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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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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 정호승 1999년 07월 209호
지리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잠깐 내렸다가 그칠 눈이 아니었다. 눈은 처음에는 진눈깨비처럼 추적추적 내리다가 곧 함박눈이 되어 퍼붓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한 작은 암자에서 불경을 집필하고 있던 구곡 각운스님은 잠시 붓을 놓고 창을 열었다. 눈발이 바람을 타고 방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허허, 좀처럼 그칠 기세가 아니군?”
스님은 한참동안 퍼붓는 눈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눈은 몇 날 며칠 계속해서 내렸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끊어져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퍼렇게 히늘만 맑고 투명했다.
이제 스님은 이듬해 봄아 오고 눈이 녹아야만 바깥 출입을 할 수 있었다. 눈이 녹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스님은 공양할 쌀이 좀 남아 있는가 싶어 항아리를 열어 보았다. 항아리에는 썰어 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으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붓이었다. 해동이 될 때까지 지금 쓰고 있는 붓이 제 역할을 해 줄지 그게 걱정이었다.
붓은 털끝이 많이 닳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족제비 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을 몇 개 구해 꾸준히 사용해 왔으나, 그 동안 「염송설화」라는 불경을 스물아홉 권이나 집필한 까닭에 붓끝이 거의 다 닳아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서른번째 권을 집필하기에는 그리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으나 지금 다시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님은 이렇게 폭설이 내리고 길이 끊어질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산을 내려가 붓을 장만해 올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붓 걱정을 하며 삽을 들었다. 암자 앞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면서 암자 입구까지 길을 내었다. 암자입구 돌계단엔 폭설에 부러진 소나무 가지가 드러누워 있었다. 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소나무 가지를 한쪽으로 밀쳐 놓았다. 그러자 그때,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 조르르 스님한테 달려왔다.
“오, 너 왔구나, 폭설에 용케도 살아 남았구나.” 스님은 족제비를 안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족제비와 스님은 오랜 친구였다. 한번은 족제비가 독사 한 마리를 잡아먹다가 그만 실수로 온몸에 독이 퍼져 다 죽게 된 것을 스님이 약수와 약초로 해독을 시켜 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족제비는 늘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님,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족제비는 스님의 얼굴에 약간 근심스러운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좀 걱정이 되었다.
“아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단다.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날 찾아오너라.”
스님은 족제비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족제비는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님이 밤새워 불경을 집필하는 동안 암자 입구 계단 위에 앉아 늘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그런 어느 날 달밤이었다. 스님이 갑자기 밖으로 나와서 서성거렸다.
“허허, 이거 붓이 없어 어떡한다? 이제 조금만 더 쓰면 완결이 될 텐데. 허허, 이거 나의 불찰이야. 산을 내려갈 수도 없고…”
족제비는 스님이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벌써 몇 해째 암자에서 칩거하면서 「염송설회」를 집필하고 있는 스님으로서 이제 그 마지막 순간에 붓이 다 닳아 더 이상 집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밤, 족제비는 잠이 오지 않았다.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올 겨울엔 완성을 시켜야지” 하시던 스님의 말씀만 자꾸 떠올랐다.
그 동안 목숨을 구해 주신 스님의 은혜를 갚을 날만 기다려 온 족제비였다. 족제비는 드디어 그 날이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스님이 일어나 방문을 열자 방문 바로 앞에 족제비가 죽어 있었다. 댓돌를 위에 놓인 스님의 고무신에 자기의 긴 꼬리를 걸쳐 놓고 있었다.
“자기 꼬리로 황모필을 만들어 불경을 완성하라는 족제비의 거룩한 뜻이 담겨 있는 거야.”
스님은 족제비가 생명을 바쳐 자기 몸을 보시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스님은 주저하지 않고 두텁고 긴 족제비의 꼬리를 잘랐다. 족제비의 시체는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장사를 치러 줄 요량으로 눈 구덩이 속에 파묻어 두었다.
스님은 몇 번 황모필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먼저 족제비의 꼬리털을 쪄서 말린 다음, 재로 문질러 기름기를 빼내었다. 그리고 기름기를 뺀 털을 통 속께 넣어 원추형의 붓 털로 만든 다음, 붓털의 기부를 실로 동여매고 인두로 지져서 고정을 시키고. 그것을 다시 붓자루에 끼워 풀로 붙여 제대로 된 하나의 황모필을 만들었다.
족제비의 꼬리털로 몇 자루의 황모필이 만들어졌다. 스님은 그 붓으로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서른 권째를 마지막으로「염송설화」를 다 완성하자 철이 바뀌어 봄이 되었다.
마침 해동이 되어 산에는 눈이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스님은 눈이 녹아 땅바닥에 드러난 족제비의 시체를 소중히 거두어 다비를 해 주었다. 그런데 스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다비의 불길이 다 꺼지고 아침이 되자 아침 햇살에 영롱히 빛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리였다. 족제비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 것이다.
스님은 혹시 그 족제비가 부처님이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 숙여 합장 기도를 했다. 그리고 곧 사리탑을 세워 족제비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정성껏 안치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사리탑을 찾아가 볼 수 있다. 지리산 영원사 위쪽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다 보면 ‘상무주암’ 이라는 암자가 하나 나오는 데, 그 암자에 있는 삼층 석탑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