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흔히 홈리스homeless라고 불리는 문제가 닥쳐왔다. 그것도 경기침체가 심해 사회적 흡수력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갑자기 터졌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무방비와 폭발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무방비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제도적인 것이고 폭발성은 경기침체와 같은 경제 영역이다.
한구겡서 노숙자라고 불리는 이들 문제는 서구의 모형과 다른 점이 많다. 발생 배경에서 보듯이 경기 침체기에 흔히 야기되는 실업 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점은 같으나 실제 진행 과정은 전혀 다르다. 원칙적으로 한국은 서구와 달리 정부와 사회단체들이 앞장서 “실업이 해결되면 노숙자 문제도 자동 해결된다” 는 편의적 사고에 빠져버린 이차적인 문제가 더 크다. 결국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한국형 노숙자 문제의 악화 속도는 다른 어느 국가의 경우보다 빠르다.
실업으로 인해 노숙자가 생겨났다고 해도 고용 증대로 노숙자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안정을 도모하는 것은 실업정책이지 노숙자정책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실업정책과 노숙자정책은 저마다 다른 행정부 소관이다. 실업은 노동부에서 ‘안정성 고용과 산업정책’ 쪽에서 전담하고 노숙자는 사회복지 영역이면서 교육, 의료 쪽에 가깝다. 또한 산업은 중앙정부가 담당하고 노숙자는 지방정부가 맡고 있다. 한국과 경제 발전 모형이 비슷한 일본도 이들 정책과 집행방식은 미국과 같다.
단지 다른 것은 노숙자 문제가 미국은 전국 주요 도시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일본은 국제화된 수도 도쿄와 대형 항구도시 등에 한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유럽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사회주의 정권이 존재하는 관계도 있지만, 사회복지제도가 발달돼 있어 노숙자 문제는 불법이민자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것은 중앙정부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정당 정책 고유의 몫이다.
우리나라는 서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부산, 대전 등 5대 도시에 걸쳐 노숙자들의 분포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정부의 집계로는 10월 현재 삼천삼백 명쯤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직업별로는 건설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가 주종이다. 그 밖에는 서비스업종이다. 따라서 경기 부양이 선행되지 않으면 노숙자의 고용은 요원하다. 소위 공공근로에 의한 방식도 일시적이기 때문에 노숙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곧 일시적인 일당제에 의존해서는 주거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형은 정책 방향 설정이 정부의 몫이며 시설과 운용에 필요한 재정은 지방정부에서 담당하고, 시설운용과 상담 부분을 민간단체에 위탁하는 3단계 체제를 취하고 있다. 이 방식은 80년대의 부랑인 수용시설 운용방식과 비슷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강제수용과 자율수용이라는 차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접근방법에서는 늘상 강제수용의 성격을 둘러싸고 시비가 붙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여기에 걸려든 것이 조계종이다. 조계종 복지재단이 서울시에서 위탁받아 운영하는 서울시립 영등포 합숙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보도를 내보낸 MBC의 ‘PD수첩’ (10월 13일 방영)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수용시설에서의 노숙자들 문제를 접근하는 과정에서 ‘강제수용방식’ 을 택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영등포합숙소를 꼽았다.
여기에서 ‘강제’ 는 정부가 의도하는 정책 방향에 조계종이 무비판적으로 끌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정부는 합숙소를 공공근로 사업에 노숙자들을 끌어들이는 ‘수단’ 으로 삼고 있으며, 정책의 주된 관심사는 ‘공공사업의 운영을 사회문제 해소와 직결시켜 행정효율을 높이겠다’ 는 것이다. 곧 노숙자의 수치를 줄여나가는 것이 정책 목표가 되며, 노숙자의 내면적 문제 해결과 정책은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다. 영등포합숙소는 “잠은 재워 주되 낮에는 강제 퇴거시켜 일자리를 찾게 만든다” 는 운영원칙을 앞세웠으나, 이 원칙은 강제수용과 다를 바 없고 정부의 고정된 정책 방향에 따른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조계종의 노숙자정책이 정부시각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문제는 공공근로 유인이라는 목표는 정부정책이지 종단의 목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종단 복지정책이 정부 복지정책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면, 노숙자 문제에 있어 수용과 재활을 구분치 못할 경우 곧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만든다는 점도 있다. 정부정책의 모순에 따른 폐단을 뒤집어쓴다는 것이다.
외국의 종교관련 복지시설들이 통상적으로 지방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규모면에서도 소형전문화를 지향하는 까닭도, 사실은 정부와의 거리 유지가 종교적 특성을 지니면서 사회복지의 효율성을 높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는 수용보다는 재활에 더 치중하고 있다.
쉽게 말해 재활의 가치가 입증됨으로써 노숙자의 ‘자율수용’ 이 보장받는 것이다. 정부 쪽은 당연히 수용이 중요가치이고, 수용에 급급함으로써 기본 개념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적절한 예가 유럽의 난민 수용소다. 이 때 정부는 수용이 목적이고 그 범주 안에서 강제수용자의 일시 거주 기간 동안 인권유린을 막고 생활의 안정을 위해 종교단체들이 개입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종교가 직접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 판단이 먼저다. 곧 재활이 일차 목표가 되어야 하며, 고용 창출에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예비단계로서 재활 교육을 먼저해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흔히 신흥 사이비 종교들이 저지르는 폐단에서 보듯, ‘재활 교육을 빙자해 노동력을 착취’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도시 노숙자 시설은 “수용 규칙이 까다롭다” 는 비판과 과련, 정부의 수용중시주의를 그대로 편승하는 것은 비불교적이다. 영등포복지관에서 터진 이 문제는 ‘아침 8시 강제 퇴실과 저녁 8시 입실’ 이라는 원칙을 앞세워 “관리가 어렵고 사고 위험이 있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는 조계종측 해명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는 오히려 “불교는 정부 업무를 대행할 뿐이다” 는 말과 같다.
이것 역시 재활 중시의 입장에서 종단은 재활 프로그램을 현실에 맞게 계발하여, 정부와 공동으로 출자한 시설에서 이를 실험해 객관적으로 효용성을 인정받는 종책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한국형 노숙자는 엄밀히 따져 ‘개인 파산’ 이라는 경기 침체의 한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다. 과거 중공업 단계에서의 경기 침체와 달리, 금융에 대한 비중이 높아지면서 개인이 그 한계를 넘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 이에 따라 외국과 달리 난민도 아니면서 ‘가족 노숙자’ 가 생겨났다.
이는 개인으로는 결코 소속된 산업구조를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도시 노동자가 파산했다고 하여 귀향(귀농)을 곧바로 단행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정보화 업무 종사자가 중공업 노동자로 변신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금융 서비스업 실직자에게 창업 경영자가 되라는 요구도 불가능하다. 또 농어촌에도 개인 파산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농업이 도시 노숙자의 귀의처가 될 수 없다.
이런 단절 현상은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금융의 족쇄’ 에서 빚어진 구조적 장벽이기 때문에 정부는 정책으로 이를 시행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종단이 이에 직접 끼어드는 것은 정부의 하급기관화를 재촉하여 불행한 사태를 겪게 만든다.
사찰은 ‘작은 규모의 일시적 수용’ 에 적합하면서 동시에 효율적인 ‘재활 프로그램 개발’ 을 공개 실험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런 실험을 통해 불교도 사회에 기여하게 되며 종단도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