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해인사 보광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10월 200호
이 산중 발길이 몇 번째인가. “가야산 해인사” 현판 달린 일주문 지나고, 천 년 세월 견딘 솔나무 길 끝의 사천왕문 지나고, 이 계단만 오르면 선악과 시비와 생사의 대립을 벗어나 해탈하려나, 불이문 지나 대적광전 너른 마당에서 한숨 돌리기도 했다. 법당 뒤로 돌면 또 가파른 계단 끝 위, 살색으로 고운 장경판전에 닿았을 때, 바깥과 다른 그 공간 속에 말 없이 몸 들이밀고, 그저 그 곳에 고요히 쌓여 있는 세월만 느끼기도 했다.
이 다리를 건너면 극락 간다지.
차고 급한 물에 몸 맡기고 떠내려가는 단풍잎 없지 않을 때, 아슬아슬 뒤통수 식히며 건너 본 외나무 다리, 개울 건너 그 피안에서 얼쩡거리다, 판전 옆 썽썽한 전나무 밑에까지 와서 파도처럼 굽이치는 기와 골만 오래 지켜본 적도 있다.
어느 날은 쪼그리고 앉아 머리 끝서부터 발 끝까지 하릴없이 몸 내맡긴 채로, 저녁 예불 직전에 울리는 범종 소리 듣기만 한 날도 있다. 그 날 듣던 그 종소리, 강원도 신흥사 저녁 종소리 같기도, 부석사, 상원사 종소리 같기도, 주변 풍경 모두 지워지고 그 환장할 소리만 지금껏 귀에 남은 어느 절 종소리 같기도 했다.
오늘은 선열당 코앞까지 몸 편히 한달음에 올라와, 축대 밑에 펼쳐진 파촛잎 그늘 아래 오래 머문다. 그 잎에 여름 소낙비 청청히 떨어지는 소리, 짚으로 제 몸 동여맨 채 눈 내리는 한겨울 견디는 자태를 듣거나 떠올린다.
그 파초 나무 두 그루를 내려다보는 것은 퇴설당과 선열당 두 당우이다. 바늘로 홈질한 듯, 버력돌 곱게 박은 맑은 흙담 둘러쳐진 곳이 퇴설당, 성철스님이 출가를 한 곳이자 열반에 든 곳이다. 사문은 산문에 든 날을 제가 태어난 날로 삼으니, 그 분은 태어난 곳에서 법랍 쉰아홉의 삶을 마무리지은 셈이다.
무슨 일이든 십 년은 쇠말뚝을 박은 듯이 해라.
그리고 이 산중 떠나지 마라.
당신이 엮어 간 삶으로 그 본을 보이셨거니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산내 대중에 두루 당부했던 말, 그러나 모두 다 받들지는 못한 말이다. 보광스님, 그 당부 말씀 이날껏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퇴설당 옆 선열당을 처소로 삼은 뒤로 그 어른의 기은을 밤낮으로 느끼며 지낼 터였다.
경학 십 년에 강석이 십 년, 그리고 제방 선원을 찾아 화두를 들고, 법문을 다니며 포교에 전념한 것이 또한 십 년씩 되는 세월 보낸 그이가 오늘 맡고 있는 소임은 주지이다.
