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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새로운 세기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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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진제 1998년 10월 200호
진제/ 동화사 조실

생명의 근원은 불생불멸이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이 깊고 오묘한 가르침을 불자들은 잘 깨달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이니, 그대로 믿고 따르고 행하는 데 정진해야 한다.
21세기는 동양의 정신문화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그 동양문화의 근간이 바로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 곧 조사선祖師禪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생활 속에서 심성을 개발해서 불생불멸의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사선이 미래세계의 중심된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참선의 근간을 밝혀서 지혜를 얻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한몸이며 세계가 한집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시시비비가 끊어지고 투쟁과 갈등도 사라지고, 평화와 안락의 세계가 열린다.
불생불멸의 경지에 이르려면 어찌해야 할까.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한다. 화두話頭를 연마해야 한다는 말인데, 활구참선법이란 부처님의 심인법을 깨달아 마침내 우주의 주인이 되는 깨달음의 지름길이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그 밑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이 말의 낙처落處는 어딘가.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부처님의 독특한 살림살이를 선양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정법을 이은 마조선사와 임제선사의 대오견성의 자리를 아는 것이다. 눈이 먼 사람들이나 야호野狐들이 부처님의 근본 심인법을 잘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바로 이 정법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통正統을 이어가고 있다.
모름지기 불자들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는 화두를 참구하기 바란다. 모든 사람이 먼저 나를 낳아주신 부처님 이전의 내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의심을 갖는다면 바로 부처님의 심인법을 공부하는 삼세의 공덕을 얻게 된다.
금생이야 부모를 쫓아 사대육신이 생겨났겠지만, 그 이전에는 무엇이었는지를 의심해 보라. 바로 이 의심이라는 한 생각이 훨훨 타올라서 끊어지지 않으면, 여기에 여러 생을 거쳐서 자리잡고 있던 망념된 습기가 씻긴다. 이것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참 의심이 발동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상태가 되어 일주일, 이 주일, 한 달, 두 달, 일 년이 되도록 일념으로 참구하는 경지에 오르게 되면 마침내 도가 열린다. 찰라에 참나를 알아 모든 의심이 깨어지고 부처님의 모든 살림살이를 환히 알게 되어 독존獨尊의 존재가 된다.
이렇게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게 된 뒤에는 태풍이 불어도 동요됨이 없고,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 온세계가 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부처님의 심인법을 자신의 수행법으로 선택할 때는 반드시 불 같은 신심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심인법을 통하면 반드시 정법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로지 부처님의 심인법인 간화선만이 절대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최상승법最上勝法임을 철석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화엄경에도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고, 신심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불자들 신행체계의 첫머리임을 늘 명심해야 한다.
참선 방법도 부처님 이후로 여러 가지가 나왔다. 어떤 이는 염불선을 지도하고, 어떤 이는 관법을 지도하고, 어떤 이는 묵조선을 지도하고 있다. 이것은 활구참선과는 거리가 멀다. 활구참선법이 아닌 이러한 방법으로는 대오견성이 어렵다. 오직 활구참선만이 무상의 지혜가 열리는 최상승법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기고 망지견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 바르지 않으면 즉시 버려야지 망지견妄知見을 붙들고 있으면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행을 하는 이들은 절대로 망지견과 삿된 견해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사회에 윤리가 실종되고 부패가 만연한 것은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 산란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모든 원인은 참나를 알지 못한 데에 있다. 그러므로 참선법으로 참나를 찾을 때 윤리 실종 등 사회문제들도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 도리가 없다.
견성을 하려면 일거수 일투족 한눈 팔지 않고 과거 습기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강렬한 발원이 있어야 한다. 허망된 생각이나 잘못된 망상이 사라질 수 있을 만큼 추상같이 단호한 발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얼마 전 몇몇 스님이 도박을 했다고 해서 시끌시끌했는데 이것은 그 스님들이 다 도 닦는 즐거움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 도 닦는 즐거움을 안다면 절대 그런 부끄러운 행동은 할 수 없다.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시대에도 스님들은 농사짓고 아주 검약한 삶을 살았다. 이는 도가 결코 쾌락이나 일시적인 즐거움, 편안함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는 고행에 있다. 스님들이 고행을 하며 수행에 철저하면 모든 신도와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또 그렇게 될 때 장차 이 나라가 세계정신문명을 선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얼마 전 열린 백양사 무차선회에서 일부 학자들이 제기했던 조사선의 불성론이나 교의에 대한 본성론적 해석 등이 연기․무아 사상에 배치하므로 불교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들은 진리의 당체를 사변과 이론으로 평가하려는 데서 나온 결과이다. 알음알이와 이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자들로서는 조사선을 통해 얻어지는 참나를 그런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나와 무아는 그 경지가 다르다. 참나는 무아의 경지를 투과한 경지임을 알아야 한다. 성인의 경지, 부처님의 경지까지도 투과해야 선의 경지에 이르는 법이다. 조사는 부처님의 경지까지도 투과한 최고의 진리세계에 이른 분임을 잘 알아야 한다. 조사선은 자재의 경지에 이르는 최상승법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독특한 부처님의 심인법은 바로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서양의 학자나 사상가들이 왜 한국의 조사선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서구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21세기 신문명을 이끌 중심사상은 불교, 특히 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는 결코 21세기 새로운 문명체계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참선이 21세기 새로운 문명체계의 대안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모든 국민이 부처님의 심인법을 잘 수행하고 공부해서 21세기를 이끌어가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준비의 선구자는 스님들이 맡아야 한다. 스님들이 고구정령한 부처님의 심인법을 꾸준히 닦아서 국민의 훌륭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참선법이란 반드시 선지식을 정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지도자 그룹격인 훌륭한 스님네가 많아야 한다.
