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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일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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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12월 202호
양력 십일월 초승, 땅 위에 고인 물이 얼기 시작한다는 입동 직전이다. 이미 대기는 제가 품었던 물기부터 떡가루보다 곱게 얼리어 땅에 풍겨 놓았다. 이 철에 하늘이 더욱 푸르러져 아득히 솟아올라 보임은 공기 속의 물기가 그렇게 모두 땅으로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가지 자르기를 채비하던 과수원집 주인은 떨어져 누운 잎을 태워 그것들이 땅으로 돌아갈 길 거든다. 살아 있던 목숨이 온전히 되돌아갈 길말고는 딴 길이 없다. 그러나 바람마저 한 점 없는 오늘, 떠나기 전 형상 하나 지어 놓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지, 그것들은 한 줄 연기로 저를 곧게 띄워 올린다.
그 연기 흩어져 미처 가 닿지 못하는 높이에 오늘 밤은 둥근 보름달이 뜰 터였다. 달아, 높이 떠서 우리 서방님 늦은 밤길 밝혀다오. 그 옛날에 정읍의 아낙이 부른 노래는 너른 땅에 걸맞는 것이다. 계곡이 깊으면 하늘에 뜬 달과 별은 나만의 것인 듯 가깝고, 산이 낮아 들이 넓으면 하늘도 달도 높고 멀다. 그러나 달빛은 멀리에까지 두루 미치니, 정읍의 너른 땅에서 이루어지는 풍경이 그러했으리라.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 내려가는 길, 빈 들에 단정히 놓인 노적가리가 가슴에 점 찍는다. 가을걷이가 끝난 땅에 모다기모다기 놓인 저 겸손한 짚단들 좀 보아라. 알곡은 털리고 벗은 몸은 흙색으로 변했으나, 애처로이 남은 몸뚱이라 할 것 아니다. 천도에 몸 맡겼으니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저 순하고 따뜻하다. 끊어졌다 싶으면 다시 이어지는 그것들을 징검다리 삼으니 먼길이 짧다.
장성댐이 인위로 가둔 물길은 낮은 동리 몇 군데를 지도에서 아주 지워 버렸거니와, 물 안개 자주 피워 설익은 감을 꼭지째 떨구기 일쑤라더니, 감곶인 중평리에서 십 리 넘게 떨어져 있는 백양사 초입까지는 그 횡액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듯했다. 이 철에 장한 것이 잎 지고 벗은 나무에 탐스러이 열린 감만한 것이 있을까. 감나무는 깊은 숲 속에서 절로 자라는 야생의 것이 아니라 하니, 그것이 유정한 것은 까닭이 없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어느 때인가 그 나무 그늘이 거느리고 따뜻이 품었을 마을의 기억 때문이다. 오늘 내가 따 먹지 못하더라도 내일 먹을 뒷사람을 위하여 절에서도 감나무를 심어 기르곤 했었다. 그 그늘 아래 접히고 펴졌을 갖가지 사람 사는 모습이 보는 사람 마음을 데우거니와, 나무만 남기고 마을을 가뭇없이 사라지게 한 세월의 흐름도 스산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감을 단 가지는 높고 멀어 백양사 대중 스님들의 솔찮은 울력거리가 되어 보인다. 그러나 부디 욕심껏 다 따 버리지는 마소서. 그 나무 아재서 익어서 절로 떨어지는 모습 보기도 좋겠거니와, 새들에게도 보시하고, 그래도 남은 것들 위에 철 이르게 내려앉는 흰 눈발도 즐기소서.
백양사의 들머리는 이처럼 따뜻하나, 절의 배경이 되는 백암산 백학봉은 암괴로서 제 몸 일으켜 세운 폼이 기이하고도 유별나다. 그것이 거느리는 골짜기는 깊고 가파를 수밖에 없어서, 평지에 놓인 큰절을 벗어나자마자 판이한 세상이 된다. 개울 끼고 운문암 오르는 길, 골 깊고 숲도 깊다. 오늘 그 개울로 흐르는 물은 얕으나 겉보매만 그러한지 계곡 사이를 가득 메운 나무들이 떨치는 키는 젖 모자라게 자란 흔적이 없다. 길 끝에 운문선원이있으려니와, 십 리쯤 되는 중도에 “참사람의 향기” 라 적힌 글귀가 보이면 금강대로 꺾이어 드는 곳이 된다.
