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천재天災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땅이 품은 모든 것, 흙과 물, 천연 자원 등의 무정물이나, 땅에 목숨줄을 대고 사는 유정물과의 관계를 잘못 읽은 사람 본위의 이기심 때문이다. 서로 함께 몸 기대고 살아야 할 공생의 관계가 아니라, 정복하고 소유할 대상물로 파악하고 홀대해 온 사람이 필연으로 맞게 된 응보이다. 한정된 자연 자원의 소비를 전제로 이루어진 산업 문명의 한계를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요즈음, 인류의 종말은 외계의 침입이나 은하계의 불의의 사고로써가 아니라, 환경의 재난으로 자초될 것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있게 들릴 즈음이다. 오늘 우리가 맞게 된 경제적 어려움도 끝간 데 모를 사람의 소유욕을 모태로 삼는 산업 문명에 휘둘려 온 결과일 것이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바, 갱생의 단초는 만물의 어미인 땅과의 관계를 생태적으로 회복하는 일이라 그는 믿는다.
우선 위기를 기회로 삼기로 한다. 직장에서 놓여 난 수많은 유휴 인력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귀농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될 요소가 되어 줄 것이다. 실상사 등에서 귀농 교육을 받은 인력이 첫번째로 부닥치게 될 문제는 경작지를 마련하는 문제일 텐데, 조계종이 보유하고 있는 일억 평 토지를 그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사찰이 소유한 경작지에서 나오는 토지는 사찰의 주요 재정원이 되어 주었지만,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으니 노는 땅이 늘어 수행의 여건은 점점 나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그 땅을 목초지로 이용한다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사료 문제도 백 프로 해결될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식량의 자급 문제는 남북통일 이후를 대비한 중요한 선결 문제이자, 계속되는 기상 이변으로 닥칠 식량의 위기로부터 우리의 자존자립을 지켜 줄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 여긴다.
제가 먹을 것, 내다 팔 것을 따로 짓는다고 한다. 땅을 의지하여 생물을 길러 내는 농부의 마음이 이와같이 되어 버렸음을 누가 탓할 것인가. 비료와 농약은 땅을 죽이고 사람들의 심성을 죽이어 더불어 산다는 공동체 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경제 발전 위주의 정책을 펴 온 결과이다. 텔레비전을 볼 것도 없다. 그는 궁벽진 이 곳에서마저도 정신의 뿌리가 뽑히어 거덜나고 황폐해진 군상들을 참담히 확인한다. 독이 밴 손으로 지은 생물은 먹는 사람도 독으로 물들이고 만다. 유기농으로 땅을 되살리는 일은 곧 잃은 불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은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직거래식이라야 재배자나 소비자에게 두루 이롭다. 농산물의 유통 마진은 평균 사십 퍼센트, 많게는 육십 내지 칠십 퍼센트에 이른다. 그러나 농협의 직거래 센타 등 집단화된 체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따로 더 들기 마련이니, 이상적이기는 소비자가 필요한 만큼 주문을 받아 재배하는 것이다. 이 일은 결국 신도회 같은 실제 소비층에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될일인데, 먼저 능인선원, 구룡사 등 신도회 조직이 활성화되어 있는 대도시의 사찰 등에서 그 일을 시작해 주기를 그는 바란다.
적문스님등, 전래의 사찰 음식을 연구 보존하는 한편으로 대중화를 꾀하고 있는 분들도 귀히 여긴다. 그가 하는 일이 인공 감미료와 화학 조미료로 뒤발이 되다시피한 음식 문화의 본디 자리를 찾게 해 주는 뜻깊은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되찾은 입맛은 유기농으로 가꾼 작물을 찾게 될 것이었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 약사암이 앉은 땅은 삼만 평이 넘는데, 그는 이 땅을 그의 원력을 실천에 옮길 터전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요즘 재단 설립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대처로 나가서 다시 볼일 없을 듯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자신이 펴려는 운동에 동참해 주기를 호소한다. 서울의 세곡동 법수선원에 나가 한 달에 두번 법문도 한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돌아와 밭을 일군다. 이런 제 뜻에 동참해 줄 자산가들이 울타리가 되어 그가 말하는 “불교진흥기금” 이 웬만큼 조성이 되면, 자신이 궁극으로 껴안을 사람은 아마도 기존의 질서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뒤둥그러진 사람들, 제가 흘린 땀값을 온당히 지불받지 못하는 소외된 층이 될 듯하다.
