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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과 윤리倫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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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강 - 김성철 1998년 09월 199호
김성철/중앙승가대 강사

불교인이든 비불교인이든, 공空의 교설을 접하게 되는 경우 언제나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다. 일체가 공하여 선악善惡이 없다면 선을 행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속이 곧 열반이라면 수행도 필요 없고 막행막식을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만일 선이나 악, 옳다거나 그르다는 분별을 모두 떠난 것이 불교의 공空 사상이라면, 불의不義를 시정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사회 참여는 분명 반불교적反佛敎的인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공空의 교설은 이렇게 세속적 윤리와 무관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는 교설일까? 사실, 극히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과거에 막행막식적 무애행無碍行을 견성見性의 징표로 착각했던 수행인들이 터득했던 공空은, 그들로 하여금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중론中論」이나「대지도론大智度論」등의 논서를 보면 공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를 경계하는 구절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공과 세속적 윤리가 갈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용수龍樹가 사견邪見이라고 부르며 우려했던 관점으로, 후대의 유식불교도唯識佛敎徒들에 의해서도 철저히 비판받았던 악취공적惡取空的 공견空見인 것이다.
공과 윤리는 결코 갈등하지 않는다. 교리적으로는 공 사상의 이제설二諦說에서 엄연히 속제俗諦로서의 윤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자타自他가 불이不二하기에 우리는 이타적利他的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윤리가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윤리란, 공에 대한 집착이 야기한 막행막식적 ‘무애행無碍行’도 아니고 아상我相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위선僞善의 윤리도 아닌, ‘내가 무엇을 한다’는 관념없는 ‘무애심無碍心’에 입각한 육바라밀의 윤리이다. 진제적眞諦的 공관空觀과 속제적 선행善行이 함께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이야말로 이기심이 해체(我空)된 상태에서 분별없이(法空) 행해지는 무주상無住相의 ‘공의 윤리倫理’인 것이다.
또, 세속적 윤리는 무조건적인 지상명령이 아니다. 만물의 실상인 공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바로 세속적 윤리이다. 따라서 공성에 대한 자각의 깊이에 부응하여, 그 윤리의 차원도 심화된다. 왜냐하면 공과 윤리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일한 구조의 다른 측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가 능소불이能所不二의 공성을 위배하여 분별을 시작할 경우 ‘자가당착’ 이라는 논리적 역설에 빠지듯이, 우리의 행위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성을 위배하여 애증을 표출할 경우, 우리는 ‘자업자득’ 이라는 행위의 역설에 빠진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론이성理論理性의 한계를 지적한 칸트는 논리적 사변을 통해서는 결코 윤리와 도덕의 당위성이 도출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 양자는 합일合一된다. 곧, 공성에 대한 지적인 자각을 통해 도덕률이 도출되는 것이다. 티베트의 밀교에서는 이를 남녀가 교합한 모습의 합체존合體尊으로 형상화하였다. 반야 지혜로서의 어머니(般若母)와 자비 방편으로서의 아버지(方便父)가 남존男尊(yab)과 여존女尊(yum)의 모습으로 교합交合하고 있는 모습은 ‘이론이성’의 극단에서 발견되는 공성과 ‘실천이성’의 원동력인 대비심이 합일한 대략구현의 경지를 상징화한 것이었다.
공성을 체득한 보살은 결코 무차별과 무분별의 피안에 안주하고 있는 거싱 아니다. 그 어느 때 그 어느 곳에서든, 그 때 그 곳에 가장 알맞는 차별과 분별로써 이타의 대비행을 시현한다.
일체법의 공성을 관조하신 관세음보살께서는 그래서 천만억의 화신으로 나타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