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지구가 태어난 뒤 수많은 생물이 무리를 이루어 서로 돌보며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안정된 녹색별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인간은 녹색별에 가장 늦게 태어났지만 모든 생명체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청지기 사명을 부여 받았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한다는 것은 지구촌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인간은 이런 사명을 망각하고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지구촌 생물들의 목숨을 아무 생각 없이 앗아가고 있다. 이런 행위를 하는 동물을 인간이라 칭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의 사명을 망각할 때는 지구촌의 생명체를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괴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인간은 생명체들을 멸종시키는 죽음의 문화를 계속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부여받은 사랑의 정신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생태계의 구성
지구촌에 살고 있는 생물이 몇 종이나 될까? 많은 사람이 이를 밝히려고 희랍시대 이후 이천 년 넘게 노력했지만 인간들이 찾아내어 이름을 붙인 것은 이백만 종쯤 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 생물종의 정확한 수는 알 수가 없고 단지 삼천만 종쯤 되지 않을까 추측을 하고 있다.
생태계는 생산자인 식물, 소비자인 동물, 분해자인 미생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삼천만 종은 세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분리된다. 삼천만 종의 생물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혼자서 살 수가 없으므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할 수 있다.
생명체 하나의 단위는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크기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DNA, 기관 하나의 개체, 집단, 심지어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생물은 독립적으로 살 수가 없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쌀 한 톨을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서 벼라는 식물을 키워 벼가 만들어낸 알곡을 얻어 먹고 있다. 그렇다고 벼도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벼가 알곡을 만드는 것은 잎의 엽록소를 이용해서 숨구멍을 통해 흡수한 탄산가스와 뿌리를 통해 흡수한 물을 재료로 광합성이라는 화학작용을 하여 탄수화물을 생산해 알곡에 저장하는 것이다. 광합성작용에는 엽록소가 꼭 필요한데 이 때에 태양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벼는 태양까지 모두 합쳐야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인 셈이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식물체는 태양과 더불어 생태계의 생산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동물인 소비자 군은 생산자가 생산해 낸 광합성 산물에 의지해서 살아가므로 식물체의 생산능력에 따라 동물집단의 크기가 조절될 수밖에 없는 종속적인 집단이다. 생태계에서는 분해자인 미생물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지만 크기가 미세하여 흔히 간과하게 된다.
일본 온대림 산림토양 일 그램 속에 약 일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는 보고에 따르면 토양은 광물체 덩어리가 아니라 미생물이지만 생명체 덩어리인 셈이다. 토양 속의 미생물은 나뭇잎, 줄기, 가지 등의 유기물질을 분해하여 부식물질로 만들어 식물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미생물은 이런 부식물질의 일부와 식물이 생성한 광합성물질 일부를 먹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식물과 토양 속의 미생물은 상호공존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와같이 지구촌에 존재하는 삼천만 종의 생물은 생태계에서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른 생물들에게 도움도 주고, 또한 받으며 공동생활을 영위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터전은 많은 생명체가 균형을 유지해 가며 어우러져 사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원시림, 자연적인 호수와 하천, 곧 지상낙원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개발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
17세기는 서구에서 근대과학이 출발된 시기이다. 근대과학의 기본적인 철학이념은 모든 현상을 계량화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수학적인 모델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이런 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정량적인 사고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곧 자연은 인간이 이용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계장치에 불과할 뿐, 생명체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 잘 살기 위해 기계에 불과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지배사상을 밑바탕으로 산업혁명 뒤로 개발을 계속 추구하였고, 산업이 발달하다 보니 도시로 사람이 몰려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산업발달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유통 특성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자원의 이용이 늘어나면, 대기오염물질과 폐기물의 배출도 계속 늘어난다.
20세기 문명의 걸작품이라는 자동차를 예로 들어 보자. 자동차를 만들려면 쇠와 고무가 필요하다. 쇠는 지하의 철광석을 채취하여 연료와 전기로 제련한다. 철광석을 채취하려면 사의 나무를 베어 내고 땅을 파야 한다. 전기를 생산하려면 댐을 만들거나 화력,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재료를 가져다가 자동차를 만들려면 커다란 공장을 지어야 하고 계속해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자동차 원료인 석유는 지구촌 일부 지역에 제한적으로 매장되어 있어 채유해서 지구촌 각 지역으로 수송해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 사용은 필연적이다.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름에는 각종 물질이 섞여 있어 연료가 연소되면서 대기요염물질이 배출된다. 그리고 자동차를 운행하려면 도로, 주차하려면 주차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흙을 모두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게 된다.
이쯤만 살펴보아도 자동차의 생산과 운행에 엄청난 생명체의 터전이 희생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자동차를 고속으로 운행하려면 곧은 도로가 필요하다. 이런 도로를 건설하는 데는 많은 자금이 소요되기에 늘 경제성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들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도로를 멀리 우회한다든지 가능한 터널로 한다든지 하는 건설방식을 생각하지 않는다.
