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이치는 삶의 이치입니다. 그것은 삶의 참 본성입니다. 삶입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의 참 본성이요 또는 참 이치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룸은 진리를 깨달아 앎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타자絶對他者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여기 이렇게 존재토록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앎이 곧 우리의 해방입니다.”
나는 자연의 이치 속에 삶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수없이 그런 것을 경험했고 내 시의 많은 부분을 그런 과정 속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산과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것들은 내게 무슨 말인가를 건넨다.
큰 산으로 가는 길에는 깊은 물이 있는 걸 보면서 “마음이 크다는 것은 마음이 깊다는 것이요, 마음이 깊다는 것은 마음이 맑다는 것” 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고요한 물에는 고요한 얼굴이 비치고,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나타난다” 는 걸 알려 준다.
산과 물에서 삶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고 참 이치와 진리 그 자체가 들어있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자성自性(naturalness)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아는 삶일 것이다.
마이다 수이치는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루며 산다.” 는 말은 “무아無我 로써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 앞에 나를 버리고 겸손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깨달아 아는 삶일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서상수라는 사람이 자기집 마루를 볼 관觀 자, 관재觀齋라 이름하고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자 금강산 마하연에서 치준 대사에게 들었던 설법을 인용하여 이런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너는 즐거운 마음으로 제 업을 받아서 깨우치도록 하여라. 내가 육십 년 동안 세상을 보니 사물치고 머물러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도도하게 모두 가버렸다. 해와 달도 가버려서 그 바퀴가 정하지 않았으니 내일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중한다는 것은 미리 맞이한다는 것이고 붙잡는다는 것은 힘쓴다는 것이고 깨우친다는 것은 즐거운 마음(順)인 것이다. 너는 마음에 머물게 하지 말고 기에 막힘이 없게 하라. 그것을 명命으로 순응케 하여 명으로써 나를 보고(觀), 그것을 이치로 깨우쳐서 이치로써 사물을 본다면(觀)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구름이 일어나리로다.”
치준 대사의 말씀을 듣고 연암도 생각이 벙벙하였다고 했으니 나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지만 길게 인용하는 까닭은 실체가 없는 마음, 머물러 있지도 않고 언제나 가버리고 마는 마음에 기대지 말고 순順과 명命을 생각하며 명으로써 나를 보고 이치로써 사물을 보라는 이 말 때문이다.
명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면 나라고 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며 순응과 겸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치로써 사물을 보면 이 세상 모든 자연 만물 안에 들어 있는 삶의 진리와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어떤 대상과 사물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설명과 진술에 의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한다. 작품을 형상화한다는 말도 이와 통한다. 무엇을 통해서, 무엇을 세워서 생각하고 깨달아 아는 바를 전달하는가. 나는 그게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무요 들풀이요 바람이요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자꾸 자연만물 속에는 삶의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해 오는 것이리라. 나뭇잎이 밤을 지샌 뒤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에 귀기울이고,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지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지 눈들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