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 나는 부다가야 니련선하 강가에 있었다. 강둑의 넓은 잔디 밭위에는 흑염소 몇 마리가 한가롭고 등 뒤로는 이천 년도 더 전에 아쇼카대왕이 세웠다는 부다가야 대탑이 석양에 졸고 있었다.
스리랑카 콜롬보를 떠나 봄베이, 아울랑기바트, 아잔타, 보팔, 산치, 아그라, 바라나시를 거쳐 부다가야에 이르기까지 인도 대륙을 여행하면서 동행한 스님을 떠올려 본다.
인도를 호강하며 순례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지옥훈련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콜롬보를 떠나면서 “나는 인도성지 순례가 네번째이니 경비 관리를 내가 해도 되겠느냐”는 스님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둘이서 각각 250불씩 해서 모두 500불을 스님이 맡았다. ‘사십만원 가지고 두달 동안 인도를 여행한다? 그것도 둘이서’하며 의아해 했지만 일단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법정스님이 어느 책에서 “함께 여행을 할 때는 길동무와 치수가 맞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 하는 여행이 편하다고 했던가? 출발할 때 둘러맨 짐보따리 부터 차이가 심하게 났다. 책 두어 권, 양말 한 켤레, 가벼운 내의 한 벌, 그리고 세면도구가 전부인 스님의 걸망에 견주어, 내 짐은 그림 도구, 카메라, 카세트, 미싯가루 둥 간식용 먹거리, 우산 등등… 그러나 스님은 내 짐의 무게에 대해서 단 한번도 관심을 표하는 일 없이 마냥 돌부처였다.
인도를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한 두번 경험해 본 일이겠지만, 아그라에서 바라나시까지 열여덟 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하는데, 표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시간이 한시간 반, 또다시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 시간 십 분, 열차가 출발한 뒤에도 십 분 달리고 이십 분 쉬는… 계속 그런 식인지라, 처음부터 내 진심嗔心은 시험당하기 시작했다. 객실 속은 또 어떤가? 좌석표대로 앉았건만 좌석이 삼층으로 되어 있는 건지 머리 위 선반에도 사람, 좌석과 선반사이에 또다시 좌석이 있어 열 여덟 시간 동안 윗 칸에 앉은 사람의 발뒷꿈치만 바라보며 여행한 기분이었다. 어쩌다 회장실이라도 다녀오게 되면 열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람이 냉큼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척하니 아무리 흔들고 소리를 질러도 꿈쩍도 않는 그 곳 사람의 쇠심줄 앞에서도 스님은 피식 피식 웃고만 있었다. 장거리 코스는 비행기로 가자는 내 제의에 “인도 순례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신다 했지요?” 하고 되 묻는 스님의 말에 꼼짝없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일 주일쯤 지나서부터는 표정 관리를 포기한 채 마구 화도 내 보았다. 그럴 때면 스님은 가차 없이 “여기는 인도입니다. 당신은 한국에서만 교수지 여기서는 순례자에 불과합니다 라는 대꾸 한마디 뿐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릭샤를 탈 때는 내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대강 흥정하고 탈수도 있으련만 가격이 당신 마음에 들 때까지 대여섯 릭샤꾼을 붙들고 후려치고 깎아서 8O루피가 40루피로 될 때까지 나를 끌고 다녔다. 겨우 흥정이 끝나면 이상하게 두 사람이 탈수 있는 공간인데도 나만 태우고 릭샤꾼에게 위치를 가르쳐 주고 스님은 걸어서 한참 뒤에야 숙소에 도착하곤 했다.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우천 선생, 릭샤를 타면 무엇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디까?” 그거야 늙은 릭샤꾼의 뒷 목덜미였다. 땀으로 범벅이 된 릭샤꾼의 목에는 빛 바랜 누런 타올 한 장 걸쳐져 있고 땀에 젖은 런닝셔츠는 살갗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에는 나도 탈 수가 없어서 짐만 싣겠다 했더니 “그러면 우리 가방 들고 도망쳐 버립니다. 릭샤를 타면서 릭샤꾼의 땀에 젖은 목덜미를 화두 삼아 한 소식 하십시오…”
숙박은 주로 게스트 하우스라는 여행자숙소로 나를 안내하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이 숙소 저 숙소를 헤매면서 기어코 당신 가격에 맞아야 여장을 풀었고 그렇게 찾고 찾아 가장 고약한 숙소에서 쉬게 되니 나는 파김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등에 맨 기방무게에 지치고 숙소의 시설에 지친 나를 스님은 한번도 휴지가 있는 화장실. 모기장이 제대로 되어 있는 침대를 갖춘 곳에서 재워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밤새 모기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인데 스님은 자리에 눕기만 하면 곧 바로 수면 삼매다.
불볕 찜통 속에서 아침을 빵 한 조각과 우우 한 컵으로 때우면 하루종일 물만 마시며 강행군을 시켰다.
점심과 저녁 식사는 주로 길거리에서 파는 짜파티-우리 돈으로 한 장에 사십 원꼴-나, 오믈렛-빈대떡 같은 인도 음식-으로 떼우는데 나는 입을 찢어도 먹을 수가 없는 그런 길바닥 음식을 우리 스님은 어찌 그리 잘도 드시는지…. 파리떼, 벌떼가 새카맣게 달라붙는 설탕 범벅의 그 신성한(?) 음식을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하루 종일 플라스틱 물병을 대여섯 개씩 비웠다.
한 달쯤 지나서는 잘 먹지도 못한 채 날마다 계속되는 설사가 잡히지 않아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판인데 우리 스님은 새벽 네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침대 위에 가부좌로 앉아 참선의 일상을 여여히 하고 계셨다. 어쩌다 처량한 표정과 온갖 애교로 “한번만 호텔에 가서 쉬어 가자” 할라치면 “몸뚱이 착着 털어내려면 아직 멀었다”는 식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헤어지고 싶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갈등과 아상과 진심嗔心 속에서 여행은 계속되었다. 두달 뒤 약속했던 네팔 카트만두에서 헤어질 때 내 몸무게는 16킬로그램이 달아나 버렸다.
나는 귀국한 뒤 혹여 이 스님 안내로 성지 순례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었다. 이십만 원으로 두 달 동안 성지 순례라니…
그런데 이상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일 년, 이 년 해가 거듭할수록 스님이 보고 싶어졌다. 스님은 그 뒤 다시 스리랑카로 들어가 삼 년 결사를 끝내고 돌아오신 뒤 송광사 수련회 부원장으로 잠시 머물더니 다시 미얀마로 비파사나 공부를 위해 떠나셨다. 그런데 미얀마 체류 일 년 만에 병을 얻어 귀국한 뒤에 바로 치료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육신의 옷을 벗으시고 말았다.
스님이 원효사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간에 좋다는 별의별 약을 다 구해 시용해 보았지만 스님은 나이 사십 고개에서 그만 세상을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이미 다비가 끝나버린 뒤에야 서울 출장에서 돌아와 스님의 부음을 전해 들었고, 그날은 하루종일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제 스님은 곁에 없지만, 인도 순례길 두달 동안 나에게 남긴 가르침은 삼천 배 공덕보다 더 크지 싶다.
스님은 나에게 인내력 기력, 진심 다스리기, 아상 털어내기, 자기 낮추기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불교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를 두 달 동안 온몸으로 가르치셨다.
현음玄音스님, 지금도 저는 세속의 일이 힘들 때면 부다가야 강변을 생각하면서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고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