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유형과 본성론적 유혹
인격적인 종교와 비인격적인 종교로 종교의 유형을 나눈다면, 인격적인 종교에서 구원의 방법은 신의 은총과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비인격적인 종교에서는 자기 스스로 이상의 세계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구분은 타력과 자력이라는 태도의 차이를 낳는다.
유신론적 종교에 있어서 신은 타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격적인 실재이다. 신적인 존재는 증명할 수도 없지만 증명할 필요도 없는 존재이다. 유신론적인 구조에 있어서 신은 신앙의 대상이고, 믿음의 체계일 뿐이다.
한편 인간의 종교적 태도를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구분한다면, 선적인 방법은 내향적인 방법이다. 외향, 내향의 입장 차이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종교적인 이상,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 그리고 사용되는 심리적인 기재가 달라진다.
외향적인 태도는 종교적 이상을 신의 나라 천국에 둔다. 불교의 극락이나 정토라는 관념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내향적인 태도는 열반이라는 세계를 설정하고 있다. 천국에는 천국을 주재할 신을 필요로 하지만, 열반의 세계에서는 신적인 요소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신론과 무신론이 차이이다.
다른 한편 종교를 심리적인 성향에 따라 정적인 종교와 지적인 종교로 구분하기도 한다. 정적인 불교는 감각이나 감성에 의존하고 지적인 종교는 이성이나 직관을 주기능으로 사용한다. 이와 같은 분류법에 따르면,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정적인 종교에 속하고, 힌두교와 불교는 지적인 종교에 속할 것이다.
선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공안公案이라는 화두가 있다. 그러나 화두는 관적인 대상도 아니고, 명상적인 관념의 내용도 아니다. 공안에서도 관념적인 내용을 가질 수가 있으나 명상적인 방법과 같이 진리로서의 관념적인 내용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고의 기능이 가지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의 논리적 사유를 배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관적인 대상은 그 대상에 정신을 집중시켜 망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공안도 화두라는 대상을 통하여 망념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지만, 마음에 의심이라는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대상화되는 일체의 관념이나 대상도 부정하고, 오직 의심이라는 식識의 작용만 일어나게 하는 사고의 형식이 공안이라는 것이다.
공안의 참구는 외부의 자극이나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데도 있지만, 화두라는 의단은 의식의 작용을 치열하게 하는 데 있다. 정의 극단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이지만, 각성된 식의 작용은 순간순간의 자극에 대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반응하는 상태인 것이다.
의심이라는 의식작용이 의단疑團이 되고 대상이 되는 객체도 의식하는 자아로서의 주체도 사라지고, 인간의 근원적인 모순인 주와 객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이 파기되어 구조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범신론적인 실재론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경험이다.
불교 기본개념에 대한 본성론적 해석과 그 문제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뜻으로 상의성, 관계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로서의 존재이고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논리는 상주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한다. 고정불변하는 실재로서의 무엇이 존재하고, 근원적인 근거로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재론적인 사고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절대신의 관념이나 범신론적인 개념을 갖게 된다. 신과 인간, 본체와 현상, 주관과 객관, 성性과 상相 등 실재론적인 이원론의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은 존재를 부정하는 유有의 상대 개념으로서 무도 아니고 모순 개념으로서 비유非有도 아니다. 실재적인 사고가 가지는 실체로서의 존재 개념에 대하여 관계로서의 존재를 고정 불변의 자성에 대하여 변화의 개념을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공은 유이면서 공이고, 공이면서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근거로서 자리잡는다. 공의 이론은 연기의 발전된 논리이다. 연기 곧 공이요, 중도中道이다. 인식론적인 영역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영역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연기는 생멸변화하는 현상계의 법이요, 공은 영원한 불성의 속성이다.