일전에 불교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이 곳까지 찾아온 사람 하나 있었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사람인 듯해 보였는데, 시장기가 웬만큼 가시자 이 곳의 혹독한 일감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났다. 그의 그러한 안일함은 그의 등을 바라보아야 했던 자신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그래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구조적으로 몸 담은 환경의 황폐함 때문이지 그의 잘못은 아니라 여긴다. 오히려 종교가, 불교가 그들을 진정으로 껴안은 적이 있었는지 반성한다.
그에게 있어 이 시대에 진정한 수행자의 의미란, 그들과 동사섭하는 것이다. 생산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면서, 그들이 진 짐을 나눠지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 짧은 기간이나마 원력을 세우고 이 곳에 씨앗을 묻는 동안, 가사 장삼을 갖춰 입을 틈도, 예를 갖춰 바릿대를 쓰고 닦을 시간도 없었다. 승복을 입어야만 중이고, 좌복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 삼매에 드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다. 그가 한 때 제가 궁구할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바, 경전이란 강 건너에 이르면 버려야 할 뗏목이지 평생을 붙들고 거기에 천착할 궁극의 것이 아니다. 그 방편이 무엇이든, 참된 각자覺者란 제가 구한 보리를 혼자의 양식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처하는 공간에서 깨달은 바를 실천하여 형상화시킴으로써 공空에 빠지지 않는 자이다. 세상 속에서 경계에 부닥칠 때 현실과 타협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을 법다이 지키는 자이다. 사문이란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의 옷자락을 삿되이 붙잡을 이른바 딸린 권속도 없으니 이 아니 유리한가.
그가 보건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의 말씀은, 노동을 불성을 깨우치는 보조 수단으로 삼으라 하신 뜻이 아니다. 수행자가 노동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을 강조한 말씀이시니, 이 시대의 수행자들이 실천으로써 절실히 들어야 할 화두이다.
그가 오늘 삽 한 자루로 오십 미터쯤 되는 초입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돌을 골라 낸 땅을 부드럽게 일구어 옥수수를 심고 거두는 뜻이 그러하다. 죽기 살기로 보낸다는 나날, 스스로 평하건대, 인내심도 포용심도 웬만큼 갖춘 듯하나 예민한 감성으로 “한계” 를 넘기어 터지고 말면 아무도 못 말리는 성품이라 하니, 아마도 그러한 자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나날인지도 모른다. 혼자 깨치어 수준에 이른 한방 의술 등, 재주가 갖가지로 많으니 한 가지 일에 매진하지 못하고 비어져 나가려는 자신을 붙잡아 앉히는 고된 나날인지도 모른다.
일천삼백 미터 높이의 사자산(백덕산) 기슭 한중간이니, 볕이 일찍 드는 것도 일이 되는 곳, 동리 이름이 아침동(朝洞)이었다. 아침동에 해 지고 초열흘 달이 가만히 떠서 동리 이름 지운다.
불이 안 들어와.
마을 불은 들어와 있네. 어머니가 전선에 젖은 빨래를 널어 그래요.
“보고 또 보고”는 오늘 밤 못 보겠네, 아이 참….
호박꽃은 낮 동안 난만히 벌렸던 입을 닫은 채 함초롬하고, 땅 깊이 흐르던 물이 제 몸 드러내는 언저리로 반딧불이 한 마리 날아오른다. 그 미물은 제 몸에서 낸 빛으로 어둠 속에다 고운 선 하나 그어 놓는다.
글/김영옥 사진/홍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