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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국 사회의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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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유승무 1998년 12월 202호
유승무/중앙승가대학 포교사회학과 교수

IMF라는 달갑지 않은 단어와 함께 새해를 맞은 1998년 한국 사회는 일년 내내 그 단어의 폭력 속에 시달린 한해였다. 그 단어의 폭력은 비단 정치경제적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심리적 차원에서부터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무자비하게 파고들면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 사회는 각 세력들 사이의 갈등과 혼란, 위기의식, 실업문제, 가족해체, 범죄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IMF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진단해 보고, IMF 시대의 불교적 지혜를 덧붙이고자 한다.
IMF의 가장 처음 충격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지난해 말 IMF 사절단이 그들의 요구조건을 그 때 정부 당국자는 물론 대통령 후보자들에게까지 철저하게 강요한 사실을 목도한 우리는 국민 자존심의 끝없는 나락은 물론 수치심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IN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그들의 요구조건에 동의하는 모습은 너무나 처절하여 마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듯했고, 우리 국민은 졸지에 IMF에 구걸하는 거지신세로 전락한 듯한 자괴감에 젖어 들었다.
1997년 중반까지 한국사회는 ‘희망의 나라’ 였다. 국민소득 ‘1만 불 시대’ 니 ‘세계 11대 경제대국’ 이니 ‘OECD 회원가입국’ 이니 하는 자축의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휩쓸고 국민들은 너나없이 신바람 나게 해외여행을 다녔다. 이러한 사회심리적 상황 속에서 IMF에게 한국 거시경제의 관리 및 운영권을 저당잡히는 모습은 단순한 심리적 쇼크 이상이었다. 기대와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상실감,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국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IMF의 폭력을 경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IMF는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철저히 관철시킨 다음에야 구제금융을 빌려 주기 시작했는데, 그 요구조건의 핵심은 한국의 경제구조개혁이었다. 다시 말하면, 재벌개혁 및 금융개혁, 상품시장 및 금융시장의 개방,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통한 경제구조 개혁이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IMF의 요구와 그 이행은 다음과 같은 정치경제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선진국과 한국의 관계가 중심국과 주변국의 관계로 재편됨을 뜻한다. IMF가 미국을 필두로 한 세계체제 중심국의 정치 경제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IMF와 한국의 관계는 중심국과 주변국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의 재형성에 다름 아니다. 둘째, 그러나 이의 관철은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재편 음모에 따른 것으로 국내적으로는 재벌과 정부의 갈등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갈등은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발전모델, 곧 국가와 재벌 사이의 연결고리(정경유착)를 단절하는 긍정적인 요인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발전모델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예컨대 각종 규제완화 조치를 포함한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그 동안의 규제 속에 보호되어 왔던 수많은 영역을 무장 해제 시킴으로써 외국자본이 마음대로 침투하고, 일본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유해산업이 범람하는 등 당분간 우리 사회는 통제불능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IMF의 세 가지 요구는 상승작용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았고 이는 또 다시 노사 갈등의 불씨가 되어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재벌해체와 금융개혁은 대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중산층 노동자를 실업자로 전락시켰으며, 연쇄적으로 중소기업들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하층 노동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동시에 광범위한 실업자 층이라는 새로운 층(최하층)이 뚜렷하게 형성되면서 계층사다리가 변화했다. 게다가 이렇듯 폭주하는 실업은 사회적 안정망이 구축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그 위험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IMF의 폭력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국민의 일상적인 경제생활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들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서 돌출하고 있다. 먼저, 가장의 실업은 가족의 위기 또는 가족 해체로 곧바로 이어졌다. 가족동반자살, 이혼,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출 등 결손가정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홈리스(노숙자)가 주요 사회문제로 부각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범죄문제의 폭증과 연결된다. 청소년비행이 날로 증가하며, 강도 등 폭력범죄가 날마다 매스미디어를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향락산업이 날로 번창하고 마약사범이 늘어나는 등 한국인의 정신적 위기 징후들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문제는 일부 공무원과 결탁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의 사정작업 결과 정치인, 경제인, 군인, 경찰, 하급 공무원, 그리고 교육자 등 그 동안 숨겨져 왔던 화이트칼라 범죄가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가 백일 하에 폭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규범의 붕괴를 동반하면서 우리 사회를 아노미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결국 1998년 한국 사회야말로 오탁五濁 가운데 명탁命濁을 제외한 사탁四濁을 가진 사회이다. 생산수준에 견주어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아 실업이 발생하니 겁탁劫濁이요, 아노미 상태로 치달으니 견탁見濁이요, 탐진치를 더욱 조장하여 마침내 범죄나 마약으로 귀결되니 번뇌탁煩惱濁이요, 사회갈등이 심화되고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으니 중생탁衆生濁이다. 다만 의학 발달로 명탁命濁만 간신히 면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불교는 명탁을 포함해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인 예토穢土를 정토淨土로 만들어 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종교이다. 이러한 오탁악세에 굴복하거나 이를 도피하거나 외면하는 그 누구도 진정한 불제자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고 하셨다. 진정한 불제자라면 이 땅, 예토를 진정한 정토로 만들기 위해 예토에서부터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해서 끝내 일어서야 할 것이다. 편법이나 요행, 그리고 허무맹랑한 신에게 의존해서가 아니라 ‘무소의 뿔처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