비자나무, 갈참나무, 단풍나무는 높게 자라고, 그 아래로 조릿대, 고사리 따위 낮게 자라는 길은 금방 끝나고, 그 길 끝에 도단으로 지붕해 얹은 삼간집 한 채 있다. 일수스님, 지난해 해제 이후부터 이 곳에 살고 있다.
해제 직전, 운문선원 대중이 그를 선원장으로 모시기로 뜻을 모아 맡은 소임이다. 그러나 제방 선원 찾으며 한참 공부할 때라 여기던 그로서는 난데없는 짐이었다. 십여 년 전, 닫혀 있던 선원을 개원한 뒤로 세 철을 내리 나다가 하도 고되어 달아났던 곳이다. 이제는 포장이 되어 차가 오르내릴 수가 있지만, 그 때만 해도 부식 따위를 꼬박이 등짐으로 갖다 날라야 했던 이 곳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이어진 것이다. 공의가 그러하니 한 철만 살고 떠나리라던 것이 올 여름 이 산중에 그런 법석이 없었던 무차선회를 집행하느라 또 발이 묶이었다.
그에게 노스님이 되는 서옹스님은 올로써 두 해째가 되는 고불총림의 방장으로서 요즘도 안거 때는 닷새마다「벽암록」을 제창하고 계시는지라, 전국의 남자들이 이 곳을 다투어 찾는 소이연이 되고 있다. 구순의 어른을 곁에서 모시는 것은 손상좌된 도리이자 홍복이 되는 셈일 터였다.
지난 동안거 때 그는 좌복 위에서 열두 시간 정진을 대중과 함께 했다. 늘 해 오던 대로였다. 이 곳 금강대는 해제 때 그가 처소로 삼고 있는 곳이다.
해인사 선방 시절, 도서관을 얼쩡거리다 호된 무안을 당하기도 하고, 청이 좋아서 듣는 사람 귀에 두루 좋았던 염불, 그것도 일심으로 하면 성불하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해인사 강원과 율원을 졸업하고 난 뒤, 그 가운데 가장 수승한 길로서 일대 본분사에 부딪쳐 보기로 한다. 마음 먹은 바를 몸으로 지어 내는 일이 행이니, 그 행을 닦는 일이 마음처럼 여의하다면 구태여 “수행” 이라 구별지어 부를 일 없을 것이다. 선방에 앉았다 말고 해인사에서 원주, 규정국장 등 사판 소임 보았던 일도 오늘 되돌아보면 “흔들림의 흔적” 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짧은 동안이나마 좌복 위에 앉아서 무슨 진척 보았던가. 없었다. 길로 나섰으나 걸음 뗀 바 없었다. 그 깨달음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음을 새삼 기억하게 한 속가 어머니의 타계로 제게 왔었다. 불혹이 머잖은 때였다. 그로부터 결제고 해제고 가림없이 가행 정진 길로 들어섰다. 짧으면 열두 시간, 길면 열여섯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서른 철 이상 성만했으니, 나라 안 선방은 안 가 본 곳 꼽는 쪽이 더 빠르다. 그 가운데서도 그가 특히 맹렬하게 공부를 지은 곳으로는 불국사와 수도암과 봉암사를 꼽는다.
강원 다닐 때 용화사 송담스님에게서 없을 ‘무’ 자 화두 하나 탔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는 없다! 했다. 물은 자가 그 자리에서 바로 말귀를 알아들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말이다. 말이 많으면 도와 멀어지는 법이니, 조주가 그때에 입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에까지 전해오지 않았을 공안이다. 길을 갈 때도, 앉아 있을 때도, 춥거나 더울 때도, 한시라도 쉼없이 의심을 내어 달겨들어야 할 화두, 의심은 어떻게 일으켜야 하나.
옛사람이 이르되 먼저 분노심을 내어야 한다 했다. 소리를 내자면 엎드려 있는 범의 소리와 같은 비음이 절로 나는 분노심이라야 한다 했다. 그저 간看하거나 생각할 바가 아니라 했다.
