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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목소리, 방황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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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손혁재 1998년 12월 202호
손혁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절망과 기대가 엇갈리면서 밝았던 98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경제의 실패, 국가의 실패로 말미암아 IMF 신탁통치 체제에서 맞이한 98년의 앞길은 온통 잿빛 안개로 뒤덮여 있엇다. 그러나 그 음울한 안개를 뚫고 비치는 한 줄기 작은 불빛은 오십 년 만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개혁적인 지도자를 앞장세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였다.
올해 우리 사회의 가장 커다란 과제는 경제위기 극복이었다. 이는 단순히 IMF 경제신탁통치를 벗어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발전을 모색하는 과제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체제와 운영원리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권은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주의의 틀을 형성해야 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개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여부는 사회경제적 개혁추진을 위한 정치 조건 형성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무엇보다도 구조조정을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지금의 위기에 정치권이 가장 큰 책임이 있고 또 솔선수범한다는 의미에서도 정치개혁은 필수 과제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치권의 구조조정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치 개혁이란 상황 변화에 맞추어 정치권이 탈바꿈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올해 이루어진 정치개혁 논의의 요체는 정치 부문의 경쟁력 강화, 생산성 향상이다. 정치권 구조조정을 효율성과 경제성의 논리로만 접근하는 듯한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 실종, 민주주의 포기사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구조조정이 단순히 규모를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정치개혁을 정치권에게만 맡긴 것도 문제였다. 노사정위원회가 IMF 극복을 위한 대타협을 이끌어냈듯이 정치개혁도 국민과 함께 추진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정치권에만 맡겼으니 아무 성과가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올해 정치권은 새롭게 태어나기는커녕 낡은 정치의 추악한 모습만 보여 주었다. 국회는 헛돌았으며, 정치 현안을 둘러싸고 여야가 팽팽하게 맞서 국정운영을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6.4 지방선거와 몇 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는 지역감정과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렸을 뿐이다.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는 말만 풍성할 뿐, 그나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았던 터에 정치가 제 구실을 못하자 국민소환제 주장이 나오고 국회의원들을 고발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개혁의 목소리는 높았으되, 단 하나의 개혁도 이루지 못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비틀거린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른바 DJP라고 하는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에 의해 탄생한 소수파 정부인 김대중 정부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력 기반을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권력 기반 형성 과정에서 IMF 관리체제, 기득권 세력의 저항, 여소야대 의회의 개혁 방해, 정권 교체 뒤에 약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깨고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는 지역주의 등의 장애물을 넘겼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뚜렷한 개혁의 청사진이 없었고, 개혁 주체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의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새 정부 출범 육 개월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여대야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2월부터 9월초까지 여당에 입당한 의원은 모두 서른 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긴 사람은 스물두 명(국민회의 열네 명, 자민련 여덟 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 9월 8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의석은 각각 백한 석과 쉬흔두 석으로 늘어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대선 직전에 생겼던 국민신당이 국민회의에 합쳐졌다. 이 같은 의원 빼가기를 여권은 정계 개편이라 주장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발목잡기로 인해 정치개혁의 성과가 없었고 이에 따라 사회 전반의 개혁작업이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정계개편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국회가 경제 위기 극복의 커다란 장애물이었다는 주장은 타당한 면이 있다. 개혁작업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개혁을 뒷받침하는 것이 국회의 임무였다. 그러나 행정조직 개편과 총리 임명 동의 과정에서 보여 준 것처럼 거대 야당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여소야대 국회가 개혁의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국정 실패와 경제 실패에 대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고, 또 야당으로서의 입지도 제대로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 작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여소야대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여야의 정치력 부족이 더 큰 문제이다. 더구나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바꾼 의원들 거의 대부분이 도덕성이나 능력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과연 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것인지 의심스럽다.
대선 실패로 권력에서 물러난 한나라당은 새롭게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새 지도부의 통합적 지도력이 의심스럽고, 또 계파간의 갈등이 여전히 야당으로서의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북풍이나 세풍, 또는 총풍에서 드러나듯이 최소한의 정치적 도덕성 마저도 상실한 한나라당은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쪼개질 가능성도 늘 안고 있다.
97년 막바지에 대통령에 당선돼 부도난 나라 살림을 떠맡은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를 함께 발전시키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정부 출범 초기에 외채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위기 관리 능력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아직도 잿빛 안개는 우리 사회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다. 98년에 못 다한 정치 개혁의 과제는 99년으로 넘어갔다. 99년에도 정치개혁에 실패한다면 우리 정치의 앞날은 없다. 안개가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비칠 그 날은 과연 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