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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순수하게 소리에 몰입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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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인묵 1998년 09월 199호
인묵/회암사, 어산학교 교장

어렸을 적 절집 툇마루에 앉아 범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전율과 환희가 온몸을 휘감곤 했다. 범패소리가 봄날 햇살에 섞여 은빛으로 부숴지고 있을 때도 나는 하염없이 그 소리에 취해 있었고, 늦은 가을 황혼녘 낙엽 수북히 쌓인 뒷마당에 서서도 가슴을 적시며 오랫동안 그 소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어이 아에 히에 야 에 히에 야 으으어 으어 어어 으어….’
‘영혼을 울리는 저 깊고도 그윽하며 맑고도 평화로운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어렸을 적 품었던 내 오랜 화두였다.
범패라는 것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중생의 원하는 바를 장엄하고도 환희롭게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라는 것을 알았을리 만무했으나, 나는 그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했고 환희로움이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언젠가 나도 저 소리를 해 보리라.’
속가의 아버님이 승려였고 범패를 잘 하셨던 인연으로 나는 태어나면서 절에 있었고, 때론 며칠 걸려 재가 치뤄지면서 불려지는 범패소리를 들었으니 범패라는 불교의식 음악은 내 숙명적인 신앙이요 화두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심산 유곡에서 들려오는듯 그윽하고도 깊은 소리에 온 마음이 끌려 있던 나는 초등학교 육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예 성대히 불교의식이 치뤄지곤 했던 서울의 봉원사 등지를 찾아다니며 범패소리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리를 배워야겠다’ 는 뜻을 아버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소리를 하려면 출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좋다고 그냥 당장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뒷날 내 스스로 터득한 일이지만 범패라는 것이 종교의식에 수반되는 음악인지라 의식을 집전하는 지위에 있는 자만이 범패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으니 범패를 하려면 출가승이 되어야만 가능했다.
출가의 본분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내 어린 영혼을 뒤흔들고 지나가곤 하던 범패소리만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출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던 어느 날, 아침나절 아버님과 친분이 있던 전주 남고사 주지 스님께서 우리 절에 들르셨다가 나를 보시더니 물으셨다.
‘너, 나 따라 절에 가서 살지 않으련?’
몇 해 전 한 스님을 따라 타박타박 잰 걸음으로 집문을 나섰던 내 누이처럼 나도 그 길로 스님을 따라 집을 나섰으니 길고 긴 여정 출가사문의 첫걸음이었다.
금산사 말사인 남고사는 주지 스님과 또 한 스님만 있던 단촐한 절이었다. 공양주보살이 따로 있어 밥하고 찬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 산에 가서 나무하고 절에 딸린 전답 부치는 일은 내 차지였다. 모든 것이 범패를 배우기 위한 수순이려니 생각하니 고단한 줄 몰랐다. 절에 가자마자 예불에 필요한 예식들을 익혀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올릴 때면 환희심으로 가득차곤 했다. 예식을 하는 것이 좀 익숙해지면서 남고사에 불공이나 시식이 들어오면 행자인 내가 염불을 하곤 했는데 염불하는 내 소리를 듣고 신도들이 한결같이 목청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절집안 일에 어느 정도 틀이 잡히자 나는 불교의식이 담겨 있는 책을 하나 구입했다. 소리를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범패가 불교의식에 쓰이니 불교의식에 쓰이는 내용을 전부 외우자는 생각이었다.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뜻은 전혀 몰랐으나 토가 달려 있는 한글 음으로 무조건 외웠다. 책에 있던 의식 내용을 하나씩 종이에 베껴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밭일을 하면서도 나무를 하면서도 꺼내 외우고 또 외웠다. 얼마나 몰입을 해 외웠던지 나중에는 의식문 하나하나를 앞으로는 물론 뒤로도 줄줄 외워버리고 말았다. 어서어서 이 시간을 통과해 내 영혼을 뒤흔들던 소리를 내 스스로 부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돌아보면 내 생애 그 때처럼 맑고 순수하게 소리에 대한 열정으로 몰입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뒤에 강원을 끝내고 내 아버님을 스승으로 하여 소리를 본격적으로 연마할 때도 행자시절의 그 때처럼 맑디 맑은 영혼으로 소리에 다가가진 못했던 것 같다. 얼마전 총무원의 의뢰를 받아 불교의식을 전부 담아낸 ‘통일법요집’ 을 만들어 내 놓았는데, 책을 만들면서 나는 행자시절 한 해 동안 마르고 닳도록 외웠던 의식문들이 한자도 빠짐없이 또렷하게 머리 속에 환히 그려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는데 행자시절의 소리에 대한 열정으로 몰입했던 그 암송의 세월이 만들어낸 공덕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 때의 공덕으로 지금 ‘범패한다’ 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소리에 대한 열정보다 열네살 어린 소년이 더 감당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육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하루 종일, 의식문을 베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절일로, 논밭으로 다니던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은 어쩌지 못했다. 가을 어느 날 밤, 마루에 걸터앉아 올려다본 달이 어찌 그리 시리도록 밝던지. 나는 드디어 짐을 싸고 말았다. 집 뒤뜰에서 올려다보았던 휘영청 밝은 그 달빛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주 가슴 깊이 묻혀 있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건드렸고, 드디어 나는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서 가야지, 가서 어머니 아버지를 뵈어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집을 나올 때 가지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고 보퉁이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모진 마음을 먹고 댓돌을 내려서는데, 그만 주지 스님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승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께서 물었다.
‘어딜 가려는 게냐?’
그리도 부모님이 그리워 짐을 쌌건만 주지 스님 앞에선 아무 소리도 못하고 가슴만 철렁 내려앉을 뿐이었다. 스님께선 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보따리를 빼앗아 방으로 들어가며 준엄한 나무람대신 한마디 하셨다. ‘어서 들어가거라.’ 나는 끝내 절문을 나서지 못했다. 내 고향 또한 전주였으니 부모님 계신 곳이 그리 먼 곳도 아니었으나 집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날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섞여 창호지 문으로 은은히 배어 들어오던 달빛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새 몸을 뒤척였으나, 다음날 새벽 어김없이 일어나 도량석을 돌고 아침예불을 정성스레 올렸으니 나는 이미 절집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열넷에 산문에 들어와 어언 스물여덟 해가 흘렀다. 그간 강원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범패를 배우고 노래하며 중물이 들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로소 눈을 뜨면서 내가 부르는 노래가 불교에 있어 지엽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로 방황도 했었다. 그러나 소리도 화두를 드는 지독한 집중과 일념으로 헌신해야만이 제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사십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부처님께 올리는 소리에의 몰입이 내게 있어선 가장 수승한 수행의 길임을 아는 데 삼십여 년이 걸린 셈이다. 허허허, 이토록 늦게 온 깨달음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