“이런 마장, 저런 장애 한이 없어서, 삼라만법 중에 버릴 법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 실수實修 중” 이라 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중의 대중으로서 당할 일 당하나 보다 하고 맡은 일이요. 내가 평생에 공부이거나 소임이거나 모두 전력 투구해 왔지만, 이 일만큼은 시작은 했으니, 마칠 일만, 안 할 일만 남기고 있어요. 문수 보살마저도 보현 같은 보살에게 사바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본심을 잃을 테니 빨리 돌아와 본분살이를 지키라는 글을 적어 보냈을까.”
96년 11월부터 이태 동안 맡고 있는 주지 소임을 두고 그가 하는 말이다.
벽에 붙은 좌탁과 손을 위해 내 온 방석 몇 개뿐, 그의 방은 텅 비어 있다. 목재를 갉아먹는 흰개미떼를 “강제 해탈” 시키려고 세간을 모두 치운 탓이다. 서쪽 창으로 비껴 들어온 저녁 햇살이 그의 얼굴과 부드럽게 어울린다. 학승이자 율사인 고산스님의 법상좌답게, 엄정한 계행으로 얻었을 “꼬장꼬장한 율사” 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율법과 계율의 해석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의 얼굴이 그늘과 볕으로 반듯이 갈린다. 삼학의 바탕이 되는 계와 율은 비유컨대 늘 성 바깥의 목장에서 갓 짠 우유와 같은 것이라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시간과 과정을 거치어 성 안에 들어온 것은 이미 변질된 것이다. 부처와 공자도 걱정하신 바, 그것을 시간의 변화와 사람에 따라 맛을 바꿔 간다면, 종래는 우유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게 될 터임을 그는 염려한다. 수행이란 뱀, 개, 원숭이, 여우, 새 따위의 날고 기고 닫는 여섯 마리의 짐승, 곧 육근육식을 한 기둥에 붙들어 두고자 함이다. 계율이란 그 기둥과 같은 것이니, 옳고 그름을 구분하자는 잣대가 아니라, 길 아닌 곳으로 저마다 내닫는 것을 방색시키고 보호하려는 것이다.
대중 소임을 맡은 자이면 부처의 법을 제행의 원칙과 기준으로 삼아야 할 터였다. 공심公心과 공심空心, 두 가지를 뼈로 삼고 여법히 살아온 나날, 그것이 주위를 머트롭게 하는 바가 되더라도 수행자로서 자신을 엄격히 가두어 둔 결과로 된 것이니, 자신을 늦출 까닭이 되지 못한다.
내일 모레면 나이 예순, 환갑이면 사주 팔자가 끝나는 때이니 제대로 회향할 일만 남긴 셈이라 했다.
57년, 열일곱 나이에 도원스님을 은사로 해인사로 출가했으니 올해로 승랍이 마흔하나, 산문에 든 날로부터 지금껏 어쩌면 철 없을 때에 정한 길을 두고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평생 공부할 수 있는 곳, 그 말 한마디에 삶을 바꾸도록 어렵던 집안 형편을 그는 오늘 다행으로 여긴다. 그로 인해 불문에 든 것이 아니었던가. 빗방울이 바다에 바로 떨어진 바이로다. 먼 길 길고 어렵게 에두를 것 없이 바로 떨어져 내린 곳이 불법의 바다이니, 빗방울이 단번에 바다를 통째로 얻은 바이로다. 그렇게 기껍기만 한 인연으로 친다.