솔직히 조사선은 그 동안 인류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이렇다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사선만이 갖고 있는 수승한 가르침을 사회화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거의 문제점을 철저히 반성하고 선이 미래세계를 이끌어갈 중심사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 마련에 시급히 나서야 한다. 다시말해 부처님의 심인법, 곧 우리나라의 조사선이 그 동안 인류역사에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중심원리로서 확고히 자리하지 못했으며 단지 스님들의 전유물로 내려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수행법이고, 밥 먹을 줄 알면 누구든 다 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밥짓고, 사업하고, 장사하고, 빨래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한생각 돌려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참선이다. 한생각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설사 도를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참선법에 매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두를 들면 쉽게 화두가 이해되지 않고, 치열한 의심도 일지 않아서 고민을 한다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어서 선지식을 친견하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화두는 절대로 이해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망지견이 난 줄 알고 서둘러 선지식을 찾아가 방망이로 세게 얻어맞아야 한다.
죽기살기로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이 왜 죽기살기로 공부를 하는가. 고시에 합격하면 부와 명예와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고시에 합격해서 얻는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의 즐거움이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절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어서 표현할 수 없을 따름이다. 또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경지이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무엇이 좋은지, 과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생을 걸 만큼의 세속적 부가가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수행의 첫 관문인 신심이 부족한 것이니 먼저 신심을 기르는 일부터 해야 한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탈속한 생활, 잡념이 없는 생활, 한량없이 즐거운 생활, 대중을 위해서 솔선수범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경허스님의 상수제자인 혜월 선사는 무심의 경지를 잘 보여준 선지식이다. 이 분이 하루는 한 신도 집안의 49재를 지낼 제물을 사러 저잣거리에 가다가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 불쌍한 아주머니를 만나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주고 돌아왔다. 빈손으로 온 혜월 선사를 보고 절의 대중이 영문을 묻자 선사는 벌써 영가를 극락세계로 천도했네라며 훌훌 털고 들어갔다고 한다.
또 혜월 선사는 누구에게든 주는 것을 아주 즐겨했다. 그냥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마저 몽땅 벗어 줄만큼 주기를 즐겨한 분이었다. 한번은 혜월스님이 절 소유의 좋은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서 산중 논 세 마지기를 개간했다. 이를 본 절의 대중이 어째서 스님은 손해보는 일을 하시느냐고 따지자, 혜월 선사는 “이놈아 어째서 손해란 말이냐. 판 논 다섯 마지기가 어디로 날라 갔느냐. 다섯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새로 논 서 마지기가 더 생겼으니 이익이지 어째서 손해란 말이냐”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해를 벗어나 어디에도 일절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활구참선법이란 부처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을 좇아서 벌어진 백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 최고의 관문만 투과하면 활발발지活潑發地를 얻어서 제불제조의 안목을 갖추게 된다. 활구참선법은 모든 사량분별이 다 끊어지고, 참 의심이 드러나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활연대오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어둠이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가 우리 마음에 남긴 것은 어둠뿐이다. 우리는 지금 고뇌하며 혼돈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끝없는 어둠에도 비상구는 있다. 빛이 있는 곳, 그 곳이 우리의 비상구이다. 어둠을 걷고 활발발한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빛을 찾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빛을 찾아 나아가는 그 길은 그냥 갈 수는 없다. 활구참선의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길에 이를 수 없다. 활구참선법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모든 것을 복원시킬 것이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세계, 윤리와 도덕이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 상상해 보라. 즐겁지 않은가. 사람의 자리가 있고, 향기로운 사람의 향기 가득한 세상. 21세기, 우리는 빛으로 맞이해야 한다. 또 다시 어둠의 연장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 당장 활구참선의 수행을 시작하라. 그리하여 일출처럼 떠오르는 앞으로의 한 세기를 맞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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