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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약사암 성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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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8년 09월 199호
어느 날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과도 같은 배 붉은 고추잠자리가 하늘에 한가득 떠올랐다. 모르는 사이 벌써 가을인가. 그러나 짚어 보니 아직 그럴 수는 없을 때였다. 때 아닌 더위로 일찍 날개 달고 나오니 더위도 한중간일 때라, 그렇게 세상 속으로 나온 놈이나, 그 날갯짓으로 높푸른 가을 하늘이 떠올라 잠시 황홀해 했던 사람이나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노릇을 어찌 하나. 지내 놓고 보니 그것은 가을의 전령이 아니라, 온 나라를 수장시키고야 말겠다는 듯이, 투견처럼 흰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었던 수마의 전조였나 보다.
올해도 초록 한가지로 심심한 때를 능소화 제 혼자 붉게 타올라 그 단조함을 깨고, 울타리 없는 집의 초입 땅에 앙바틈히 뿌리를 박고 꽃을 피운 봉숭아도 지난해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기상대 관측사상 시간당 강우량 최고, 일일 강우량 최고, 연중 강우량 팔구십 퍼센트에 이르는 집중호우. 지리산 어름의 산과 들을 할퀴고, 사람 목숨 여럿을 간단히 앗아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올 여름 물난리 직전, 평창읍 입탄리 가는 길, 손님 없어 한적한 메밀국수 집에 들어 요기를 하자니, 해가 나다가 빗방울이 듣거나 하면서 사위가 무섭게 조용했던 것도, 지내 놓고 보니 어떤 전조같이만 느껴진다.
메밀은 이맘때 이 곳에 유난히 성할 생물이기로 그 꽃으로 눈호사나 하쟀더니 메밀밭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생각난 듯 띄엄띄엄 도라지만 희고 푸른 꽃을 피워 더위를 눅이는데, 그나마 꽃떨기가 쇠잔한 것들이 많다. 지난해 심다 버려 둔 밭에서 그저 목숨껏 피워 올린 것들인 모양이다.
평창읍을 질러 흐르는 평창강, 오대산 부근의 계방산에서 발원된 것이다. 밭작물이 주를 이루는 이 곳에 너른 평지를 잠깐 만들어 벼를 키우는 곳. 강 따라 난 길을 달리다가 그 평지 버리고 입탄리로 꺾이어 들어선다. 노래재 너머로 가풀막지고 휘어돌림이 급한 길 한 줄 이어진다. 길 끝에 인가가 있기는 한지, 길바닥에서 인적을 찾으나 옅어서 불안한 마음이 된다.
표지판 하나 없는 길, 뚫려 있으니 그저 기듯이 나아가다가 약수초등학교 입탄 분교에 이른다. 산 속 학교 터수로는 건물이 두 동인 데다 운동장도 좁지 않다. 그러나 이 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는 모두 넷, 봉숭아, 참나리, 패랭이 따위가 핀 교정에는 검은 나비마저 두엇 떠올라 있어 그저 정물화 같다.
차를 버리고 한 시간 남짓 걷는다. 개울을 따라 인가는 없지 않으나 묵혀 둔 밭도 흔하고, 밭 속에 몸을 묻고 일하는 사람은 팔십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 보았을 따름이다. 살던 사람 떠난 지 오래인 듯, 집 앞 마당은 물론, 지붕 위까지 잡초가 무성한 빈집도 지난다. 한낮의 볕은 익숙치 않아 견디기 힘들어서 그 참에 땀 한 번 제대로 흘려 보는데, 길 끝에서 대궁이 잘린 옥수수를 그러모으고 있는 사람 하나 만난다. 민소매 런닝셔츠에 트레이닝복 하의 차림, 따가운 볕을 가리려 모자까지 눌러썼으니 스님인 줄 알아볼 도리가 없다. 성광 스님, 두 해째 이 곳에서 고추와 옥수수를 혼자 힘으로 심고 거두고 있다 했다. 요즘은 두 달 전에 나이 쉰을 넘기고 처음 거둔 상좌 하나가 그의 일손을 돕고 있지만, 괭이 한 자루로 혼자 돌산을 일구어 마련한 땅이 육천 평, 그 땅에 옥수수 오백 접을 심었다.
늦은 오후가 되니 이미 집 앞 마당에 펼쳐진 평상은 식어 서늘하다. 이야기는 그치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는데, 대롱으로 흘러나오는 석간수 물 줄기는 실하여 그 장한 목청은 한결같다. 여든여덟, 미수米壽의 연세가 믿기지 않게 정정한 그의 어머니가 찰옥수수를 한 소쿠리 쪄내 왔다.
퇴비 값이 사천 원씩만 해도 계산이 맞겠는데, 육천 원을 달라고 해요. 씨앗 값도 세 배가 올랐어요. 배추씨 한 봉다리에 오천 원하던 게 만오천 원 달래네.