68년 범어사에서 고산스님께 전강게를 받았다. 대중이 여럿 모인 가운데 법상에 올라 법문을 했다. 그것은 그날 그 개인에게 내린 것이나, 보편하고 두루한 것이니 모두의 금언으로 삼음직한 것이다.

허공이 모양과 색이 없듯이
본래 마음 또한 이와 같도다
모양 없는 법을 전하나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도다

말미에 다시금 다짐하시되,

득실이 걸림 없을 때
이것이 대인大人의 경계더라

연등불이 아직 보살이던 부처님께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하리라 수기를 내리셨다. 연등불이 말씀하신 바는 있으되 부처님은 받은 바 없었다. 법성원융 무이상無二像이라, 양편 어느 쪽으로 치우침이 없어야 할 터였다. 치우침이 옳지 않다고 양변을 버림도 허물이 된다. 다섯 손가락을 펼쳐 든 손을 두고, 다섯이니 하나라 함은 틀렸다, 주먹이 하나이니 다섯이라 함도 틀렸다고 우기는 모두가 치우치는 것이다. 얻고 잃음에 걸림 없을 때, 일컬어 도라 이를 만한 것이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뒤로 고산스님 모시고 중강 노릇한 것이 두 해, 그리고 통도사 강주를 거쳐 해인사 강주 소임을 맡아 일곱 해 강석을 폈다. 웬만큼 간경이 되면 좌복 위에 앉으리라던 작심이 십 년 세월 뒤로 미뤄진 것은 그의 법상좌된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가 해인사 강주 소임을 보는 동안 강원은 학인의 수효가 크게 늘어 번성한 때였다. 그의 열정적인 강의와 함께, 운동장을 닦고 도서관을 짓는 등 학인들이 몸과 마음을 겸해 닦을 터를 온전히 마련하려 애쓴 덕이다. 되돌아보면, 이십대와 삼십대의 나이가 그러하려니와, 그 때가 제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삶을 산 때가 아니었나 싶어진다. 몰라서 힘겨웠고 몰라 주니 또한 어려웠던 세월이라도 오늘 그러하다.
고산스님이 그에게 교학의 스승이었다면, 증득의 길을 잊은 바 없이 짚어 가게 한 분은 성철 스님이시다. “자성을 밝히는 선문에서 볼 때에는 염불도 마구니이며, 일체 경전을 다 외어도 외도이며, 대자비심으로써 일체 중생을 도와 큰 불사를 해도 지옥 귀신이다. 모두 생사법이지 생사를 벗어나는 길은 되지 못하니 필경 송장 단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자성을 밝히는 길만이 살길이다.” 그 어른 그렇게 이르셨거니와, 이론과 이치로만 깨우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성불 못할 것인가.
기신론, 금강경 섞어 보아질 무렵, 보던 경 모두 내던지고 나이 마흔에 시작한 길은 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좀 늦었을 따름인 길이 된다. 지리산 상연대에서 한 철 살고 난 뒤에 이 곳 퇴설당에서 하루 열네 시간씩 가행 정진을 했다. 그리고 칠불암, 용화사 등 제방 선원을 전전한 것이 또 십 년, 쉰 되도록 좌복 위에서 세월 보낸 뒤에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한 소식하셨습니까.
깨달았다 하면 아만이고, 못 깨달았다 해도 허물이 된다. 범부로서 다생겁래로 쌓인 업 벗기가 이토록 힘들구나. 내생에 다시 태어나 공부를 한다 치면 오로지 참선 한 길로 내달으리. 그저 그것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좁은 동쪽 마당, 빨래줄에 정갈히 널린 옷가지는 솔기까지 마르도록 볕이 바른데, 가야산 골이 깊어 그런지, 기름진 이파리만 무성한 두 그루 감나무에는 아직 단풍 기척이 없다.
대중 속에 있으니 대중과 똑같이 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두시 반이면 저절로 깨요.
예불 올리고 백팔 참회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여섯시 아침 공양 전까지 좌복에 앉는다.
귀신은 속여도 나이는 못 속여. 늙어서 잠이 오나.
그리고 종무소로 “출근해서” 조회를 본다. 일이 시작되면 “벼락 천불이 나게” 몰아 붙이는 성정대로, 그 다음에는 산내 이곳저곳에서 벌이고 있는 공사 현장에서 “막 뒹군다.” 사리탑, 성보 박물관, 배수 및 도로 포장 공사…측량해서 비뚤어진 것은 바루면 되고, 늦었다면 빨리 시작하면 되니 “눈에 보이는 일”이야 어려울 바가 없다. 십 년 전, 쓰러질 지경이던 희랑대 불사에 관여한 일도 그랬다. 기둥에다 “불사합니다” 써 붙여 놓긴 했으나 삼십 년 동안 그가 지어 놓은 인연이라고는 책과 좌복뿐이어서, 예불 때마다 축원을 올리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불사는 부처님 일이니 일은 제가 하되 모연은 부처님이 맡아 해 주소서. 구룡사 백고좌, 조계사 등 전국으로 법문을 다녔다. 평생 배운 것이 부처님 법인데, 신도들한테 법문도 못한다면 벙어리 염소와 다를 바 없을 터였다. 부처의 명조였던지 그의 법문이 장했던지, 그렇게 해서 거둔 성과는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니, 그의 또다른 면모였다. 배운 바 없음에도 익어 있는 일을 두고 “생이지지” 라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남보다 잘하지는 못해도 남만큼은 해내지 싶다며 웃었다.

윤달이 끼면 늦더위가 있게 된다는 옛사람의 말대로, 아직 한낮의 볕은 호되게 따가와서 알곡 여물릴 일이 늦춰진 벼는 고맙다. 그러나 절기는 벌써 처서, 그것은 가만가만 들판을 걸어내려와 산과 들이 하나로 만나게 하는 산그림자처럼 천지를 덮는 중이다. “새가 매를 잡아 줄느런히 늘어 놓고,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할 때” 라 했다.
한여름 무성히 뻗쳐 올라 인적 있는 길을 지우던 풀들도 자라기를 멈추고, 제 속에 검고 단단한 씨앗을 품기 시작했다. 황금빛이 완연한 들 가운데 난 길로 자전거 페달 한가히 밟으며 지나는 저 할아버지, 얇고 흰 적삼 차림이 마음에 차다.
가을이다.

글/김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