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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내게 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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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도종환 1998년 09월 199호
장대비를 맞으며 자란 나뭇잎은 연약하지 않다.
장마가 잠시 멈춘 사이 이층 창가에 서서 목련 나뭇잎을 만져 보았더니 소능로 전해져 오는 질감이 연하지만은 않다. 비를 맞아서 부드러워진 줄 알았더니 이파리마다 몸의 탄력이 더 늘어나 있다. 더 튼튼해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부드러운 직선’ 이란 시집을 내고 난 뒤 나무에 관한 시를 많이 쓰는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고 일어나 창을 열면 가장 먼저 보는 게 나무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바라보며 봄이 오고 바람이 불고 세월이 흐르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만 십 년째가 되어가는 해직 생활의 끄트머리에서 다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 한 그루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서 세상 사는 이치도 발견하게 되고 사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도 된다. 바람 때문에 꽃이 피었다가는 그 바람 때문에 꽃이 지는 걸 보고 나로 인하여 온 모든 것들은 나로 인하여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업연業緣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꽃이 가르쳐 준다.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 날은 잠시다. 일 년 중에 많은 날들은 꽃 없이 이파리나 빈 가지만으로 지낸다. 화려하던 날들은 언제나 짧게 마련이다. 그러나 푸른 잎으로 옆의 나무를 찾아가 숲을 이룰 때는 오히려 꽃이 없을 때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을 달고 사는 건 아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꽃나무’란 시를 썼다. 아니 꽃 피는 나무가 내게 그런 걸 가르쳐 주었다.
복숭아꽃이나 사과꽃 배꽃은 작고 조촐하기 이를 데 없다. 무릇 과일나무의 꽃은 대개가 그렇게 소박하다. 그런 꽃들을 바라보다가 허영을 부리지 않는 나무에 실한 열매가 열리는 법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에 연연해 하지 않는 나무에 오히려 튼실한 열매가 열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복숭아 나무가 내게 그런 걸 일러 주었다.
어떤 날은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는 오히려 아픔 속에서 고요하다는 걸 알려 주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고, 어떤 날은 꽃도 잎도 열매도 다 버리고 난 뒤에 빈몸으로 겨울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이제 저 나무는 끝났다 실패하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놀라곤 한다.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제가 가장 아끼던 꽃 제가 있는 힘을 다해 만들어 낸 열매도 저를 키워 준 흙이 원하고 저를 살려 준 바람이 필요로 하면 미련없이 돌려줄 줄 알아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나무’ ‘복숭아나무’ ‘겨울나무’ ‘다시 피는 꽃’ 그런 시들은 모두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가 쓰게 되었다.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과 만나는 일이 많았다. 나는 나무가 내게 그런 걸 알려 준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이 아무개 목사님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여시아문如是我聞’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일본의 불교사상가 ‘마이다 슈이치’ 의 책을 보았다.

“자연의 이치는 삶의 이치입니다. 그것은 삶의 참 본성입니다. 삶입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의 참 본성이요 또는 참 이치입니다. 무엇보다도 진리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룸은 진리를 깨달아 앎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타자絶對他者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여기 이렇게 존재토록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앎이 곧 우리의 해방입니다.”

나는 자연의 이치 속에 삶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수없이 그런 것을 경험했고 내 시의 많은 부분을 그런 과정 속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산과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것들은 내게 무슨 말인가를 건넨다.
큰 산으로 가는 길에는 깊은 물이 있는 걸 보면서 “마음이 크다는 것은 마음이 깊다는 것이요, 마음이 깊다는 것은 마음이 맑다는 것” 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고요한 물에는 고요한 얼굴이 비치고,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나타난다” 는 걸 알려 준다.
산과 물에서 삶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고 참 이치와 진리 그 자체가 들어있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자성自性(naturalness)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아는 삶일 것이다.
마이다 수이치는 “자연의 이치에 조화를 이루며 산다.” 는 말은 “무아無我 로써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 앞에 나를 버리고 겸손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깨달아 아는 삶일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서상수라는 사람이 자기집 마루를 볼 관觀 자, 관재觀齋라 이름하고 서문을 지어달라고 하자 금강산 마하연에서 치준 대사에게 들었던 설법을 인용하여 이런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너는 즐거운 마음으로 제 업을 받아서 깨우치도록 하여라. 내가 육십 년 동안 세상을 보니 사물치고 머물러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도도하게 모두 가버렸다. 해와 달도 가버려서 그 바퀴가 정하지 않았으니 내일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중한다는 것은 미리 맞이한다는 것이고 붙잡는다는 것은 힘쓴다는 것이고 깨우친다는 것은 즐거운 마음(順)인 것이다. 너는 마음에 머물게 하지 말고 기에 막힘이 없게 하라. 그것을 명命으로 순응케 하여 명으로써 나를 보고(觀), 그것을 이치로 깨우쳐서 이치로써 사물을 본다면(觀)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구름이 일어나리로다.”

치준 대사의 말씀을 듣고 연암도 생각이 벙벙하였다고 했으니 나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지만 길게 인용하는 까닭은 실체가 없는 마음, 머물러 있지도 않고 언제나 가버리고 마는 마음에 기대지 말고 순順과 명命을 생각하며 명으로써 나를 보고 이치로써 사물을 보라는 이 말 때문이다.
명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면 나라고 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며 순응과 겸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치로써 사물을 보면 이 세상 모든 자연 만물 안에 들어 있는 삶의 진리와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어떤 대상과 사물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설명과 진술에 의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한다. 작품을 형상화한다는 말도 이와 통한다. 무엇을 통해서, 무엇을 세워서 생각하고 깨달아 아는 바를 전달하는가. 나는 그게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무요 들풀이요 바람이요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자꾸 자연만물 속에는 삶의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해 오는 것이리라. 나뭇잎이 밤을 지샌 뒤 우리에게 속삭이는 말에 귀기울이고,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지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지 눈들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