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 가는 구름같이… 탄성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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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5년 01월 155호
서울 목동에 살고 있는 보살님에게 큰 달력을 하나 선물 받았다. 벌써 금년 한해도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이다.
금년 한해는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누구든지 전화를 하면 묻는 안부가, “요즘 바쁘시지요”이다. 그만
큼 나 지신도 바빴고,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도 바쁘게만 보였다. 사실 나는 바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 출가 사문의 삶이 수행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생활이 바쁜 것보다는 정미롭고 치열해야할 것이다. 한데 금년 일년은 치열하기는 했으나 정미롭지는 못했다. 너무나 바쁜 까닭에 나 자신을 돌아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하는 일에 대한 철저한 점검 같은 것은 할 틈도 없었다.
종단을 개혁하여 역사를 바꾸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어떠한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능히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지내 놓고 보니 꿈만 같고 그저 아득하여 정신없이 바빴다는 기억밖에 다른 것이 없을 정도이다. 차분히 생각 할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잘 할수 있었을
것을 하는 이쉬움도 없지 않다.
이제 개혁회의 간판도 내리고 새로운 총무원장도 원만하게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그 동안 개혁회의 기간에 활동했던 총무원 진영들은 모두 물러났다. 신문에서도 모두 좋은 전례를 남겼다고 높이 평가를 했다. 아직 종단개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개혁회의가 무사히 간판을 내림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이다. 나도 이제 모든 직책을 내놓고 보광사로 돌아왔다. 어제는 모처럼 먹을 갈아 글씨도 써보고 혼자 뒷산으로 산책 겸 등산도 해 보았다. 초겨울 산은 한 없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산도 내년 봄을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리라. 그래서 이렇게 고요하게 쉬고 있는 것일 것이다.
우리 실천승가회의 스님인 일문과 지만스님은 벌써부터 인도로 배낭 여행을 떠나겠다고 서두르고 있다. 나도 며칠 보광사에서 다리를 펴고 쉬었으니, 어디 도반을 찾아서 여행이라도 한 이틀 다녀올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이제 며칠 쉬었으니 공림사에 다녀와야 하지 않겠냐고, 법안스님이 연락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했더니 그럼 아예 날짜를 잡아서 개혁회의 기간 동안 집행부에서 일했던 스님들은 모두 가자고 해야겠다고 한다. 그렇게 한번 추진해보라고 했더니, 날짜를 l2월 6일로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공림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신임 총무원장의 취임 날짜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였으나 많은 스님들이 참석했다. 삼, 사십 명은 됨직한 대중이 모였다. 사중에서 점심 공양을 준비했는데 차린 음식이 성대했다. 탄성스님도 시종 기분이 좋으셨다. 기념 촬영을 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사진을 찍자고 하면 피하지 않고 모두 응해 주시곤 했다. 우리들도 서울 총무원에서 모시고 있을 때보다는 산중에서, 그것도 당신의 처소에서 뵙게 되니 더욱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모두들 지난 여름 살인적인 더위에 동분서주 정신없이 일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어렵고 힘들던 것도 지나 놓고 보니 모두 좋게만 생각되었다.
