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수초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여하시如何是 불佛이니꼬?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삼서근이니라.”
이 삼서근 공안은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입을 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답박하여 전혀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인들은 부처에 대한 답변을 많이 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2500년 전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또는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다.’ ‘32상 80종호를 갖춘 분이다.’ 등이 그것입니다. 또 ‘마른 똥 막대기이니라.’ ‘여릉의 쌀값은 얼마인가?’ ‘호떡이니라’ 라고도 하였습니다. 동산스님은 ‘부처가 무엇이냐’ 고 묻자 ‘삼서근’ 이라고 대답하였으니 참으로 옛 사람의 혓바닥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 말씀입니다. 그 무렵 공부인들은 이 말 저 말을 둘러대면서 ‘그 때 동산스님이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이를 물었기에 이처럼 대답하였다’ 하기도 하고, 또는 동산스님이 ‘동문서답을 했다’ 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에 우회해서 답변하였다’ 하기도 합니다. 더욱 썩어빠진 놈들은 ‘이 삼서근이 바로 부처이다’ 하니 이는 전혀 얼토당토 맞지도 않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아승지겁의 세월 동안 참구하더라도 꿈에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말이란 도를 담는 그릇일 뿐인데 옛 사람의 뜻은 전혀 모르고 다만 말만 따지고 드니 어찌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실 도라고 하는 것은 본디 말은 아니지만 말로 말미암아 도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도를 깨닫고 난 뒤에는 말을 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알려면 결국 망정妄情, 육진六塵, 뜻, 망상妄想, 헤아림, 득실得失, 잘잘못을 한데 모아 일시에 말끔히 없애버린다면 자연히 알게 될 뿐, 별다른 기특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부처냐고 하는 물음에 삼서근이라고 대답하니 설두스님은 바로 알아듣고서는 ‘금까마귀 곧 해는 급히 날고, 옥토끼 곧 달은 빨리 달아난다’ 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설두스님은 핵심부분으로 사뿐히 가서는 살짝 드러내 깨우쳐 주고서도 ‘훌륭히 응수했으니 어찌 경솔하게 건드렸으랴’ 는 말을 스스로 덧붙였습니다.
어떤 스님이 설두선사의 은사이신 지문智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동산스님이 삼서근이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화족족花簇簇하고 금족족錦簇簇하니라. 꽃도 수북수북하고 비단도 수북수북하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남지죽南地竹 북지목北地木이니라. 남쪽 땅엔 대, 북쪽 지방은 나무이니라.”
스님이 되돌아와서 이를 동산스님에게 말씀드리자 동산스님은 “나는 그대에게 말하지 않고 대중에게 말하리라” 고 대답하고는 상당법문을 하였습니다.
“언무전사言無展事하고 어불투기語不投機니라. 승언자상承言者喪하고 체구자미滯句者迷니라. 말로써 현상적인 것 곧 사事를 말할 수 없고 말로써는 눈 앞에 당면한 문제를 딱맞게 설명할 수는 없다. 말을 따르는 자는 죽게 되고 구절에 얽매이는 자는 죽게 된다.”
설두스님은 노파심이 간절하여 그들의 의심덩어리를 타파해 주고자 또 한마디 군더더기를 덧붙였습니다. 장경스님과 육긍대부의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육긍대부는 남전스님 회상에서 공부를 하여 견처가 열린 거사입니다. 육긍대사가 남전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옛 사람이 병 속에다가 거위 한 마리를 길렀는데 거위가 점점 커져 나오지 못합니다. 병을 깨뜨릴 수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 꺼낼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으로 깨달음을 얻은 인연을 가진 사람입니다. 선주宣州 땅의 관찰사로 있을 때 남전스님이 열반하셨다는 부고를 받고는 절에 들어가 재齋를 지내다가 갑자기 껄껄대며 큰소리로 웃으니 원주스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스님과 대부와는 사제지간인데 어찌하여 통곡하지 않습니까?”
“원주스님께서는 무슨 말이든지 한마디 해 보십시오. 그러면 크게 곡을 하겠습니다.”
이에 원주스님은 그만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육긍대부는 “아이고! 아이고! 스님께서 열반하셨구나.” 하면서 크게 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장경長慶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서는 말하였습니다.
“대부는 웃었어야지 결코 통곡해서는 안 된다.”
설두스님은 이에 또 말하였습니다.
“그대가 이렇게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참으로 웃어야지 통곡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실 웃음이나 울음이나 조문을 하는 것은 한 가지 이치입니다. 웃으면서 남전스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나 통곡하면서 남전스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결국 생사가 없는 이치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하!’ 하고 웃는 것과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우는 것의 무게는 달아 보면 두 가지 모두가 같은 눈금을 가리킬 것입니다.
금오급옥토속金烏急玉兎束하니
선응하증유경촉善應何曾有輕觸이리오.
전사투기견동산展事投機見洞山하니
파별맹구입공곡跛虌盲龜入空谷이로다.
화족족 금족족花簇簇 錦簇簇하고
남지죽혜 북지목南地竹兮 北地木이로다.
인사장경육대부因思長慶陸大夫가
해도합소불합곡解道合笑不合哭이로다.
금까마귀는 급히 날고 옥토끼는 빨리 달아나네.
훌륭하게 응수했으니 어찌 경솔하게 건드렸으랴.
현상적인 것을 예로 들어서 상대방을 깨우쳤다고 동산을 이해한다면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이가 빈 골짜기로 들어가는 꼴일세.
꽃도 수북수북 비단도 수북수북
남쪽에 대요 북쪽에 나무로다.
그리하여 장경스님과 육긍대부를 생각하노니
마땅히 웃어야지 통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구나.
억(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