웃거름으로만 복합 비료를 한 번 얹었을 뿐, 퇴비로써만 지은 옥수수는 깊은 맛이 났다. 그 옛날에 먹던 맛이다. 화학 비료를 써서 키운 것을 당원을 푼 물에 풍덩 담가 삶아 파는 요즘 옥수수에는 댈 게 아니다. 지난해는 집 짓는 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없어 작황이 시원치 않았었다. 그래서 올 농사를 기대했더니, 이번에는 냉해가 닥치어 칠월 초에 거두어야 할 것이 한 달을 넘긴 지금까지 볕 좀 더 보자고 들어 그의 애를 태운다.
그가 오늘 돌산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옥수수를 심는 것은 여러 해 전부터 공양주 노릇을 해 주면서 “스님을 모시고” 사는 어머니와 자신의 두 입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이 산중에 농업을 자립 기반으로 삼는 생활공동체 건립을 꿈꾸며 그 터를 닦는 중이다.
속향이 서울인 그가 통도사로 출가하여 포교 현장으로 삼았던 곳은 주로 부산과 진주 등 남쪽 지방이었다. 노스님인 성수스님이 총무원장직을 맡고 있을 때 태흥 은사 스님을 거들어 한 해쯤 조계사 살림을 맡아 산 적도 있다. 그러나 포교지를 만들어 돌리고, 많을 때는 한 달에 스물일곱 번에 이르는 법회를 보면서 불음을 전하려 애쓰기도 했으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좌절감만 깊어진 세월이었다. 그 좌절감 끝에 결정한 칩거 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원력을 세움으로써 끝을 보게 된다. 좌절의 골은 아직도 자신에게 깊은 것인지, 그 계기를 그저 자신을 부추킨 무리의 말에 “귀가 얇아서” 따랐을 따름이라고 슬쩍 비켜간다.

오늘의 천재天災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땅이 품은 모든 것, 흙과 물, 천연 자원 등의 무정물이나, 땅에 목숨줄을 대고 사는 유정물과의 관계를 잘못 읽은 사람 본위의 이기심 때문이다. 서로 함께 몸 기대고 살아야 할 공생의 관계가 아니라, 정복하고 소유할 대상물로 파악하고 홀대해 온 사람이 필연으로 맞게 된 응보이다. 한정된 자연 자원의 소비를 전제로 이루어진 산업 문명의 한계를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요즈음, 인류의 종말은 외계의 침입이나 은하계의 불의의 사고로써가 아니라, 환경의 재난으로 자초될 것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있게 들릴 즈음이다. 오늘 우리가 맞게 된 경제적 어려움도 끝간 데 모를 사람의 소유욕을 모태로 삼는 산업 문명에 휘둘려 온 결과일 것이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바, 갱생의 단초는 만물의 어미인 땅과의 관계를 생태적으로 회복하는 일이라 그는 믿는다.
우선 위기를 기회로 삼기로 한다. 직장에서 놓여 난 수많은 유휴 인력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귀농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될 요소가 되어 줄 것이다. 실상사 등에서 귀농 교육을 받은 인력이 첫번째로 부닥치게 될 문제는 경작지를 마련하는 문제일 텐데, 조계종이 보유하고 있는 일억 평 토지를 그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사찰이 소유한 경작지에서 나오는 토지는 사찰의 주요 재정원이 되어 주었지만,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으니 노는 땅이 늘어 수행의 여건은 점점 나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그 땅을 목초지로 이용한다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사료 문제도 백 프로 해결될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식량의 자급 문제는 남북통일 이후를 대비한 중요한 선결 문제이자, 계속되는 기상 이변으로 닥칠 식량의 위기로부터 우리의 자존자립을 지켜 줄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 여긴다.
제가 먹을 것, 내다 팔 것을 따로 짓는다고 한다. 땅을 의지하여 생물을 길러 내는 농부의 마음이 이와같이 되어 버렸음을 누가 탓할 것인가. 비료와 농약은 땅을 죽이고 사람들의 심성을 죽이어 더불어 산다는 공동체 의식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경제 발전 위주의 정책을 펴 온 결과이다. 텔레비전을 볼 것도 없다. 그는 궁벽진 이 곳에서마저도 정신의 뿌리가 뽑히어 거덜나고 황폐해진 군상들을 참담히 확인한다. 독이 밴 손으로 지은 생물은 먹는 사람도 독으로 물들이고 만다. 유기농으로 땅을 되살리는 일은 곧 잃은 불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은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직거래식이라야 재배자나 소비자에게 두루 이롭다. 농산물의 유통 마진은 평균 사십 퍼센트, 많게는 육십 내지 칠십 퍼센트에 이른다. 그러나 농협의 직거래 센타 등 집단화된 체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따로 더 들기 마련이니, 이상적이기는 소비자가 필요한 만큼 주문을 받아 재배하는 것이다. 이 일은 결국 신도회 같은 실제 소비층에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될일인데, 먼저 능인선원, 구룡사 등 신도회 조직이 활성화되어 있는 대도시의 사찰 등에서 그 일을 시작해 주기를 그는 바란다.