그 사람의 인품을 알려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가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탄성스님의 방은 선객의 방답게 조촐했다. 서울에서 총무원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좌복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셔서 이런저런 행사에도 주로 부원장 스님인 지하스님에게 나가도록 했고, 당신은 그저 방안에서 조용히 좌선을 하고 계실 뿐이었다. 공림사의 방도 다른 복잡한 장식이 일체 없고 구석에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있을 뿐이다. 스님에게서는 그저 서울에서의 생활이나 산중에서의 생활이 여여하고 여여하여 마음경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운수납자로 공림사에 한번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탄성스님이 주석하시기 전인데 빈터에 기울어 가는 요사체와 작은 법당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은 아주 정리가 잘 된 도량으로 중창이 되어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탄성스님이 하사는 말씀을 들어 보니 순전히 스님의 원력으로 이룬 중창불사였다. 지난 10.27법난 때 서울에 상경하여 잠시 총무원장을 맡으신 적이 있는데 그때 총무원장을 내놓고 곧바로 내려온 곳이 이곳 공림사라고 한다. 그 당시 절터는 좋은데 비어 있어서 좋은 공부도량으로 복원을 해야겠다고 원력을 세웠다고 하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선원을 짓는 것이었는데 겨우 천오백만원을 가지고 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돈이 있으면 목수를 불러 일을 하고, 돈이 떨어지면 쉬고 그렇게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탄성 큰스님이야말로 우리 종단에서는 드물게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하신 분이다. 우리 종단에서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는 세속 개념으로 권력의 정점이다. 모든 종단 행정 업무가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로 집중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총무원장을 하려고 치열한 각축을 벌인다. 세속인들로부터 불교 내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종권 싸움을 한다고 지탄을 받아 온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우리 종단의 분쟁은 이념이나 사상에 근거하기보다는 주로 주지 직과 총무원장 직을 놓고 벌이는 종권 싸움이었다. 한데 탄성스님은 그 동안 한번도 종권 싸움에 연루된 일이 없는 분이다. 종권을 탐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도 스님은 남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한 분이다. 그러고 보면 세속의 명예나 부귀가 반드시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듯 우리 절집안의 종권도 탐욕을 부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탄성스님은 종단에 위기 상황이 돌아오면 중책을 맡아야 하는 전생 인연을 타고나신 모양이다. 일찍이 우리 불교 역사에 없었던 저 치욕의 10.27법난 이후에도 산중에서 동안거중에 계시다 상경해 총무원장 직을 맡으셨다.
이번 삼, 사월 구종법회 개혁회의가 출범할 때도 모두 탄성스님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종도들의 뜻에 따라 스님은 그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총무원장이라는 멍에를 걸머진 것이다.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탄성 큰스님과 그 동안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다만 큰스님의 시봉들 가운데 나와 매우 가까운 도반들이 있어서 그 도반들을 통하여 스님의 평소 인품이나 수행력을 전해 들어 아는 정도였다. 이번 개혁 회의 기간에도 나는 스님을 만나는 것이 순전히 개혁이라는 큰 일을 앞에 놓고 공적인 일로만 만날 수 밖에 없었다. 비판 기능을 생명으로 하는 신문사의 사장이었으니, 스님을 만날 때에도 신문사의 사장으로서 총무원장을 만나는 때가 많았다.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개혁회의 기간 중에 범종추와 총무원 집행부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자연 큰스님과 나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고, 그러자니 큰스님으로부터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특히 신문의 특성상 비판 기능을 살리고 보면 평소 산중에서 사시던 분이라 신문의 비판 기능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리히여 호된 꾸지람만 내리실 때에는 나 역시 야속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산중에 계신 분을 우리가 모시고 와서 고생을 시키는 입장이라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리는 것만 같아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단 개혁이라는 큰 일을 하는데 어찌 평탄하기만을 바랄 수가 있을 것인가. 다 지내 놓고 보니 생각 나는 것 모두가 큰 스님의 높은 인품에 감화 받은 기억밖에 없다. 마지막 불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말씀하시기를, 힘들었던 것은 모두 잊어 버리고 무사하게 개혁회의를 마무리 짓게 된 것만이 기쁠 뿐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종단에 비상한 사태가 발생하면 그때도 기꺼이 총무원장을 맡으시겠냐고 여쭈었더니, “다시는 종단에 이 같은 불행이 없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시는 우리 종단에 비상 사태가 생겨서는 안되겠다. 이제 탄성스님의 연세도 칠십을 바라보는데, 어찌 다시 종단 중책을 맡으시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공림사 가람이 중창되듯 이제 우리 종단도 중흥 될 것을 바랄 뿐이다. 바람따라 흘러가는 구름 같이 종단 일을 마치고 표연히 공림사로 돌아가신 큰스님이 부러울 뿐이다.
부디, 큰스님 건안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