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 실재와 상징
대부분의 종교는 우상숭배를 한다. 그러나 이를 논하려면 우상숭배에 관한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첫번째 의미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숭배하는 행위’를 뜻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영웅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만나면 사람들은 그를 실재의 영웅으로 착각하고 동경한다. 반대로 악역을 맡었던 배우를 만나면 그를 실재의 악인으로 여기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해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작가와 감독이 만들어 낸 인물이 있을 뿐, 영웅도 악한도 실재하지 않는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작가나 감독들은 끊임없이 대중의 우상을 만들어 내고 대중은 그렇게 가공된 우상을 마치 실재 인물인 듯 숭배하하게 된다.
두번째 의미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눈에 보이는 사물로 표현한 상징물에 대한숭배’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믿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像을 만든다. 불자들은 불상을 만들고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상을 만든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 대신 치른 예수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만들고, 불자들은 진흙탕 같은 온갖 번뇌를 극복하고 성취한 청정한 희열의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연꽃을 그린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경지에 바치고 싶은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경의와 숭배를, 보이는 상징을 향해서 보이는 몸짓으로 경배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눈에 보이는 사물로 표현한 상징물’ 인 우상의 종류는 비단 흙을 빚어 만들고, 나무를 깎아 만들고, 돌을 쪼아 만들고, 철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조상彫像만이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소리나 몸짓이나 문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없는 초월적 실재나 경지를 그림과 소리와 몸짓과 문자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 이 모든 것은 다 상이다. 우상이란 오감을 초월해 있는 실재를 오감의 대상, 곧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가우상 숭배를 부인하지만, 이 두번째 의미의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칸트의 말대로, 형상을 초월하는 실재는 인간 오감의 대상이 아니므로 그것 자체로서는 인식될 수도 없고 표현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믿는 초월적 실재나 경지를 조상彫像이나 그림, 소리나 몸짓, 또는 문자 등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상징은 필수 요소다. 그것이 종교에 적용될 때 바로 우상 숭배가 된다. 그래서 우상 숭배는 모든 종교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인간은 우상 없이는 결코 초월적 절대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조성彫像, 그림, 소리, 몸짓, 문자등에서 무엇을 중시하느냐만 다를 뿐, 모든 종교는 이들 우상을 숭배한다.
우상숭배의 다양성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실재를 상징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데는 종교 전통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가톨릭은 조상彫像을 사용하지만 다만 예수와 마리아에 국한한다. 정교회는 그림까지는 허용하지만 조상은 사용하지 않는다. 개신교는 단지 십자가만 허용한다. 십자가도 보이는 사물로 만들어진 상징으로서 일종의 조상이지만, 하여튼 개신교는 가톨릭과 달리 십자가위에도 예수상을 조각하지 않고 민짜 십자가만을 허용한다. 유교도 우상을 배격한다. 초월적 존재인 신주神主는 글자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 그림이나 사진은 사용할 수 없다. 불교는 조상彫像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우상을 모두 사용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우상 타파를 주장하지만, 이를 가장 강력하게 부르짖는 종교는 이슬람교다. 무슬림들은 우상타파에 적극적인 기독교인들마저 도리어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다. 하느님은 오로지 한 분뿐인데 기독교인들은 성부니, 성지니, 성령이니 하면서 하느님을 세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초월자 하느님은 한 분뿐이므로 세 분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자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우상을 파괴하려 드는 이 무슬림들도 자신들의 조상들이 숭배하던 수많은 우상중에서 카바 신전의 검은 운석만은 남겨 두고 숭배하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알라의 말씀인 쿠란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우상타파에 적극적이면서도 경전만은 절대시하여 한 글자 한 구절도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산불교의 우상타파
우상 타파의 극치를 보여 주는 전통은 중국의 선불교다. 이미 논한 대로 문자로 된 경전도 상징이다. 경전은 피조물의 오감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창조주 하느님, 중생의 오감으로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가능한 데까지 알게 하기 위해서 문자라는 상징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경전이 하느님이거나 깨달음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경전은 그것을 표현하는 개념적 수단으로서의 상징일 뿐이다. 경전은 생각이나 개념을 기호화 한 것이고 말씀은 그것을 음성화한 것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형상을 초월한 실재를 형상으로 표현한 상징은 모두 우상이다.
선불교는 이 생각이나 개념이 보이지 않고 언표言表할 수 없는 실재를 가리키는 상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실재를 직접 가리킬 뿐(直指人心), 그것을 가리키는 상징에 불과한 개념에는 결코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不立文字). 따라서 단하 천연 선사는 목불상을 땔감으로 썼고, 덕산선감은 금강경을 불살랐으며, 임제 의현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갈파했다. 이보다 더한 우상타파주의는 없다. 선불교는 상像으로 구체화되기 이전, 우상화의 첫 단계인 ‘생각’마저 없애 버리는 실천에 몰두한다.
우상에 집착하는 사람들
실재와 상징의 본성을 꿰뚫어 안다면 우상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우상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우상을 긍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다만, 상징을 실재로 착각하는 사람들, 상대적이며 유한한 것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집착하는 사람들, 곧 우상을 우상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우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우상을 우상인 줄 알고 숭배하면 우상 숭배가 아니고, 우상을 우상인줄 모르고 숭배하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증거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예수의 생애」를 쓴 엔도 슈샤꾸(遠藤顧週作)는 부활은 ‘사실’이라기보다 믿는 사람의 가슴속에 담긴 ‘진실’이라고 했다. 예수의 부활은 다만 믿는 자의 삶으로써 증거할 수 있을 뿐이다. 단군을 믿는 사람들의 삶도 꼭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