도로를 건설할 때의 소음과 재료로 사용된 아스팔트 등의 악취로 야생동물은 피난을 간다. 예민한 동물은 도로에서 10킬로미터 밖으로 이동하게 된다. 큰 동물일수록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은 넓어야 한다. 호랑이 한 쌍에게는 400km2, 곰 한 쌍에게는 200km2 이상의 공간이 필요하다. 만일 이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을 때는 그 동물들은 멸종하게 된다.
우리나라같이 국토가 좁은 나라에서는 이런 동물도 살고, 각종 개발도 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국토 이용이 필요하다. 곧 국토의 삼 분의 일쯤은 개발을 보류해야 한다. 앞으로 개발이 가속화되면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동물, 식물, 미생물의 멸종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고 산업화될수록 건축물을 비롯한 인공시설물의 면적이 증가된다. 이는 녹지의 희생위 에서만 가능하다. 녹지는 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인데, 특히 도시는 식물과 미생물들이 동물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명체들은 대기오염물질, 수질오염물질 등을 분해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오염물질을 생태계의 구성생물들이 거의 분해시키면 쾌적한 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분해시키지 못하는 오염물질의 양이 많아지면 숨막히는 도시가 될 것이다.
서울시의 예를 들어 보자. 시민 한 명이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사람당 220m2의 녹지가 필요하다. 인구 1,050만 명에게는 2,300km2의 녹지가 필요하므로 지금 서울 전체 면적의 네 배쯤의 녹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서울시 면적의 26.7퍼센트쯤의 녹지로는 시민 전체가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의 7퍼센트 정도만을 분해할 뿐이다. 이렇게 되니까 서울 하늘에는 늘 대기 오염물질이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울 도심은 낮에 흡수한 열을 밤에 발산한다. 그래서 지표면에서 300~400미터 높이까지는 대기가 늘 정체되는데 대기오염물질은 강풍이 불지 않는 한 계속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이런 대기오염물질은 도시 생태계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친다.
대기오염물질과 산성비가 계속 내리면 토양이 산성화된다. 토양이 산성화되면 가장 민감한 토양의 미생물이 멸종된다. 그 결과 낙엽, 나뭇가지 등이 썩지 않아 부식물질이 형성되지 않는다. 이 부식물질은 스폰지와 같아 비가 오면 물을 많이 머금었다가 비가 그치면 조금씩 흘러내리게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런 부식물질이 도시의 토양에 잘 쌓이지 않으니 건조해질 수밖에 없다. 몸체의 85퍼센트 이상이 수분인 식물이 잘 살 리가 없다. 그리고 부식질이 적으면 이를 먹고 사는 지렁이가 사라진다. 이 영향은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개구리, 뱀, 새 등의 동물이 멸종된다. 도시에 녹지가 부족하면 남아 있는 녹지도 생태계 구성생물이 거의 멸종되어 생태계의 황무지로 변하게 된다.
사람들은 도심 속의 녹지를 악세사리쯤으로 생각한다. 생태계는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관상수목을 가려서 일부 심어 놓으니 생태계가 복원될 리가 없다.
녹지가 거의 사라진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온전할 리가 없다. 고등동물은 주변환경의 30퍼센트 이상 녹지로 되어 있지 않을 때는 부현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겨 정신질환이 생긴다. 자폐증, 우울증 등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대도시에 범죄발생률이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기오염물질이 계속 정체되어 언제나 독가스를 마셔대니 기관지에 이상이 생긴다. 최근 폐기종, 폐암의 발생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학계의 보고는 우리나라 대도시의 환경상태를 대변해 준다. 이렇듯 생태계 뭇생명체의 터전을 허물어 내고 인간 위주의 도시를 개발한 결과는 마침내 인간마저 살기 곤란한 장소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환경 파괴의 근본 원인은 우리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자연을 기계 정도로 바라보고 이용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 관계로 설정하여 끝까지 지배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이제 이런 자연 지배 사상으로는 지구촌의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서구에서부터 발생된 자성의 목소리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불교사상이 근본이 되는 동양철학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
동양 철학 사상에서는 자연과 인간은 하나로서 인간은 자연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연기사상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생물의 평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살생유택을 가르쳐 왔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소중한 생명체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는 필요한 만큼만 취하라는 사상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에 함께 살고 있는 생물들을 우리 형제처럼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 모두가 자연을 파괴하여 만든다. 그 결과 배출되는 대기 및 수질오염물질은 자연을 훼손하고, 사용한 뒤 발생된 쓰레기는 자연을 못쓰게 만든다.
환경문제를 해결함은 지구촌의 생물들, 더구나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 건강하게 지속적으로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이론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을 실천하는 것만이 지구촌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소비가 죄악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생물을 형제처럼 떠받들고 살며, 날마다 실천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녹색별을 유지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