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좌는 걸망을 메고 선방을 찾을 때 한번 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한다. 인간적인 의무, 도리 같은 것은 산을 찾는 수좌의 발걸음에는 의미가 없다. 수좌가 찾아가는 그 곳은 인간의 자리가 끊어진 백척간두의 자리일 뿐이다. 깨달으면 살고 깨닫지 못하면 죽음뿐인 그 자리에서 인간 운운하는 것은 외딴 이야기일 뿐이다.
큰스님 스물아홉살 때, 금강산에서 공부하고 있는 스님을 찾아 산청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아득히 멀고도 먼 길을 일구월심 모정만을 안고 찾아온 어머니. 스승은 어미를 위해 그 때 처음 금강산을 구경했다. 금강산에 들어도 금강산 풍경보다는 화두에 철저했던 스님에게 금강산은 의미가 없었다. 깨치지 못한 자에게 다가오는 산세의 수려한 풍경이 스님에게는 허상과 미망에 다름 아니었다. 어머니가 오셨기에 구경할 수 있었던 금강산은 스님에겐 역시 그저 하나의 산이었다. 단 한마디의 감탄도 없이 다시 좌복에 앉으시는 스님의 모습 속에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절세의 수려한 풍경도, 하늘 끝 닿을 듯한 모정의 사무침도 그의 자리에서는 덧없는 무상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못된 것이 중되고 중 못된 것이 큰스님 된다는 말은 각이 크면 그만큼 원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님은 각이 큰 사람이었다. 그 큰 각으로 스님은 구도의 전정에 놓인 수많은 장애를 비정하리만치 쳐내셨다. 그토록 간절히 사무치던 모정마저도 깨달음이란 위대한 명제 아래서는 일고의 가치가 없었다. 사람이었기에 스스로 지녀야 했던 비애나 갈등을 향해 스님은 결코 눈 돌리지 않았다. 아픔이 클수록, 갈등이 가슴을 후빌수록 스님은 더욱 더 냉정하게 자신의 내부를 향해 날선 칼날을 대야만 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서 스님은 불교계에 큰스님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둥글고 큰 원이어서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주석하시며 해인사에는 큰 법석이 열렸다. 백일 동안 당신께서 수행해 오신 공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부대중에게 돌려 주는 자리였다. 그것은 마치 꽃비와도 같은 법음이었다. 그 곳에 모인 모든 대중은 큰스님의 법음을 들으며 불교의 물길을 찾아 목을 적셨고, 불타고 있는 자신의 무지를 잠재우고자 발원할 수 있었다. 백 일 동안의 법문, 그것은 선, 교의 구별없이 당신의 견해로 불교의 모든 것을 정리한 중도묘용의 끝없는 전개였다. 스님은 그 뒤에도 대중을 위한 법석 열기를 마다 하지 않으셨다. 스님들을 위해서 법문하셨고 교수와 대학생 그리고 그외 모든 계층의 사람을 위하여 법석을 펴는 일에 정성을 다하셨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샘. 각고의 세월을 이겨낸 스님의 수행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큰스님들은 선방의 수좌들을 향하여 언제나 책 보지 말고, 잠 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교敎를 버려야 비로소 선禪의 길에 들 수 있는 수좌들에게 스님의 말씀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량이나 분별로는 도의 궁극에 가 이를 수 없기에 수좌들에게 교란 버려야 할 뗏목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한 오매일여와 꿈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는 몽중일여를 강조하셨다. 화두를 듦에 간극이 없는 것을 성성하다 하고 그 때에야 비로소 공부인은 공부길에 올랐다 말할 수 있다고 하셨다. 화두를 듦에 그토록 치열하게 모범을 보이셨던 스님이기에 그 말씀은 공부하는 모든 수좌 스님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버려야 공부길에 오를 수 있듯이 이미 많은 공부를 성취하신 스님의 삶 또한 모든 것을 버린 것이었다. 삼십여 년을 단 한번도 산을 내려오지 않으시고 누더기 하나, 검정 고무신 하나로 스님은 생애 전부를 수행자의 면모로 일관하셨다. 부에 대해서도, 권력에 대해서도 언제나 당당하셨던 중은 최당당이라는 명제를 스님은 조금의 일탈도 없이 지켜 오신 분이셨다. 최고로 당당한 사람이 중이라는 그 중심에 성철 큰스님이 있었다. 수행자들은 큰스님의 수행을 통해 수행의 길을 보았고 많은 사람들은 큰스님의 아름다운 그늘 아래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엿볼 수 있었다.
수행자, 성철. 그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 그의 소탈한 모습이 떠오른다. 막무가내로 뱉어 내는 큰스님의 말씀이 고깝기보다는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소탈한 삶의 모습과 무관하지가 않다. 격이 없었기에, 누구에게나 거리를 두지 않았기에, 그리고 큰스님 자신이 모두를 똑같이 여길 수 있었기에 그의 막무가내식의 언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내가 느꼈던 것은 성철스님이 참 큰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큰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는 일상처럼 행했고, 큰사람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자유를 그는 날마다 보여주었다. 지나가는 학인을 붙들고 씨름을 한판 하자고도 했고, 비구니 스님들을 향해 너무 잘 해 먹지 말라고 농담처럼 꾸짖기도 했고, 또는 수좌들을 향해 밥벌레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죽비를 들고 사납게 경책하시던 그 모습은 큰스님이 획득한 자유의 모습이었다. 아무도 큰스님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고, 누구도 큰스님의 언사에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큰스님의 자유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구김이 없는 자유는 모두에게 난만하게 다가섰다. 우리는 큰스님의 모습을 통해서 도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었다.
큰스님은 또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은 분이셨다. 당신께 들어오는 모든 시주물은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잊지 않으셨다. 하루 두 끼의 무염식에 스물네 시간 정진하시는 큰스님이기에 세간의 욕심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청빈한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도의 길을 걷는 이의 자세라 믿었던 스님에게 시주물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대중 모두의 것이었고, 어렵고 소외 받은 자의 것이었다. 그 엄청난 사랑의 깊이는 깊은 깨침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언제나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그것은 더욱 더 값진 것이었다. 깨침의 끝에 자비심이 없다면 그 깨침은 얼마나 건조한 것이겠는가. 그리고 사랑 없는 도인 곁에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 하염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릴 수 있을까. 사랑은 깨침의 향기이다. 큰스님 곁에서 우리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코 끝에 전해오는 깨침의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큰스님 떠나신지 오 년. 이미 무상한 시간 속에서 무상을 깨달은 스님에게 떠난다는 말은 덧없다. 오고 감도 머뭄도 없는 그 자리가 큰스님의 자리였기에 그는 떠나도 떠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수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성철” 그 이름은 큰 강으로 흐르고 있다. 목이 마른 나무는 그 강으로 뿌리를 내리고, 하늘길 다니다 지친 별들은 그 강가에 내려와 얼굴을 씻고, 분노와 탐욕의 무명이 그 강에서는 덧없이 사라져 간다.
성철, 큰스님은 우리에게 그리운 이름 하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이름의 끝에서 다시 조여지는 걸망의 무게를 느낀다. 길을 떠나는 자에게, 영원을 찾아 미망을 버리는 자에게 큰스님은 언제나 그리운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