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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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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불굴 1999년 07월 209호
맑고 투명한 아침이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견공 아뇩이가 벌떡 일어나 반긴다. 몇 시간을 문 밖에서 꼼짝 않고 주인과 기도를 함께 하는 기특한 녀석이다. 모처럼 비가 내려서인지 앞산의 숲이 한층 더 푸르러 보인다. 오랜 적정寂靜에서 오는 잔잔한 선열禪悅 속에서 오랫동안 숲을 바라본다. 날마다 새롭게 맞는 조출한 행복이 사문에 된 공덕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아는 이는 알 것이다. ‘출가사문’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중만 되면 그저 좋을 것 같던 시기가 바로 행자 시절이었다
열셋에 집을 나와 선산 도리사에서 시작한 행자 시절을 돌아보면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온다. 당대 제일의 율사이시던 종수 큰스님을 시봉하면서 사문이 된다는 즐거움으로 염불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던 시절이다. 도리사엔 나말고도 두 명의 행자가 더 있었는데 갱두와 채공, 공양주를 셋이 번갈아 했다.
내가 공양주를 맡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저녁이면 큰스님께서 절 안팎을 둘러보시곤 했는데, 그 날 수각에 버린 쌀말들을 수채에서 발견하시고는 공양주인 나를 불렀다. 쌀 한 톨이 발견될 때마다 한 대의 매를 내리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있었으니, 그날 발견된 쌀알은 열다섯 톨, 해서 나는 열다섯 대의 매를 맞았다. 큰스님께서 염불 잘하고 성실히 일 잘하는 나를 유독 귀여워하는 것을 부러움 반 시새움 반으로 쳐다보던 동료들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묵묵히 매를 맞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옷 하나가 없어 광목 바지 하나만 입은 채로 지내고, 솥뚜껑이 너무 커서 부뚜막 위에 올라가 밥을 안치고 푸던 시절이었다.
열세살 어린 나이에도 ‘도통한다는 마음 법’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그지 없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일러 주는 이가 없어 답답한 마음이 늘 한켠에 있었다. 서울의 어느 유명한 법대에 다닌다는 대학생이 내려와 밥만 먹으면 법당에서 좌선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렴풋이 저기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던 어느 날, 아침 공양 시간이었다.
큰방에서 찾는다 하여 쏜살같이 달려가니 큰스님께서 내미는 밥그릇에 노랗게 익은 메뚜기 한 마리가 얌전히 누워 있지 않은가. 하늘이 노래지는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나는 도리사를 말없이 나왔다. 별 꾸지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돌이켜 보면 열네 살 어린 소년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큰스님에 대한 ‘미안함’과 ‘무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어떻게 메뚜기가 밥을 푸는 과정에서 으깨지지도 않고 큰스님 밥그릇에 그렇게 온전히 담겨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루 일이 너무 고단해 큰스님 방 치우고 이부자리 깔아드리는 일을 종종 지나쳤던 것이 죄송한 마음으로 남아 도리사를 떠나면서 ‘내 꼭 공부 잘해 큰스님을 다시 찾아 뵈리라’ 했는데, 그로부터 몇 해 뒤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밀었으니, 생전에 찾아 뵙지 못한 큰스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도리사를 떠나 두번째 행자시절을 보낸 곳에 경상도 주왕산 너머 청량산속의 깊고 깊은 절이었다. 법당을 새로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은 절이었으니, 할 일이 태산같은
절이었다. 숯을 구워 양식을 팔고 돈을 마련했던 그 절에서는 말이 행자이지 나무를 해다가 숨을 굽고 펴는 노동이 전부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주왕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잘라놓곤 했는데, 보리밥으로 배를 채우고 하루 종일 일만 했으니, 그야말로 혹독하게 일만 하던 나날이었다. 다 구운 숮을 한 가마니 지고 삼심 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팔곤 했는데, 갑자기 소낙비라도 만나는 날이면 얼굴은 물론 바지 하나만 걸치고 지게를 진 몸에 시커먼 물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빈 지게를 지고 터벅터벅 먼 길을 되돌아오면서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자주 하던 어느 날, 조계사에서 만나 나를 데려 온 스님께 공부할 수 있는 절로 보내 달라고 했다. 어린 행자에게 공부는 뒷전이고 일만 시키는 게 안되었던지 그 분은 별말 없이 나를 놓아주었다.
그래서 간 곳이 낙산사였는데, 내가 찾아간 스님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고, 때마침 대처승 한 분이 주지로 단임해 와 있었다. 차비는 떨어지고 그냥 거기에 머물러 그 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는데 속옷도 없이 ‘다우다’라고 하는 나일론 통바지 하나만 입고 겨울을 났다. 아아, 그 겨울 뼛속까지 파고들던 매서운 동해의 바람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손이 쩍쩍 들어붙는 찬물에 주지 스님의 요강을 비위 씻고 나면 더 갈라질 손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열여섯이면 나도 스님이 되리라’는 나 혼자 세워 놓았던 약속 때문이기도 했고, 정월이 되면 계를 주리라던 주지 스님의 언질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겨울 내가 열다섯이었으니 조금만 견뎌 내면 될 터였다.
홍련암 비구니 스님께서 손질해 준 중고 장삼을 준비해 놓고 계 받는 날을 기다리며 착실하게 주지 스님 시봉을 했건만, 막상 정월이 되자 “계 받는 것을 연기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중 될 자격이 아직 덜 되었다”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쩌면 이리도 사문이 되는 길이 멀고도 험하단 말인가.’ 나는 눈물을 쏟으며 그 곳을 떠나 오면서 다짐했다. 내 꼭 사문이 되어 생사조차 초월한다는 그 마음 닦는 공부를 하고 말리라.’
그러나 계를 받고 정식 사문이 된다는 것은 도에의 저 멀고 긴 여정의 출발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사문의 길을 발견하는 데 행자 시절보다 몇 갑절 더 혹독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음도 물론 감지할 수 없었다. 결국 금강산 자락인 건봉사에서 아는 행자를 만나, 그 곳에 있다가 두어 달 뒤 사미계를 받았다. 육십칠년 봄 삼월 삼짓날, 내 나이 열여섯일 때였다. 계를 받고 기쁜 마음에 울산바위를 단숨에 올라보니 사바세계 두두물물이 다 나를 반겨주는 듯 환희로웠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서른해도 훌쩍 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흐르는 세월보다 더 빠른 게 어디 있으랴.
이른 아침, 지난 행자 시절을 되돌아 보고 있으려니 사무치게 중이 되고 싶던 그 시절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 내 이 한 생에 출가사문의 길에서 지금 기도 정근의 시간은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새겨 보게 된다.
나는 삼생을 두고 공부하기로 서원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 동안 줄곧 다니던 선방을 떠나 이 곳에 터를 잡고 삼년 기도에 들었다. 내게서 기도란 화두를 성성히 들기 위한 시간이며, 그 적정의 시간에서 건져 올린 에너지를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하는 서원의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재출가 한다는 환희 속에서 하루를 열고 마감하는 이 사문의 삶이 황홀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