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대로 표기한 말
만년필 회사인 ‘파카’ 를 ‘파극派克’ 이라고 하거나 모터사이클 곧 오토바이를 ‘마탁摩托’ 하는 것들은 거의 소리 번역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딜 가도 보울링장은 있다. 오뚜기 같이 생긴 보울링 핀그림을 보고 ‘보령保齡’ 이 ‘보울링’ 이라는 말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적사的士’ 는 택시를 말하고 ‘파사巴士’ 는 버스를 가리키는데 음역을 취함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같은 탈 것이라고 뒤를 ‘사士’ 자로 통일해 놓은 것이 여간 지혜롭지 않다. 누가 신문을 사왔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 사진이 있는 걸로 봐서 그 양반에 대한 기사인 모양이다. ‘극림돈克林頓’ 이란 말을 보니 클린턴임을 알겠다. 또 만화책도 덤으로 한 권 사왔다. 제목이 ‘유묵대사幽黙大師’ 였다. 손오공과 현장스님 이야기쯤 되나 보다 하고 펼쳤더니 스님이 주인공인 만화컷이 아니었다. 웃기는 짧은 이야기를 만화로 모아 놓은 것이었다. ‘유묵幽黙’ 은 ‘유우머’ 의 번역어였다.
소리도 살리면서 뜻을 가미한 말
커피를 ‘가배咖俳’ 라고 하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사용하는 커피프림은 ‘가배반려咖俳伴侶’ 라고 해 놓았다. 무조건 소리 번역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소리 번역과 뜻번역의 합성어인 셈이다. 맥주는 원료가 호프 보리라고 하여 우리는 ‘맥주麥酒’ 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비어beer의 소리인 ‘비啤’ 와 술이라는 뜻인 ‘주酒’ 를 합하여 ‘비주啤酒’라고 불렀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 번역어는 이렇게도 다르게 나오니 이것도 민족성의 차이인가 보다. 코카콜라는 ‘가구가락可口可樂’ 이라고 함은 익히 아는 일이다. 입에 넣기만 하면 가히 즐겁다는 뜻일 것이다. 소리도 살리고 뜻도 살리는 명번역이다. 펩시콜라 번역도 그 못지 않다. 모든 일(백 가지 일)이 다 즐겁다는 ‘백사가락百事可樂’ 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광고 언어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컴퓨터 침입자 ‘해커’ 도 번역은 해야 한다. 뜻도 살리고 소리도 살리는 ‘흑객黑客’ 으로 낙찰지었다. 컴퓨터 용어와 무협지 용어도 때로는 필요에 따라 서로 이렇게 합쳐질 수도 있다.
뜻으로 번역한 오해하기 쉬운 아름다운 말
시멘트의 번역인 ‘수니水泥’ 는 콘크리트나 레미콘의 뒤범벅을 연상하면 그 뜻이 바로 드러난다. ‘수도隧道’ 는 터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국타이어, 금호타이어 대리점도 곳곳에 보인다. 현대나 대우 자동차를 어쩌다가 만나면 괜히 반가웠다.
타이어는 ‘윤태輪胎’ 라고 하고 밧데리는 ‘전병電甁’ 이라고 한다.
또 오해하기 쉬운 말도 있다. 곧 우리와 용례를 달리하는 말들이다. 일반 자동차들을 ‘기차氣車’ 라고 했다. 우리가 기차라고 부르는 것은 ‘화차火車’ 라고 부른다. 텔레비전에 느닷없이 ‘신문新聞’ 이라는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각 일간지 기사를 요약해 주는 시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말하는 뉴스를 ‘신문’ 이라고 하는 것이다.
표현이 순한 말도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차를 잘못 세워 두었다가 견인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벌금을 수월찮게 물고 찾아오는 기분은 별로다. 따라서 견인 곧 당겨서 끌고 간다는 견인차의 이미지는 별로 좋은 것이 못된다. 여기서는 견인차를 ‘청장차淸障車’ 라고 했다. ‘장애물을 깨끗이 치우는 차’ 라는 뜻이다. 견인차보다는 용어가 순해 보였다. ‘노인네’ 라는 말이 불경스럽다고 해서 요즈음 ‘어르신네’ 로 표기하기로 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이번 나들이에서 하나 제대로 건진 게 있다면 ‘엘리베이터’ 의 번역어이다. 너무도 고상한 ‘구름 사다리’, ‘구름계단’ 의 뜻인 ‘운제雲梯’ 이다. 이 말을 발견하고는 너무 좋아서 ‘와!’ 하고 감탄을 하면서 무릎을 쳤다. 이제까지 본 용어 가운데서는 최고의 명번역이었다. 포항 오어사吾魚寺가 있는 곳이 운제산雲梯山이다. 이 말을 보고서도 엘리베이터에다가 번역어로 바로 갖다 붙이지 못한 우리는 영어와 우리 글이 같은 소리문자라고 해서 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하다 못해 헬리콥터를 ‘헬기’ 라고 할 정도의 신경은 써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일상 용어들에 대한 번역 능력의 축적이 겨룩 경전 번역에 있어서 세련된 용어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일상용어 번역 능력과 경전용어 번역 능력은 결코 둘이 아니다. 현장 법사의 제자가 어디 따로 있는가!
삼어 법사가 되어야 한다
이번 여행의 대상지가 중국이라 필담으로 대충 의사소통을 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제대로 구사하는 외국어가 하나도 없어 창피했다. 영어, 일어, 중국어쯤은 국제화 시대에 그리고 불교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삼장三藏 법사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먼저 ‘삼어三語’ 가 더 선결문제인지도 모른다. 필담은 일상대화나 가능한 것이지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해上海 옥불사玉佛寺 앞 거지들도 우리를 보고는 한국말로 구걸을 청했다. 모르긴 해도 일본 스님들이 오면 또 일본말로, 인도나 티벳 승려들을 보면 영어로 적선을 청할 것이다. 한 스님이 그들 모두에게 골고루 한 푼씩 보시를 하고서는 버스 위에 올라 한마디 일렀다.
“거지도 국제 감각이 있어야 제대로 빌어 먹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