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오소리로 살지 않았나 싶다. 어린 시절, 집 담 너머 바로 위쯤에 굴을 파놓고 그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생각을 자주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어렸을 적부터 나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내 부모는 친부모일까. 그렇다면 왜 나는 우리 부모에게 왔을까’ 라는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저 끝없이 먼 하늘은 어디가 끝일까.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까지 끝없이 밀려드는 의문 속에서 어린 날들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끊이지 않고 은은히 이어져 온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출가의 길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스물다섯에 산문에 들어왔으나 행자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답답함이 내 출가 본사인 봉선사 청풍루 이층에서 뛰어내리게 하는 해프닝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그 의문이 아직까지도 내 화두의 본체로 남아 있으니 내가 조숙한 아이였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속가의 내 아버님이 전형적인 유교 가풍의 점잖은 분이었으나 외아들인데다 종손이었던 나는 어쩐 일인지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어른들이 세워 놓은 질서라는 것에 끝없이 의문을 품었고 쉬이 그것에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 서울로 유학, 재수해서 들어간 번듯한 고등학교를 어느 한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퇴서를 쓰고 보명의 고향집 사립문을 들어서는 날 보고 가슴이 덜컥하였던 아버지는 사정을 듣고 난 뒤에는 그빅야 어린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야 마셨으니, 나는 분명 요즘 말로 좋게 말하면 창의적인 인간형이요,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속깨나 썩이는 인물이었다. 어쨌거나 그러한 나의 다소 돌발적이기도 하고 조숙하기도 했던 성정 탓으로 늦깎이로 들어온 행자생활도 남다르지 않았나 싶다.
서울에서 멀지 않아 밖에 나가 공부하기도 좋은 점도 있고, 속가에서 만난 은사의 권유도 있고 해서 봉선사에서 살게 되었는데, 내가 봉선사에 와 보니 이미 세 명의 행자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우린 마음을 맞추어 공부도 하고 잘 지냈다. 그리고 누구나 행자시절이 그러했던 것처럼 청소하고 공양 준비하고 심부름하고 예불하며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행자들과는 마음을 잘 맞추고 살았으나 절집안의 기존 질서라든지 어른 스님들이 마음에 안 드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 기존의 질서에 반란을 일으키곤 했던 예의 그 성품이 튀어나오곤 했다. 평소에는 고분고분하다가도 어른 스님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문 두드림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가 스님을 놀래키기도 했고, 마음이 답답하면 말없이 휙- 절 문을 나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다. 행자인 주제에 눈치코치 안 보고 걸림없이(?) 사는 나를 보고 다른 행자들이 ‘자유행자’ 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행자 앞에 붙여졌던 ‘자유’. 그랬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세상이 밑도 끝도 없이 그어 놓은 줄 같은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 싶었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에서 하루 빨리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사무친 정진과 절대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러한 무모하리만치 컸던 열정 탓에 남들이 몇 개월, 또는 일 년쯤으로 마감했던 행자시절을 나는 무려 십 년 이상으로 늘리지 않았던가 싶다.
그 시절 내게 붙여진 ‘자유행자’ 라는 별명 외에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덧붙여진 별명은 ‘조실행자’ 였다. 남들보다 유난히 오랜 시간을 행자로 보낸 탓에 얻은 이름이기도 한, 새로 행자가 들어오면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후원의 케케묵은 마룻장 때를 같이 닦기도 하고 농사철에는 피를 뽑고 하는 일들을 가르쳐서 얻은 별명이기도 했다.
행자시절 동안 아무튼 쓸고 닦는 게 내 주된 일과였는데, 어려서부터 샘물 길어 나르고 청소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교육 탓도 있거니와, 언젠가는 출가 전 내게 한학을 가르쳤던 속가의 은사댁 마룻걸레가 어찌나 희고 깨끗했던지 마른 수건으로 착각하고 입을 닦은 적도 있었으니 이래 저래 나는 깔끔한 것과 인연이 깊은 셈이다. 속가의 은사께서는 나에게 먹을 갈게 하면서 ‘먹을 가는 것은 우수, 사려,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어느 날 문득 주지 스님께서 쓰는 벼루를 보니 청소할 시기가 넘어 있었다. 벼루며 붓을 우물가로 가져다가 칫솔로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내어 놓아 드렸더니 출타했다가 들어오신 스님께서 보시곤 ‘벼루 청소한 행자는 내 평생 처음 보았구나’ 하셨다. 깔끔한 성미인 나는 더러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여 창틀의 먼지에서부터 절문 밖 길까지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틀의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듯 마음에 끼인 때도 수행정진하여 닦지 않으면 영원히 무명의 어둠 속을 헤맬 뿐이니, 뒷날 내 은사 스님이 되신 월운스님께서 때로 행자들의 방을 열어보고 혹여라도 어지러이 물건이 널려 있으면 누가 쓰는 방인지 알면서도 짐짓 ‘이게 누구 방인가’ 하시며 무언으로 나무라시던 심중을 헤아릴 것 같다.
그렇게 세 해를 보내고 짐을 싸서 걸머지고 시정으로 나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했다. 시정 한복판에 방 한 칸을 빌려 놓고 은사 스님 없는 행자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렇게 꼭 십 년을 채우고 다시 봉선사에 들어와 비로소 사미계를 받았으니 행자시절을 꼭 십삼 년 보낸 셈이다.
출가 전후 한학과 인연이 있었는지라 내게 한학을 가르치셨던 은사는 출가할 생각을 품고 있던 내 의중을 헤아리시고는 내게 ‘무명고無鳴鼓’ 라는 호를 주셨었다. 말 그대로 ‘목탁 두드리는 일이 없으라’ 는 당신의 심중을 전한 것이었는데 결국 그 호를 받고 몇 해도 안 돼 출가했는데, 이런 내용을 들은 은사 스님께서 앞의 ‘무’ 자를 빼고 ‘명고’ 라는 법명을 내리셨다.
이 곳 산사에 가을이 깊어지면서 나뭇잎이 한창 아름답게 물들더니 며칠 전에 내린 때 이른 눈으로 나무가 잎새 하나 없이 말끔하다. 겨울 나무는 어느 계절보다 평화롭고 의연해 보인다. 겨울 나무처럼 그렇게 군더더기 없는 수좌로 살고 싶어 봉선사에 들어오자마자 선방으로 떠났었다. 십 년을 먼저 선방에서 살리라 맘 먹고 길을 떠나 벌써 몇 해가 흘렀고 그 결심엔 변함이 없다.
‘효봉 선사의 일대기’ 를 읽고 발심했던 그 풋풋하고 긴장된 초발심의 끈을 늦추지 않으려고 오늘도 좌복 위에 앉아 생각을 모은다.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