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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난, 왜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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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1월 155호
80년대 들어 우리는 법난이라는 맡을 볕 거부 반응 없이 익숙하게 들어왔다. 역사는 이미 흘러간 물이지만 앞으로 흘러올 물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두웠던 역사를 꺼내어 들추어 보면서 그 시대의 사회적 구조에서 수행인은 어떠한 책임 의식으로 법난을 맞이했으며 또 어떻게 대처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수행 가풍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난을 마련하였다.


80년대에 들어서 불교도에게 귀에 익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법난法難”이라는 단어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l980년 10월 27일에 일어났던 이른바 10.27법난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이 벌어졌으므로 이를 ‘법난’이라 지칭했고, 이 10.27법난은 지금도 한국 불교 현대사에 있어서 법난의 표본으로 회자되고 있다.
80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계 또한 진보적이고 자주적인 역사 의식의 저변 확대를 기반으로 지난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했다. 그 과정에서 왜곡되어 왔던 10.27법난이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왔고, 결국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10.27법난이 법난으로 규정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조계종 개혁의 현장에 투입되어 특정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려 했던 1994년 3월 29일과 같은 해 4월 10일의 정부 공권력 난입을 법난이라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법난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를 남발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법난의 사전적 의미를 새기면 “역사상 불교 교단이 받은 박해”라고 규정 지으며 역사상 중국 북위의 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 후주의 세종을 총칭하여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과 우리 나라 조선조 태종과 연산군 때의 법난을 대표적인 법난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사전적인 의미인 법난을 불교 교단이 받은 박해라고 규정짓는다면 선행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는 바로 피해자냐, 피의자냐 하는 결과론적인 판단이 있어야 법난의 올바른 정의가 내려진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범법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경우와 범법 행위 -살인, 강도 등- 와 상관 없이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처벌을 받는 경우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만일 불교가 사회악을 조장하는 범죄의 소굴이어서 당시의 사회법에 위배된다면 이는 분명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 사회의 그릇된 통념과 관행,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제재를 받는 다면 이는 법난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불교 탄압을 법난이라고 얘기하지만 일부에서는 법난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이는 익히 알고 있듯이 고려 말 불교의 타락에 그 원인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의 유생들이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발표한 상소 따위를 보면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이 전적인 원인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려 말 불교계의 상황을 보면 이미 고려 중기부터 불교계의 타락은 깊어서 의 좋은 일부 문신과 승려들이 방탕한 놀음과 잔치로 날을 지새기 일쑤였으며, 개성 근교에 사치스러운 이궁離宮과 사찰을 세워 향략 장소로 이용하였다. 또 각 사찰에서는 경색經色, 위의색威f義色, 기은색析恩色 등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불사를 일삼아 국가 재정의 고갈을 재촉해 당시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킨다.
문신 정권의 부패에 대항해 정권을 잡은 최씨 무신 정권도 각종 기복적인 호국 불사를 일삼아 민중수탈에 앞장
섰으며, 몽고의 지배하에서도 선종의 수선사나 천태종의 백련사 등도 초기의 결사 정신은 퇴색되어 중기 이후부터 불교계의 타락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말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 세력은 그와 같은 당시 불교의 타락상을 상소 등을 통해 비판하면서 불교의 인적, 물적 기반의 해체를 위하여 여러 노력을 경주해 왔다.
1352년 이색은 공민왕에게 “도첩제의 실시, 각종 불사의 중단”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창왕원년 이성계의 심복 조인옥은 당시 승려들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에 열을 올렸다. 정몽주, 정도전, 박초, 김초 등 급진적인 사대부 세력들은 불교의 부패에 대한 비판차원을 넘어서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교리 자체에 대한 이론적인 공격도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 공양왕이 보우스님의 제자인 찬영을 왕사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나서 찬영은 대궐 문밖으로 쫓겨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특히, 박초의 경우 북주의 불교 폐지 정책을 모범으로 삼아 백성들의 출가 금지는 물론, 승려들의 환속, 사찰 토지의 몰수, 불경의 소각, 불상과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 것, 사찰 노비의 몰수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인 신진 사대부들의 불교 배척 주장은 상당 부분이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실행되었고 그로 인해 불교는 오백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암울한 상태로 보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삼국 시대, 통일 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찬란한 불교 문화는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하거나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더욱이 유생들은 풍수지리사상을 내세워 전국 각지의 이름 있는 사찰들을 폐지시키고 그 곳에 자신들과 선조의 무덤을 만들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자리잡은 불교 윤리나 풍속을 폐지시키거나 왜곡하여 불교의 진면목을 심하게 훼손하였다. 결국 조선 왕조가 불교를 탄압한 데에는 그들의 정치, 경제적 기반 확보라는 측면이 계산되어 있지만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이 상당 부분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무시 못할 법난의 원인이었다. 이는 조선에 꼭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며 이미 중국에서 발생한 법난의 원인으로 당시 불교계의 타락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면에서는 고려 말 불교계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했지만 당시 승단의 역사에 대한 몰인식이 조선 왕조에 의한 미증유의 법난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곧 중국에서 발생한 법난은 표면적으로 유, 불, 도 삼교, 특히 불교와 도교의 대립 항쟁이 표면적인 원인인 것과
당시 위정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데서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단행했던 점을 생각하면 조선의 법난도 예견된 필연의 결과였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그것을 교훈삼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내일을 위한 발전의 거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중국과 조선 시대의 법난에 대해 실증적인 자료를 토대로 그 발생 원인과 배경을 밝혀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