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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림스님-대장경의 전산화, 세계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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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과 사람들 - 이윤수 1998년 10월 200호
이윤수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물결이 온누리에 가득하던 고려시대에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돕기 위한 구휼원이 사대문 밖에 문을 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노숙자를 위한 쉼터 같은 곳일 터이다. 물론 불교계가 앞장서서 일군 일이었다. 지금은 외국인 쇼핑 타운으로 변해 버린 이태원이나 무악재 넘어 홍제동도 고려시대의 빈민구제 기관인 이태원과 홍제원이 있던 장소다.
밤이면 환락의 거리로 변모해 이 엄청난 경제 위기 속에서도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이태원. 이 곳에 21세기 첨단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다시 태어나는 고려대장경을 꿈꾸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칠백 년 전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았던 불교의 정신이 이름으로 남아 전하는 곳에, 칠백년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불심으로 구하기 위해 조성했던 고려인의 호국 정신이 담긴 고려대장경 정신을 잇는 장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건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태원에서 종림스님을 만나기란 어려빚 않다. 좁다란 방 한 칸에서 대장경 관련 작업을 하는 스님들과 잠을 청하고, 자고 깨면 온종일 이태원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생활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피부색 다른 세계인들이 오가는 이태원의 길목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훤출한 스님을 만난다면 그리고 잠시 잠깐 지어 보이는 미소로 수천수만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님이 있다면 우리의 종림스님이라고 판단해도 틀림없을 일이다.
“재정이 부족하다보니 신심있는 불자가 값싸게 내놓은 지하 공간을 활용하게 된 인연으로 난생처음 이태원이란 곳에 머물게 됐지요. 그런데 참, 이색적인 동네예요. 골목 하나 사이로 고관대작이 사는 궁전 같은 집과 육십년대의 판자집 같은 곳이 공존하는 곳이죠.
그 골목을 나서서 거리로 나오면 없는 것이라곤 없는 번화가가 존재하지요.”
그릇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물처럼 스님은 이태원에서 퍽 잘 어울려 산다. 넉넉한 스님의 품성탓인지 지역 주민들의 인심도 종림스님에겐 퍽 후한 편이다.
종림스님을 단 한번이라도 마주한 이들은 스님의 그 ‘백만불 짜리’ 미소에 반하고 만다. 해인사 우화당에 작은 간판 하나 내어걸고 어렵사리 시작했을 때나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의 목을 내놓고 백의종군을 하던 시절이나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전자의 후원을 받아 고려대장경 시디롬을 탄생시켰을 때나 스님의 백만불짜리 미소는 늘 한결같았다. 시름도, 눈물도 스님에겐 미소 하나로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려대장경 연구소는 고려대장경의 보존과 전산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어나가는 현장이다. 선조들이 오직 일심으로 조성한 해인사 장경각의 고려대장경을 오늘에 여하히 잘 보존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은 고려대장경과 더불어 살아온 종림스님에겐 화두와 같은 작업이다. 기와를 갈고 훈증 소독을 하는 ‘보수’ 뿐 아니라 선조들의 가장 뛰어난 지혜와 과학으로 이어온 고려대장경을 온전하게 후세에 전하기 위해선 반드시 ‘기초 조사 연구’ 부터 차근차근 ‘보존’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변함 없는 생각이다.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위촉해 경판의 데이터 베이스 작업에서부터 경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다양한 기초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재원문제 때문에 이 작업은 잠시 중단되고 말았지만 언제라도 기초 조사를 바탕으로 보존의 지혜를 모으는 노력을 멈춰선 안 된다는 소신으로 임하고 있다.
남아 전하는 고려대장경의 참된 보존작업 이상으로 우리의 종림스님이 심혈을 기울이는 건, 현대불교의 정립과 한국 불교의 세계화, 생활 불교의 정착을 기본 이념 삼아 작업하는 고려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이다. 말하자면 활자 매체인 고려대장경을 전자매체로 전환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엔 새로운 전자 대장경의 편찬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열어야 합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매체를 활용한 고려대장경의 변신은 시공을 뛰어넘는 정보 전달 수단이 될 겁니다. 현대 인류의 문명을 기름지게 할 것임엔 틀림없지요.”
종림스님을 처음 뵌 건 십 년도 훨씬 전이다. 해인사에서나 서울의 해인지 편집실에서 뵐 때마다 스님과 대화를 나눴던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씨익- 그 온화한 미소만을 보일 뿐이었다. 강한 경상도 억양에 단답형의 말씀으론 전혀 내면세계를 짐작할 수 없는 스님, 그러나 상당히 진보적인 스님이란 느낌만을 막연히 지녔다. 왜냐하면 종림스님 곁엔 이 나라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스님들이 늘 모여들곤 했기 때문이다. 엘리트층 스님들에게 그만큼 음으로 양으로 종림스님의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일 터이다.

남다르게 앞서가는 스님의 진보성은 이미 1980년대 초에 고려대장경의 전산화 관련 원력을 세웠던 것에서도 괄목하게 보여진다.
한 달 평균 사오십 권이 넘는 책을 읽던 스님에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한 책이 한 권 있다.「에덴의 용」이 그것이다. 아메바로부터 인간의 지능이 어떻게 변화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컴퓨터로 분신을 만드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내 스님은 학원에 등록해 그 무렵 8비트짜리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님의 뜻은 오직 하나였다. 자연과학의 일부에 쓰이는 컴퓨터를 인문과학 분야에 이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나 누구도 인문과학과의 결합이나 응용을 고려하지 않을 때였다.
