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한국불교 속의 성철 큰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주경 1998년 11월 201호
주경/수덕사

불교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뒤로 스님들에 의해 그 맥이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스님들 없이는 그 맥을 이을 수 없다. 비록 한국불교가 대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어 거사 보살의 재가신자의 깨달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불교 법맥의 이어짐은 스님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은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불교국가인 태국과 스리랑카도 승단이 소멸함으로 인해 한때 불교가 맥이 끊기게 된 것을 서로 스님들을 모셔다가 계단을 설치하여 수계식을 거행하여 승단을 부활시킴으로 다시 그 맥을 잇게 되었고, 인도의 불교부흥운동의 선구자인 암베드카르 박사는 자신이 계를 주어 불교신자를 만들어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승단이 없음으로 해서 인도의 불교는 아직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불교는 조선 오 년 억압의 결과 사찰은 퇴락하고 승단의 기운이 쇠락해졌다. 그 맥이 끊어지려고 할 무렵 한말 경허스님이란 걸출한 선사가 출현하여 다시 승풍을 진작시키고 전국에 선원을 재건하여 한국불교를 중흥하였다. 그의 제자 만공스님은 덕숭산에서 일제의 불교 왜색화에 맞서 우리 불교의 순수성을 지켜왔다. 해방 뒤 한국불교는 정화운동이란 명분으로 비구와 대처간에 끝없는 분쟁과 조계종 내의 종권 다툼으로 힘을 소진시켰다. 이로 인해 불교종단과 스님들의 위상은 말할 수 없이 추락되어 있었다. 여기에 쿠데타를 주동한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980년 10월 27일 법란은 세속 권력에 의한 종교 정화라는 한국불교 최대의 치욕적인 상처를 남겼다.
이와같이 안팎으로 한국불교가 차츰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들어 가던 시기에 종정으로 모신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었다. 스님은 “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 며 조계종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셨다. 세간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산중에만 계시던 스님은 취임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으시고 취임법어로 대신하였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니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겟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법문은 지금도 ‘산은 산 물은 물이다’ 는 법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종정 안 한다는 말만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신 스님은 1991년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추대되어 입적하시기까지 끝내 산을 내려오시지 않으셨다.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스님의 팔 년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과 파계사 성전암에서 철망을 두르고 십 년 동안 한번도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신 일, 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전에서 삼천배를 해야 사람들을 만나 주었던 일은 스님의 출가인으로서의 일면을 보여 주는 일에 불과하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스님들에게 한국불교의 본 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불법을 바로 세우려는 스님들의 청정한 의지는 희양산 산자락에서 처음 태동된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 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이 이끈 봉암사 결사는 선종 본래의 종풍을 세우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였으니 이들 가운데 뒷날 두 명의 종정과 세 명의 총무원장이 배출되었다. 오늘 한국불교의 질서와 형식이 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 대중이 함께 지내는 데 필요한 규칙을 성철스님께서 만들어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 하였다.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 저마다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 물 긷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넷째, 소작인의 세조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당연히 청산한다. 다섯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여섯째,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일곱째,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엄금한다.로 철저하게 부처님의 계율정신과 조사 스님들의 수행생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불교정화 명분으로 비구 대처의 투쟁이 시작될 때 스님은 승려의 본분사를 먼저 생각하여 절 뺏기 식의 정화가 아니라 재산을 사회에 내 주고 걸식과 수행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스님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성전암에서 십 년 칩거에 들어가게 된다. 스님은 성전암 시절에도 신도를 위하여 기도법회 열기를 쉬지 않았다. 65년 성전암을 나오신 뒤 자운스님의 요청으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셔서 67년 해인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취임하셨다. 그 해 겨울, 성철 스님은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석을 열어 사부대중을 위하여 하루 두 시간씩 일백 일 동안 법석을 여셨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을 통해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 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스님은, 1967년 뒤로 삼십 년 동안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오셨다. 종정취임 뒤 많은 사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끝내 산을 내려오시지 않았다.
스님은 스님들이 알아 주어야 진정한 스님일 수 있다. 우리 현대불교사에서 권력을 지향한 권승들이 적지 않았고 명예를 추구한 명예승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출가인의 본분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그들의 권력과 명예도 또한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철저하게 승려 본분사에충실했던 성철스님은 혼란과 위기의 시기에 진정한 의지처가 되어 주셨고 승가의 지침을 보여 주셨다.
스님은 단순히 산을 지키고 당신의 수행만을 지켜 오신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전통의 맥을 지키고 이어온 것이다.
1993년 9월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됨으로 당신의 하실 일을 마치셨다. 그 뒤 두 달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 스님은 열반하였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져 가지만 오히려 더욱 그리워지고 절실해 지는 것이 있다. 성철 큰스님이 그렇다. 청정한 승풍이 사라지고 불조의 정맥이 흔들리는 지금, 큰스님은 더욱더 큰 산으로 떠오른다. 법을 잊고 수행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 위대한 영혼을 추모하는 진정한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큰스님, 한국 불교 속에서 그는 꺼지지 않는 큰 별로 언제나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