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내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늘 따라붙고 있었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떤 통로를 통해풀고자 했으므로 나는 자연스레 종교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 나이 갓 스물이 넘어 있던 어느날이었을 게다. 무작정 짐을 꾸려 완행열차를 타고 가다 하동에서 내렸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쌍계사. 첫새벽에 도착해 법당에서 과일공양을 올리고 있던 한 스님의 모습과 함께 그너머 법당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앉은 부처님의 모습을 보니, ‘평화’ 라는 단어를 형상화시킬 수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친구가 불교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나를 절이며 법회에 데리고 다녔으나 한번도 법당에 들어가 보지 않았고 부처님의 얼굴을 제대로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터였다. 웬지 마음속으로부터 다가서게 못하는 벽 같은 것을 허물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처음 올려다 본 부처님의 모습은 지혜와 평화를 온전히 담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로소 언젠가부터 꾸준히 내 정신을 지배하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생사를 초월할 수 있다는 불교에 흡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뒷날 내 출가 본사가 된 쌍계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쌍계사에서 내려와 지리산 세석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나를 불교로 이끌려고 애쓰던 친구를 불러내 다짜고짜 물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봐라.” 나는 다급한 마음이었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품고 있는 듯한 불교를 어서 빨리 알고 싶었다. 무엇인가, 생사마저도 뛰어넘는다는 저 불교는, 그리고 저 평화를 내뿜고 있던 부처의 모습은. 긴설명도 필요없고 한마디로 말하라는 내 주문이 황당도 했을 터인데 친구는 당황하지 않고 짧게 한마디만 했다.
“옴마니밤메훔” 진언을 일 주이만 염송해라 그러면 불교를 알 수 있다. 두 말 않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가 시키는대로 했으나 도통 불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는 다시 ‘준제진언’ 을 염송하라고 햇으나 더더욱 오리무중이었다. 그러자 친구는 마지막으로 ‘지장경’ 한 권을 내놓으며 “날마다 한 번씩 백 일만 읽어보라” 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지장경’ 독송을 필두로 한 해쯤 기도를 했다. 팔공산 갖바위에서 밤새도록 기도를 하기도 했고,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기도를 하며 내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불생불멸’ 에의 물음을 풀고자 했다. 한 해 동안 기도를 하고 나서 출가를 해 본격적으로 부처님에 대해 바로 알아야겠다는 발심이 들어 곧바로 출가를 했고, 구도에의 첫걸음을 쌍계사 행자시절로부터 내딛었다.
행자시절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곤욕을 치루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쌍계사에서 보낸 행자시절 열 달 동안 여러 차례 살을 베곤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잠이 채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양간에 들어가 칼질을 하다가 섬뜩해서 보면 손톱이 반쯤은 잘려 있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설거지를 하고 손을 잘 간수하지 못해 손등이 쩍쩍 갈라져 보다 못한 나이 많은 신도들이 바세린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늘 바쁘고 고단한 나날이었으나 마음이 맞는 행자와 밤늦도록 불교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수행자의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새벽 쇳종소리가 울렸으니 신심으로 빛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늦도록 불교에 대해 토론을 벌이다 보니 출출한 생각이 들었다. 한참 나이인 데나가 저녁공양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같이 격론을 벌이던 행자와 함께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물론 제 시간에 잠을 자야 하고 밤참 먹는 것 또한 금지된 사항이었으나, 젊은 혈기에 우린 밤참 먹는 것을 감행하고 말았다. 얼큰하게 끓여진 라면을 게눈 감추듯이 먹었는데, 그날 밤 먹은 라면맛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렇게 기막힌 라면을 먹고 잠깐 눈을 부치고 아침공양을 준비하려고 공양간에 나와 쓰레기통에 얌전히 꽂혀 있던 라면 봉지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아뿔사 그 라면의 이름이 하필이면 ‘소고기라면’ 이 아닌가. 그 라면에 소고기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절집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큰죄가 아니던가. 누가 본 것도 아니요, 그냥 봉투만 가져다 버리면 끝날 일이었으나 신심 하나로 버티던 그 시절, 차마 우린 그러지 못했다. 참회, 그것뿐이었다. 우린 그 날 하루일과를 마치고 자청해서 밤새도록 참회기도를 했다. 아, 삼천배를 마치고 법당 밖에서 올려다 본 새벽별, 그리고 숲을 뒤흔들고 지나가던 바람소리. 나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환희로움 속에서 오랫동안 절 앞마당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행자시절부터 출가자가 지켜야 할 선을 나름대로 뚜렷이 그어 놓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은 물론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까지 간섭 아닌 간섭이 되어 적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여 그러함을 자신에게만 국한시키는 쪽으로 선회했다. 예전부터 내가 그어 놓은 선이 얼마나 강했던지 사형 한 분이 ‘강하면 부러진다’ 는 충고를 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많이 유연해졌다는 말을 듣고 있으나 그것이 다소 해이함으로 흐를까 경계하고 있는 터이다.
행자시절이 끝나갈 무렵, 하루는 내 은사 스님이 되시는 고산 큰스님께서 부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옛 어른들은 제자에게 수계를 할 때쯤이면 당신의 방문턱에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놓아두고 행자를 불렀다. 턱이 낮은 곳에 대야를 두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조심하지 않으면 텀벙 발이 빠지기 십상인데 발을 빠뜨리는 날이면 행자생활이 육 개월 더 연장되곤 했다. 너는 통과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급한 상황에서도 조심성 있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때론 스님께선 지나가는 나를 불러 채소를 씻는 법이며, 된장국 끓이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곤 했었다.
옛날처럼 세숫대야 시험을 치르지 않고 계를 받고 어느덧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혹 누군가 묻기도 한다. ‘얼마쯤 왔느냐’ 고. 행자시절 그 가을, 낙엽을 깔고 앉아 생사초탈에의 물음 하나로 참선에 몰입해 있던 그때로부터 얼마만큼 왔는가. 온 만큼은 보이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지는 모를 일이다.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