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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속에 새 시대를 향한 개방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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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곽효환 1998년 12월 202호
곽효환/대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한해가 90년대와 함께 저물고 있다. 더불어 한 세기가 장章을 접고 밀레니엄이라는 거대한 시간대의 바뀜을 맞고 있다. 이맘때면 한해를 정리하거나 결산하는 일이 으레 되풀이되지만 올해는 여느 해와는 사뭇 다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 단위의 의미를 공유하는 데서 기인한다. 십진법十進法 체계의 지배를 받는 인류에 1백 또는 1천 단위의 숫자, 시간, 기간은 많은 뜻과 상징을 갖는다. 1천 년이라는 거대한 시간 단위의 바뀜이 불과 사백 일도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밀레니엄 시계를 보며 98년의 문화는 사실상 20세기 마지막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IMF 한파로 문화활동 위축
이러한 거창한 뜻에 견주어 98년은 IMF라는 말로 상징되는 경제대란 속에 출발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시련이라는 경제위기는 일찍이 경험하거나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국민소득이 1만 불대에서 6천 달러대로 곤두박질쳐 십 년 전으로 후퇴하고 실업자가 이백만 명에 달하는 경제환경은 문화활동의 급속한 위축으로 이어졌다.
각종 조사기관에서 98년 상반기 개인 문화활동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와 견주어 개인의 문화활동이 크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화 관광부가 이번 국정감사에 제출한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현황’ 을 보면 기업의 지원도 크게 줄었다.
이 것은 많은 기업이 IMF 체제 이후 직면한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구조조정 등 자구노력에 치중하느라 다른 부문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리 경제난이 하반기 들어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한동안 침체될 것이라는 전망을 감안하면 앞으로 많은 기간 동안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이 나아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전반적인 경제위기 속에 자생능력이 취약한, 곧 기업 등 외부로부터의 지원 없이 정상적인 문화활동을 하기 어려운 척박한 우리 문화환경에서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개방과 새로운 모색
총체적인 경제위기 속에 보인 주목할 만한 98년도 문화현상은 일본문화 개방, 공중파 방송의 북한영화 방영, 문학부문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 출판계의 체질 약화 등을 꼽을 수 있다.
98년도 문화계 최대의 화제는 단연 일본문화개방을 들 수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삼십삼 년만에 그리고 해외 문화에 대한 마지막 빗장을 연 것이다. 일본문화 개방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찬반논란이 거듭되어 왔다. 한일 간의 특수한 관계가 아직 진정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일본의 저질문화가 범람하고 새로운 문화식민지가 될 우려가 있다는 반대론과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개방만이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자국문화의 건강성을 높일 수 있으며 유독 일본문화만 예외로 삼음으로써 부작용이 더 많다는 찬성론의 오랜 대립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당위적으로 일본문화의 개방은 바람직하다. 급속한 일본문화의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영화, 만화 부문부터 차례로 점진적으로 개방하겠다는 방침 또한 옳은 결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란한 찬반론이 아니라 상호주의에 입각한 문화교류의 틀을 만드는 일이요, 아울러 올바로 문화를 수용해내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그런데 국내영화사들이 일본영화 수십 편을 앞다투어 수입계약을 맺었다는 소식, 한국의 기획자들은 일본문화 수입을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고 반대로 일본 기획자들은 직배시장을 노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는 신문기사, 그리고 앞으로 영화의 7~10퍼센트, 만화의 35퍼센트를 일본에 잠식당할 것이라는 전망 등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일본문화개방이 일본의 합법적인 시장확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향한 진정한 상호주의 문화교류로 발전할 수 있기 위한 우리의 자성과 준비가 요구된다 하겠다.
98년 또 하나의 충격은 북한영화 개방이다. 지난 9월 SBS에서 방영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와 KBS에서 10부작으로 방영한 ‘림꺽정’ 은 종래의 북한소식에서 부분적으로 편집, 소개하던 것과는 달리 전편을 내보낸 것으로 남북문화교류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새정부의 햇볕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순수예술영화의 상업적인 국내 상영이 허용된 것이라고는 하나 공중파에서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북한영화 전편을 보여 준 것은 고식적인 북한관을 수정하고 남북간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불가사리’, ‘꽃파는 처녀’ 등 북한 영상물이 텔레비전과 극장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북한영화 판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화사들의 이전투구식 싸움과 정부당국의 모호한 태도는 모처럼 조성된 북한문화 이해와 교류에 악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가장 빠르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모색한 부문은 문학이었다. 9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000년을 여는 젊은 작가 포럼’ 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한국문학의 진로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황지우, 이인성, 임철우, 신경숙, 유하, 김영하 등 문학계의 20~40대의 대표적인 시인, 소설가, 평론가 사십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21세기 문학은 무엇인가’ 를 화두話頭로 다양한 문학담론을 쏟아낸 장이 된 이번 포럼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변화된 역사적 소임이 새로운 주체에게 이월되어 새로운 형식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 는 차원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또한 형식면에서도 작가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논의의 틀을 제공한 자리였다.
이에 견주어 출판가는 사상 최악의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잇따른 대형도매상의 부도로 본격화된 위기는 경제위축과 장기불황에 따른 판매량 감소, 우량 스테디셀러의 실종 그리고 출판사의 흥행을 노린 상업출판 등의 악순환을 낳았다. 이 같은 현상은 근본적인 출판계의 체질약화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 지식산업의 인프라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98년 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른 진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IMF 경제위기로 전반적인 침체나 위기감에 싸여 있는 가운데 과감한 문화개방정책이 두드러졌고 문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 비전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돋보인 한해였다고 종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울러 바람직한 일은 문화의 시대라 일컫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문화가 곧 기간基幹 인프라라는 인식이 형성,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