제행무상의 제행이란 무엇에 의해서 지어진다는 것, 즉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서 형성된 물, 심의 모든 현상을 잠시도 쉬지 않고 생멸변화하여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는 물, 심의 모든 존재에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실재론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자성을 가진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열반적정에 있다. 열반이 욕망의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원론적인 구조 속에서 본체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본체계라는 근거와 연결됨으로써 현상계는 무상하지만, 본체는 상주하는 개아個我가 아니라 본체로서의 대아大我는 영원한 아트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을 가르치는 열반경에서는 원시불교의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의 교리가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네 가지 덕으로 설해진다. 전제되는 것이 진제와 속제라는 이제二諦의 구분이다. 속제의 현상계는 무상하고, 괴롭고, 공이고, 무아이지만, 법신으로서의 불신은 상주하고 불생불변하므로 즐거움이 있고, 청정한 불성으로서의 나라는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본성론적인 구조로서 발전한 형태이다.
불교의 신앙화와 본성론적 해석의 문제
불교의 신앙화가 불교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시불교의 가르침이나 신적인 대상도 관념적인 내용도 부정하는 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비불교적이다. 이러한 불교의 신앙화 경향은 타락인지 발전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불교의 본질적인 면을 변화시켰고, 불교 의례에 다른 종교적인 신앙을 습합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통불교라고 자부하는 일이지만, 불교적 이념이나 행동양식에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원시불교가 열반에 이르는 실천에 그 중점을 두었다면 여기서 파생된 대승불교는 보살적인 행위에 그 가치의 중심을 두고 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신은 아니더라도 보살도 인격성을 갖는다. 중생은 보살의 원이나 가피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는 신앙적인 종교의 형태를 가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에 변모를 가져왔다.
불교의 신앙화 문제는 감성적인 행위와 이성적인 자리 사이의 갈등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의 자아 중심성은 생존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모든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업에 의한 윤회의 원인이다. 이러한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은 자아를 우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신적인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개체보다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그 어떤 것, 국가, 민족, 이념, 신념 위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확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자기를 무화시켜 진리의 바다나 신의 품속에 뛰어들어도 자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은 이데올로기적인 자아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인격적이고 무신론적인 태도는 자아 중심성에서 멀어지게는 하지만, 역사의 의미를 박탈한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의 진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에서 나타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의 의지도 우주의 법칙도 필연적인 역사의 발전 법칙도 없다. 역사가 도전과 응전의 관계 속에서 엮어져 가고, 연기적 논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만들어져 가는 역사이다.
기독교가 신화적인 태도에 기반을 두었다면, 불교는 존재론적인 본성론의 입장이다.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상황은 신화적이지도 않고, 존재론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기능적인 입장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본성론적인 태도가 아니라 연기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포스트모던적인 상황이나 신과학적인 입장은 새로운 불교의 장이 될 수 있다. 미래는 비관도 낙관도 아니다. 문제는 본성론적인 집착에 있다. 신적인 성화나 신화를 강조하기 보다는 전후제前後際가 끊어진 현전顯前의 일상에서 성聖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선과 본성론
선의 방법 중에서 가장 정형화된 것은 묵조선黙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다. 묵조와 간화의 차이는 정定과 오悟의 인과 관계에 있다. 묵조는 정이 깨달음의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비해 간화의 입장은 정과 오의 인관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 공안의 기능은 의심이라는 의식의 각성이고, 묵조에서 추구하는 정은 마음의 침잠이다. 정을 추구하는 목적이 고요한 마음에 본성이 현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선수행방법을 행하든, 선의 방법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면서도 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선불교가 기반하고 있는 본성론적인 전제들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불교 전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정토적인 입장이라면, 본성론적인 태도를 방편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본성론적인 사고가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일반적인 종교적 수행과 선적인 방법의 차이는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나 진리라는 관념적인 내용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데 있다. 선적인 방법이 가지는 중요한 기능은 객관화되는 일체의 대상이나 관념을 부정함으로써 대상의 우상화나 관념적인 내용의 절대화가 낳는 병폐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