옳은 태도로 지어 가는 공부라도 시시로 선지식을 찾아 점검을 받아야 하니, 얻은 듯해 보이는 것이 식광識狂인지 공화空花인지 자신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금의 선지식 가운데서도 뒷날에 “집이나 방에 들어가지 못했으면서도 대문이나 안방쯤에 들어간 줄로 알고 우쭐댄 적이 있었다” 고 털어 놓은 사람이숱하거니와, 그에게 그런 “지견이 생겼던” 것도 그런 과정에 있었던 일이다.
“공부가 조금 진보가 있어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잊히지 않는 경계를 얻었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마라. 만일 이 식신識神이 그림자를 놀리는 것에 집착하여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면 도리어 정식情識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될 것” (단운 지철)이라 경고하니,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연로한 선배라도 부족한 데가 있어 보이면 과감히 그 곳을 짚어 주는 것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찾게 하는” 일이라 하였것다! “부모에 간하는 아들이 없으면 가도家道가 쇠약해진다” 하였것다! 조실방을 뛰어들어 일러라 일러라 외치고, 선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탁마의 과정이라고는 하나 그의 행동은 거칠었으니 공부 선배들의 해량으로 무탈히 넘긴 나날이었다 했다. 서옹, 서암, 혜암, 진제, 월산… 그가 꼽는 선지식들의 도움으로 엇나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했다. 그러나 제게 있었던 그런 분상은 “한생각 바꾸어 공부의 계기로 삼았던”, 아프지만 소중한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또 한 구비 세월 보낸 지금, 좌복에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키고 앉을 작정이니, 남을 밝힐 수는 없으나 제가 갈 길은 좀 보인다. 그는 그저 그렇게 말한다. 이 산중에 홀로 앉아 무얼 하고 계신가 쉽게 물을 일 아니다. 드러날 것이 있으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날 일, 그저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여 줄 따름이다. 좌복 위에서 포교하고, 그 위에서 중생 제도할 터이다. 불공하는 일도 그런 것으로 가능하리라 여긴다.

맞은편 백학봉 바라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랫도리는 비자나무 숲에 발 담가 둔 산, 산그늘이 반허리 차오를 무렵, 서쪽 지는 해를 되받아치는 기세는 장엄하여 두 눈 뜨고 온전히 맞바라볼 수가 없었다. 단풍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섞이어 지르는 아우성을 간단히 잠 재운다. 밝아서 흰 빛으로 발광하는 저 봉우리, 그러나 더 채울 것 없이 원만한 봉우리다. 아마도 길 끝에서 찾는 것 있다면 필시 저 모습일 뫼봉이다.
현판에 적힌 “금강대” 당호는 처마 밑에 가리어 숨어 있다. 익으면 절로 드러날 바이니 말로써 드러내기 못내 마다는 그의 심중과 같다. 왜 금강암이 아닌 금강대인가. 마음 속에 높은 벼랑 하나 만들어 지니었음인가. “추울 때는 얼어 죽고, 더울 때는 쪄죽을 듯이” 살아 보려는 마음인가. 평지보다 바람 끝 더욱 맹렬한 곳이니, 수행의 길, 송곳 같은 삭풍 속에 저를 가두어 두려는 마음인가.
그러나 상좌 하나와 이 곳에서 짓는 나날의 살림살이는 단촐하나 정겹다 할 만한 것이다. 그가 도량석 하면 자신은 종성하고, 자신이 지어 놓은 밥으로 그가 사시마지 올린다.
이제사 철이 났는지, 산 나뭇가지 하나 못 베겠어요.
쓰러져 있는 죽은 나무만 거두어도 방을 덥힐 땔감은 충분하니, 구태여 산 나무 찍어 넘길 일도 없다.
호박은 누렇게 익어 거둘손만 기다리고 있고, 고소, 상치, 무, 배추, 당근, 고추 등 땅에 묻어 키우는 종자는 갖가지라 웬만한 푸성귀는 다 자급이 될 만해 보인다. 벽에 기대어 선 대여섯 자루 지팡이는 백학봉, 상왕봉, 사자봉 등 백암산이 품은 봉우리로 포행 갈 때 동무 삼아 짚고 나서는 것들이리라.

계곡 깊은 숲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사삭거리며 인기척 피해 멀리 몸 움직이는 네 발 짐승 기척 있다. 백학봉 위로 그림처럼 달 떴건만, 깊은 골짜기까지 기웃거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음 한가운데 둥글게 품은 달 하나 있으니 어둠 헤쳐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지체함이 없다.


글/김영옥 사진/홍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