 스님은 손길을 늦출 수 없다. 그래서 아플 때는 혼자 하기에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단다. “소들이 아프면 참 속상해요. 말도 못하고 끙끙 앓는 게 얼마나 안스러운지 모릅니다.” 정이 뚝뚝 묻어나는 말씀이다. 스님의 책꽂이에는 ‘수의 약리학’ ‘수의 임상 침의학’이 꽂혀 있다. 급한 마음에 스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들여다 보며 가축에 대해 공부했으리라. 곤한 몸을 일깨우면서 말이다. 선본스님은 월남에 갔을 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당시 월남에 있는 절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다가 불교를 접했는데 그 때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입산이나 해 볼까, 한 십 년만 입산수도하면 되겠지 하구요. 귀국해서 바로 해인사로 가서 일타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모셨어요.” 선본스님은 십 년만 하면 되겠지 하고 시작한 스님로서의 삶을 이십오 년이 넘도록 해오고 있다. 그럭저럭 꽃, 나무, 동물 등 자연과 더불어 지금까지 왔다는 겸손의 말씀으로 지난 세월을 일축한다. 스님은 꽃, 나무, 동물 이 모두를 사랑한다. 스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꽃이 만발했고 나무가 힘차고 푸르게 차곡차곡 하늘을 채웠다고 한다. “그 무렵 해인사는 너무 삭막했어요. 그래 틈만 나면 꽃이랑 나무를 심었어요. 특히 국화를 많이 심었지요. 해인사 전체가 국화로 그득할 정도였으니까.”
봉은사에 있을 때도 스님은 도감 소임을 맡아 도심 속에 자리한 봉은사 주변에 정성껏 자연의 둥지를 틀어 나갔다 한다. 그리 섬세하지 않은 얼굴에 서글하게 둥그러진 눈매만이 따스함을 느끼게 할뿐인데 어찌 그러한 고운 감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스님은 자신이 하는 농사는 늘 잘 되었다고 한다. 봉은사에서 나와 젖소 다섯 마리로 농장을 처음 시작할 때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 땅을 빌려 배추 농사를 무려 삼만 포기나 지었는데 모두 속이 꽉 찬 것이 그리 잘 여물었다 한다.
“봉은사에 얼마 나누어주고 근처 마을에 내다 팔았는데 하필 그 때 배추값이 폭락해서 돈이 얼마 되지 않더라구요(웃음).
요즘도 주변 땅 빈터에서 늘 무엇이고 심어 마을 사람들과 나누는 재미를 느끼죠. 사실 생활을 하는 일반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잔돈벌이라고 생각되는 일에도 그들을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고생이 되어도 일거리만 있으면 다행 아니냐고 그들은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단박 대답을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있어 온 불교 내부의 갈등, 흔히 말하는 절집 안이 복잡한 정치에 선본스님은 큰 회의를 느낀 듯하다.
십여 년 동안 봉은사의 소임을 보며 지내온 스님이 그 곳을 나와 흙 냄새와 소똥 냄새가 질펀한 이곳에서 오 년이 넘게 생활을 하게 된 깊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스님은 정의파였으리라는 것이다.
“철저한 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쉽지가 않더군요. 모두 버리고 바라는 바 없이 살아가고자 했지만 어차피 생활이라는 굴레는 자꾸 생각을 속스럽게 만드는 듯합니다.
생각을 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 가게 되더군요. 큰 문제입니다. 몸이 피곤하니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스님은 모든 평가를 뒤로 미루고 싶다고 한다. 앞으로 스님은 삶의 여정을 돌이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냐며 웃음짓는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좋든 나쁘든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함께 살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떨치고 나와 지내온 오 년의 세월을 소똥 치고 이 곳을 꾸려 나가는 데 허비했지 과연 스님으로서 무엇을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스님의 모습은 조금도 허전하지 않다. 비록 스님의 가슴에는 갈등이 여울지더라도 언제나 열심히 쉬지 않고 살아 온 한 스님이었던 까닭에 그러하리라. 출가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살아가고 있음이 바로 진정한 출가자의 모습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공부하는 스님들은 공부를 해야지 일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고 얘기한다.
“겉으로 보면 편안해 보이고 노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는 가운데 공부도 하고 화두를 한번이라도 더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나면 몸이 곤하니 잠이 오고 쉬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공부도 학문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더욱 여법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된다. 대립이라든지 하나만을 고집하는 상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이면서 다른 양태의 삶을 충실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걸림 없는 무애의 모습이 느껴지기조차 한다.
일곱시, 젖소들을 불러 아침을 주는 일로 본 농장의 하루는 시작된다. 하루 두 번 우유를 짜고 사료를 준비한다. 고장난 것은 손수 고친다. 늘 되풀이함에도 줄어드는 법이 없다. 생활이라는 것이 본디 그러한 것이리라. 생활하는 모습이 여늬 다른 농장과 다를 바 없을 터인데도 선본스님은 어딘가 다르게 보인다.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진지한 느낌이 있다. “살면서 드는 생각은 제가 스님이 아니었다면 혼자서 이렇듯 살아가기가 힘들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배웠고 스님으로서 살아가고자 함이 있었기에 조금 덜 벅차 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사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가져야 할 것도 우리는 별로 없잖아요. 단지 출가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번민만이 있을 뿐이지요.”스님은 흔히 말하는 중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지난 세월 어는 한 지점을 되짚으며 그 때 선방으로 들어가 바보 승이 되었어야 했다며 웃음을 보이기도 한다. 살아 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멀고 어렵다는 얘기를 하는 스님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우유를 짜야 할 시간이다.
눈발은 굵어져 구름 타듯 노닐며 사분사분 내린다. 눈이 오면 가장 신나게 뒹굴고 짓까부는 바둑이들은 우리가 나서는 기척에 다시 난리 법석을 떤다.
선본스님이 참다 못해 입을 뗀다.
“시끄럽다.”동물을 키우는 일은 무정물인 식물을 키우는 일보다 감정이 많이 가고 힘들다고 한다.
“꽃, 나무를 키우는 일은 참으로 사람을 평안하게 합니다. 조금씩 뿌리를 뻗어 나가 풍성한 수확을 가져오는 것을 보면 뿌듯하지요.
그러나 동물은 유정물이라 정도들지만 그만큼 마음 고생도 있어요. 어찌 보면 사람이 좀 험해지는 듯도 하고요.”한번 인연을 맺으면 어쩔 수 없이 얽히게 되는 까닭에 스님들은 개 한 마리도 없이 살아가야 한단다.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바깥의 모든 반연을 제하고 내심에 헐떡거리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본스님이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글귀이다. 적멸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언제고 생각이 정립되는 날 훌훌 털고 떠나겠다는 스님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향하기 위해 잠시 발길을 묶고 있는 것이다.
하얗게 책색되어 가는 둔덕 아래 스님은 점으로 조그맣게 남겨진다. 눈발에 얼굴을 비비며 미끄러지듯 걸어가다 뒤를 돌아본다. 스님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중노릇 하는데 이름없이 살아야지 이름 나면 좋지 않아요.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처음 뵈었을 때 멀리 눈길을 보내며 한 얘기이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날 남한강 푸른 줄기를 따라 어디론가 떠나실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