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다로경권실에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화엄회해 - 반산 1999년 07월 209호
20세기의 끄트머리인 기묘년 봄, 해인사에 다시 방부를 드렸다. 그것도 도무지 나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학감 소임까지 덤터기를 쓰면서 말이다. 이제껏 삼 년 동안 은해사 다로경권실에서 편히 살았는데, 대웅전 오르는 돌계단만큼이나 우뚝한 해인 강원에 다시 살게 되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신문에 들어와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한 이즈음, “는 것은 번뇌요, 준것은 신심이다” 하였듯이 어느덧 그 말대로 된 것 같다. 적묵당 뜨락에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대숲을 바라보며 옛 강원 시절을 되돌아 본다.
1982년 가을 강원에 학인으로 방부드렸을 때, 그 시절 해인사는 여러 모로 고풍스러웠다. 먼저 주된 교통수단이 직행버스였다. 주지 스님의 승용차가 ‘포니 원’ 이던 때이다.
그 시절의 일화 한 토막이다. 주지 스님께서 경남도청에 회의가 있어 기사와 함께 청사에 들어가려는 데 주차 관리인이 막아서더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창문을 끼익 끽 돌려 내리고는 해인사 주지 스님이라 하니, 그제서야 차렷 경례를 붙이며 통과시키더라는 이야기이다. 그 주인공인 명진明振 화상께서는 지난 겨울 길상암에서 입적하셨다.

이듬해인 83년 관음전 경반 시절, 강원 서기 소임을 맡게 되어 대구 나들이가 잦았다. 볼일을 마치고 저녁 나절 절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저녁 노을 빛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아니, 장관 정도가 아니라 총리급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88고속도로가 훤히 뚫리고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는 지금은 그렇듯 근사한 노을 풍경이 다만 옛 추억일 뿐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구광루 옆 한쪽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 또한 명물이었다. 어떤 관광객이 볼일을 보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아, 내가 지난 번에 저 측간에서 큰 것을 보고는 성주星州 장애를 갔는데 버스에서 내려서려는 순간 무엇이 ‘퉁’ 하길래 돌아보니 아무 것도 없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측간에서 떡가래 떨어지는 소리였던 거여…” 한다.
서산에 해 떨어지는 즈음이면, 저녁 북소리가 탈속미脫俗美 넘치는 구광루에 울려 퍼지고 낭랑한 예불 소리가 가야산 자락에 메아리친다.

한번은 어느 여름날 오후, 나른 하게 관음전 지대방에서 몇몇 학인과 함께 꿀맛 같은 단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서 흘연히 일진광풍이 부는가 싶더니 눈치 빠른 스님들은 ‘가야산 호랑이’가 내려왔다는 등 하더니 하나둘 흩어져 주위가 조용해졌다. 순간 갑자기 냉기가 혹 끼쳐 오더니, “야, 이놈 봐라! 어른이 들어왔는데도 그냥 낮잠을 자고 있어!” 하는 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호랑이 발톱에 채인 듯 나는 얼떨떨한 채 저만치 구석에 쳐 박히고, 호랑이 꿈은 이미 혼비백산 되어 버렸다. 눈을 부시시 떠 보니 방장 스님의 서슬 퍼런 호령 소리가 들린다. “수행한다는 놈이 편안하게 낮잠이냐! 법당에 올라가서 삼천 배 하거라. 그것도 싫으면 보따리를 싸불든지….” 옆에서는 도반들이 킥킥거리고, 몇몇은 “그 스님은 몸이 아파서 약 먹는 중입니다. 착실한 스님인데 한번만 요옹 서…” “시끄럽다. 너그들도 삼천 배 하고 싶나. 조금 전에 이 방에서 낮잠자다가 신발 한짝만 퍼뜩 신고 도망가던 놈들이…” “알겠습니다. 참회하겠습니다.” 그 날, 그런 가운데 연탄불에 올려 놓은 약은 새카맣게 재가되었다. 열반하신 성철 큰스님께 삼가 감사의 예를 올린다.

겨울 섣달 선열당에 온대중이 모여 앉아 용맹정진을 할라치면, 꼭 이때쯤에 눈이 내려 가야산 온 천지가 새하얗다. 밤새 내린 눈 무게에 설해목雪害木 부러지는소리 “뚝두둑…쿠웅”, 얼마 있다가 새벽을 깨우는 수좌 스님의 장군죽비 소리 “탁 타닥 타다닥…”
그 해 용맹정진 도중에 선열당을 지키던 수좌의 표상 현우玄雨 노스님께서 입적하셨다. 납월 팔일 새벽 가늘게 눈발은 내리는데, 일 주일 정진을 마친 눈 푸른 납자들이 현우 노장님의 법구法軀를 상여에 메고, 진주장 여관 뒷길로 만장의 물결 넘치고 연화대에서 다비茶毘를 모셨다. 내가 경험한 가장 성스럽고 기억에 남는 다비식이었다.

지난 겨울, 그 어려운 시절에 나는 승가대학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 가지에만 매달려 있었다. 지난 89년부터 시작한 화엄학 연구의 조그만 매듭을 하나 맺었다. 대학원의 도반들과 화엄경을 연찬하면서, 그동안 널리 알려졌으면서도 번역되지 않은 청량소淸凉疏 번역을 시작하였다. 대학원장이신 무비無比 강백의 “한번 시도해 보라”는 말씀과 지도가 큰 힘이 되었다. 처음 작업인 만큼 어려움은 수없이 많았다. 가장 어려운 출판사 문제는 대학 동문인 홍승스님의 배려로 무난히 해결되었다. 그동안 시주밥의 은혜를 갚는다는 의무감으로 처녀작의 미숙힘을 무릅쓰고 어려운 산고(?) 끝에 지난해 12월 30일 마침내 책을 손에 잡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청량소 전품에 걸친 기초 자료 입력을 마무리 하였으니 이 년 반에 걸친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제 후배들과 공부하는 여가 시간에 나의 특기인 끈기로 ‘청량소 번역’이라는 다소 힘에 부치는 일을 해 나갈 작정이다. 그리고 화엄경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 있는 글을 쓸까 한다.

이제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서 큰 스님들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작정이다. 벌써 저만치 동녘은 밝아오는 데, 조금 있으면 온 대중이 대적광전에서 백팔배를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불법에 어찌 고금이 있겠는가? ‘역천겁이이불고歷千劫而不古요,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지나 온 천 겁 세월 옛 아니듯, 만세를 흘러가도 오늘 그 자리’라고 하지 않던가! 오직 수행하는 이들의 발심이 얼마나 견고한지에 달려 있다. 어디서 낭랑한 목탁 소리, 새벽을 여는 소리 들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