적문스님등, 전래의 사찰 음식을 연구 보존하는 한편으로 대중화를 꾀하고 있는 분들도 귀히 여긴다. 그가 하는 일이 인공 감미료와 화학 조미료로 뒤발이 되다시피한 음식 문화의 본디 자리를 찾게 해 주는 뜻깊은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되찾은 입맛은 유기농으로 가꾼 작물을 찾게 될 것이었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입탄리, 약사암이 앉은 땅은 삼만 평이 넘는데, 그는 이 땅을 그의 원력을 실천에 옮길 터전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요즘 재단 설립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대처로 나가서 다시 볼일 없을 듯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자신이 펴려는 운동에 동참해 주기를 호소한다. 서울의 세곡동 법수선원에 나가 한 달에 두번 법문도 한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돌아와 밭을 일군다. 이런 제 뜻에 동참해 줄 자산가들이 울타리가 되어 그가 말하는 “불교진흥기금” 이 웬만큼 조성이 되면, 자신이 궁극으로 껴안을 사람은 아마도 기존의 질서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하고 뒤둥그러진 사람들, 제가 흘린 땀값을 온당히 지불받지 못하는 소외된 층이 될 듯하다.
일전에 불교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이 곳까지 찾아온 사람 하나 있었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던 사람인 듯해 보였는데, 시장기가 웬만큼 가시자 이 곳의 혹독한 일감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났다. 그의 그러한 안일함은 그의 등을 바라보아야 했던 자신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그래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구조적으로 몸 담은 환경의 황폐함 때문이지 그의 잘못은 아니라 여긴다. 오히려 종교가, 불교가 그들을 진정으로 껴안은 적이 있었는지 반성한다.
그에게 있어 이 시대에 진정한 수행자의 의미란, 그들과 동사섭하는 것이다. 생산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면서, 그들이 진 짐을 나눠지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 짧은 기간이나마 원력을 세우고 이 곳에 씨앗을 묻는 동안, 가사 장삼을 갖춰 입을 틈도, 예를 갖춰 바릿대를 쓰고 닦을 시간도 없었다. 승복을 입어야만 중이고, 좌복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 삼매에 드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다. 그가 한 때 제가 궁구할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바, 경전이란 강 건너에 이르면 버려야 할 뗏목이지 평생을 붙들고 거기에 천착할 궁극의 것이 아니다. 그 방편이 무엇이든, 참된 각자覺者란 제가 구한 보리를 혼자의 양식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처하는 공간에서 깨달은 바를 실천하여 형상화시킴으로써 공空에 빠지지 않는 자이다. 세상 속에서 경계에 부닥칠 때 현실과 타협하거나 하지 않고, 자신을 법다이 지키는 자이다. 사문이란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의 옷자락을 삿되이 붙잡을 이른바 딸린 권속도 없으니 이 아니 유리한가.
그가 보건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의 말씀은, 노동을 불성을 깨우치는 보조 수단으로 삼으라 하신 뜻이 아니다. 수행자가 노동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을 강조한 말씀이시니, 이 시대의 수행자들이 실천으로써 절실히 들어야 할 화두이다.
그가 오늘 삽 한 자루로 오십 미터쯤 되는 초입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고, 돌을 골라 낸 땅을 부드럽게 일구어 옥수수를 심고 거두는 뜻이 그러하다. 죽기 살기로 보낸다는 나날, 스스로 평하건대, 인내심도 포용심도 웬만큼 갖춘 듯하나 예민한 감성으로 “한계” 를 넘기어 터지고 말면 아무도 못 말리는 성품이라 하니, 아마도 그러한 자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나날인지도 모른다. 혼자 깨치어 수준에 이른 한방 의술 등, 재주가 갖가지로 많으니 한 가지 일에 매진하지 못하고 비어져 나가려는 자신을 붙잡아 앉히는 고된 나날인지도 모른다.

일천삼백 미터 높이의 사자산(백덕산) 기슭 한중간이니, 볕이 일찍 드는 것도 일이 되는 곳, 동리 이름이 아침동(朝洞)이었다. 아침동에 해 지고 초열흘 달이 가만히 떠서 동리 이름 지운다.
불이 안 들어와.
마을 불은 들어와 있네. 어머니가 전선에 젖은 빨래를 널어 그래요.
“보고 또 보고”는 오늘 밤 못 보겠네, 아이 참….
호박꽃은 낮 동안 난만히 벌렸던 입을 닫은 채 함초롬하고, 땅 깊이 흐르던 물이 제 몸 드러내는 언저리로 반딧불이 한 마리 날아오른다. 그 미물은 제 몸에서 낸 빛으로 어둠 속에다 고운 선 하나 그어 놓는다.

글/김영옥 사진/홍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