컴퓨터와 한몸이 됐을 무렵 해인사 도서관장 소임을 맡게 되었다. 1983년의 일이다. 이 시절부터 종림스님과 고려대장경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됐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도서관의 책 목록을 정리하기 위해 컴퓨터로 카드를 만들면서 소중한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에 대한 목록 정리나 내용소개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 사간판장경을 자료로서도 정리를 해봐야 겠다는 원력을 세웠던 것이다.
“사실 선방에 오래 있어도 수좌답지 못한 것 같고 그 때 민주화운동을 하는 스님들 곁에서도 제 역할을 찾지 못하겠더라구요. 정보 매체가 앞으로를 선도할 것이란 확신을 가지면서부터 제 할 일을 찾은 셈이죠. 전자매체로 고려대장경이 다시 태어난다면 과학과 역사의 만남을 통해 우리 불교가 진일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됐습니다.”
1991년 스님은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의 국제 선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전역의 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살폈다. 장기적인 안목 아래 대장경을 체계적으로 전산화하는 일본의 현실은 스님에게 ‘앞으로 우리도 가능성이 있다’ 는 희망을 주는 시간이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스님은 더 적극적으로 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업’ 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다만 우리 손으로 시작해 본다는 게 중요했지요. 랭카스터의 승인을 받고 세계전자불전협의회 작업에 합류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지나온 일들은 기적이나 다름없어요. 모두를 힘겹게 했고, 벌려놓은 일을 지치도록 하다 보니 어찌 지나왔는지 모르게 보내온 시간이었지요.”
미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인도 등지의 십여 개 국가가 가입해 있는 세계전자불전협의회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시도한 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은 말하자면 고려대장경의 제2의 불사였다. 자그마한 시디롬 한 장에 팔만여 장 대장경이 고스란히 모셔져 누구라도 마우스 하나 움직여 가며 팔만사천 가지 부처님 가르침과 만날 수 있으니, 그건 칠백 년 전 갸륵한 신심으로 신화처럼 일궈놓은 고려대장경을 또다른 모습으로 오늘의 첨단 정보 체계 속에 정리해 놓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의욕처럼 쉽지 않았다. 전산화에 대한 주위의 인식이 뒤따르지 않는 상태에서 혜묵스님과 더불어 시작한 작업은 수시로 좌절돼야 했던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일구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인력도 드물고 재정은 형편 없었다. 왜 그렇게 자고 깨면 월급 주는 날이 빨리 돌아오는지,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서는 일’ 엔 영 관심 없는 스님에겐 고려대장경 연구소 소장이란 자리도 여간 부담스런 직책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뒷전에서 신심내서 하고픈 걸 찾아하는 일이 적격인 스님이 손수 화주가 돼 재원을 구하러 다녀야 하고 시시때때로 감투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니 그마저도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예상 밖으로 삼성문화재단의 지원이 뒤따라 고려대장경 전산화가 분주히 진행됐다. 수많은 이웃이 “고려대장경에 새생명을” 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산화 작업의 후원회원이 돼 주기도 했다. 지금 비매품으로 선보인 고려대장경 시디롬도 교정작업과 색인작업을 거쳐 2천년대 초면 대중 앞에 완성된 시디롬으로 배포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올해 말쯤이면 인터넷에 고려대장경이 그 이름을 세상 밖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무엇보다 오자가 없는 고려대장경을 조성했던 선조들을 대물림 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오자 없는 전산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간이 더디 걸리더라도 수십 차례 교정을 통한 완벽한 입력을 해놓을 생각이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 지금껏 지내올 수 있었던 건 세계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주인이란 자부심이었던 것 같아요. 이젠 지금의 전산화 작업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도록 애쓰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사실 원효, 의상 스님 이래 우리가 세계 불교학계에 해준 것이 뭐 있습니까? 이 작업이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내고 전세계의 불교계와 불자들이 잘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일구는 일이 지금의 몫입니다.”
진작에 정부에서 앞장서고 했어야 했고, 더 일찍이 우리 불교계가 팔 걷어 붙이고 나섰어야 했을 작업을, 나서는 일과 통 인연 없는 종림스님이 뜻있는 불자들을 채근해 일군 불사이고 보면 앞으로 밑작업이 잘 이루어지고 그래서 기초가 다져진다면 우리의 종림스님은 훌훌 털고 화려한 이태원, 작은 지하방의 그 거대한 조직을 떠나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갈 일이다.
한때 뒷방에 앉아 책 읽기에 골몰하길 꿈꿨던 스님답게 해인사의 뒷방에서 종림스님은 컴퓨터와 마주앉아 ‘사이버 불교 공간’ 을 만들고 연기와 공사상을 연계한 새로운 불교세계관을 구축할 것이다. 사이버 스님을 만들고 사이버 절을 세우고 그 공간 속에서 이 나라 불교의 위대한 사상을, 우주를 넘나들고 시공을 넘나들며 전세계에 확산시키는 일에만 골몰할 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를 배우려는 이웃들에게 정보를 쉽고 친근하게 제공하는 일, 그래서 정보의 공유 속에 이 나라에 불교를 연구하는 이들이 무수하게 늘어가고, 불교를 이해하려는 이웃들에게 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일, 이 나라 불교의 정신과 사상을 세계의 이웃들이 살피고 감탄할 수 있는 일… 그 엄청난 대장경 전산화 작업의 청사진이 있기에 오늘도 종림스님은 좁다란 지하 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