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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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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 안도현 1998년 10월 200호
안도현

“서점이란 무얼 하는 곳이지?”
“책을 사고 파는 곳이지요.”
서점에 가 보기 전까지만 해도 소년은 이렇게 또박또박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서점이란 무얼 하는 곳이지?”
이렇게 물으면 소년은,
“어휴, 서점이란 시끄럽기 짝이 없는 곳이지 뭐예요!”
하고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지를지도 모릅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생전 처음으로 서점에 갔더랬습니다. 소년은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랬습니다. 소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책이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너도 컸으니 스스로 책을 한 번 골라 보렴.”
어머니는 서점 근처의 친구 가게에 다녀오겠다면서 소년을 혼자 남겨 두고 나갔습니다.
혼자 남은 소년은 서가와 서가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따라갔습니다. 가도 가도 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은 얼른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난데없이 책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책표지>야. 네가 한눈에 반할 수 있도록 이렇게 멋진 치장을 했단다. 어때? 근사하지? 나를 데리고 가면 넌 책을 읽지 않아도 행복해질 거야. 너의 방 책꽂이에 나를 꽂아 두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질 걸. 네 동무들은 멋진 책을 가지고 있는 너를 부러워할 거야.”
형광등 불빛을 받은 <책표지>가 이마를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그런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돼!”
<책표지>의 옆에 있던 <책제목>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나를 잘 보라구. 아무리 표지가 화려하다고 해도 그 책은 제목이 너무 케케묵어 재미가 없을 게 뻔해. 도대체 ‘공부’ 라는, 겨우 두 글자밖에 안 되는 평범한 제목의 책을 누가 재미있게 읽겠어? 적어도 나처럼 ‘공부를 잘하는 22가지 방법’ 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니?…. 어? 얘야, 그런데 왜 나를 손에 들었다가 내려놓는 거야? 너는 공부를 잘하고 싶지 않은 거니?”
소년은 그와 비슷한 <책제목>이 수없이 많은 것을 보고 질려 버렸습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34가지 방법’ ‘떼돈을 벌 수 있는 79가지 방법’ ‘매우 감동적인 200가지 이야기’ ‘지식이 저절로 쌓이는 1,000가지 상식’….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란 말이야. 책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면서 저렇게 난리들을 치고 있으니, 쯧쯧. 책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나를 훑어보면 내용의 대강은 파악할 수 있겠거늘! 안내자 없이 산을 오르려고 해서는 안 되지. 아, 안 되고 말고.”
거드름을 피우며 <책제목>을 뒤로 밀치고 앞으로 나선 것은 <차례>였습니다.
“적어도 책을 구입할 때는 차례 정도는 살펴보는 게 상식 아니겠냐?”
<차례>는 일목요연한 순서와 질서, 규율 따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자신은 둘도 없이 훌륭한 책의 안내자라고, 나아가 책의 모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어험!”
그러자 이번에는 <지은이>가 등장해서 크게 헛기침을 했습니다. <지은이>가 호기를 부리자 그 위세에 눌려 이내 사방이 고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지은이>없이 쓰여진 책은 있을 수가 없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 책에서 특별히 강조한 것은…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지난 몇 년 간…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책을 쓸 사람이… 그리고 꼼꼼한 자료 수집과 정통적인 기법과… 그러므로 이 책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때에 따라서 이 책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지은이>는 끝도 없이 자기 자랑을 펼쳤습니다.
처음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책들이 참다못해 다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통에 서점은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가격표>까지 나서서 목청을 높였습니다.
“쳇, 그렇지만 결국에는 값이 싼 나를 선택하게 될 걸.”
소년은 정말 난처해졌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소년은 책을 고르지 못한 채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서점이 마치 시장 바닥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차려 놓은 물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르지 자기 물건을 파는 데만 급급한 시장 말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책의 <본문>입니다.
아마 <본문>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소년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거야.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나를 아는 건 오직 나를 꼼꼼하게 읽게 될 소년밖에 없거든. 소년이 나를 완전히 알게 될 때까지, 나는 그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