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어찌하여 솥을 깼느냐?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나의 행자시절 - 응각 1998년 08월 198호
행자시절에 경험한 몸의 고단함이란 겪어본 이만이 알 것이다. 하루종일 어른 스님들의 심부름으로, 공양간으로, 법당으로 좇아다니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단잠을 자기 일쑤인데, 거기다 밤늦도록 책이라도 들여다보는 날엔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를 놓치기 십상이다.
스무서너 해 전쯤, 중노릇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산문 밖으로 쫓겨나올 뻔한 그 날도 그랬다. 전날 책을 보다 늦게 잠이 들어 깜빡 늦게 일어난 게 화근이었다. 밥을 짓는 일이 내가 맡은 일이었는데 눈을 뜨니 일어나야 할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후다닥 일어나 공양간으로 달려가 평소의 습관대로 아궁이에 불부터 지폈다. 그런데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아니면 잠이 좀 덜 깼던지 솥에 물을 붓는 일을 깜박 잊어버리고 빈 솥에 불을 때고 말았다. 물을 끓여 전날 일어 건져 놓았던 쌀을 넣고 밥을 지어야 하는데 그저 빈 밥솥에 불만 때고 말았던 것인데, 한참 장작을 때다 보니 물이 끓어오르는 김은 나지 않고 단내만 나는지라, 아차 하고 솥을 열어 보았을 땐 이미 솥 밑이 벌겋게 달아올라 밑이 빠져 버리고 말았을 때였다.
아궁이 불 앞에 있었으나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얼른 다른 솥에 밥을 하련만 그 시절 솥이라곤 밥하고 국 끓이는 솥 둘뿐이었으니 채공 행자더러 끓여 놓은 국을 퍼내게 하고 그 솥에 밥을 부랴부랴 지어냈다. 신속하게 움직여 공양 준비를 끝내고 큰방에 공양을 들여 갔으나 이미 제 시간을 십여 분이나 넘기고 있었다.
어른스님들께서 공양을 하시는 동안이 왜 그리 길게 느껴졌는지, 나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처음 실수이니 괜찮을 거라는 다른 행자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일분도 허투로 쓰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는 어른 스님들에게 풋내기 행자가 늦잠으로 공양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십 분이나 어겼다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실수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달랑 하나밖에 없는 밥솥마저 깨뜨렸으니 쫓겨나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싶었다. 공양 시간을 마치는 죽비소리가 나자 아니나 다를까 큰방에서 나를 찾았다.
“정행자 들어오너라”
어른 스님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려니 중노릇 한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쫓겨날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그 때 내 나이 스물이 넘어 있었고, 쫓겨나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살 생각을 할 수 있었으련만 ‘여기서 쫓겨나면 죽는다’ 라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으니 왜 그리 절박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양 시간을 지키지 못한 내 일로 대중공사를 하기 위해 스님들께서 모여앉으신 곳에 앉아 있으려니 주지 스님께서 운을 떼시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일각이 여삼추, 길고 길게 느껴졌고,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는 ‘철들고 나서 보니 절집에 와 있더라’ 고 했지만, 나를 절집에 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웃음’ 이었다. 한창 꿈 많은 청소년 시절, 나는 웃음으로 고민하며 보냈다. 구르는 가랑잎만 보아도 웃음이 나는 청소년 시절의 그런 자연스런 웃음이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께 꾸중을 들어도 웃음이 나왔고, 길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냥 웃음이 나왔으며, 심지어는 초상집에 문상을 가서도 웃음이 나왔으니 예사롭지 않은 웃음이었다. 병원에서는 과민해서 생기는 ‘실소증’ 이라고 했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별 효험이 없다가 어느 한의원에서 가보라고 한 곳이 영월 보덕사였다.
그 곳에서의 기도가 내 웃음을 없애게 했다. 그저 스님이 시키는대로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곤 했는데, 어느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새어나오던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불교’ 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 기도의 효험을 경험한 셈이었다. 그 곳에서 한 해 가까이 있으면서 자연스레 나는 절집 분위기에 젖어들었고, 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그런 생각을 알아챈 주지 이장호 스님께선 월정사로 가서 공부하라며 추천서를 써 주셨다. 그렇게 해서 월정사 행자로 멀고 먼 도의 길에 첫걸음을 내디뎠고 여러 어른 스님들의 사시는 모양을 보며 신심을 다지고 있었는데, 그만 공양을 늦게 준비하고 솥까지 깨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 때 월정사 주지 스님은 탄허스님, 그리고 총무 스님이 희찬스님이었다. 이윽고 탄허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래, 어째서 공양을 제 때에 준비하지 못했느냐. 그리고 솥은 어찌하여 깼느냐.”
나는 그저 잘못했노라고 빌었다. 여기서 나가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무슨 다른 말이 필요했겠는가. 그 때 탄허스님께서 다른 스님들의 의견을 묻자 대뜸 한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아이 당장 내보냅시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으나 나는 그 스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평소 계율을 철저히 지키지 않고 있어 내심 못마땅해 하고 있던 스님이었다. 그래도 다른 스님들이 처음 실수이니 용서해 주자고 했는데 잠시 뒤 희찬스님께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정행자가 평소에 부지런하고 착실했으니 한번만 용서하기로 하지요.”
그것은 천상의 목소리였다. 눈물이 쑥 빠질 만큼 그렇게 최종 결론을 내린 희찬스님이 고마웠다. 그렇게 대중공사에 혼줄이 나고 나서 그 길로 진부장에 나가 솥을 사 달구지에 싣고 돌아와 솥에 기름칠을 하고 또 했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새롭다. 그날 저녁 기름을 먹여 반짝반짝 빛나는 솥을 아궁이에 걸고 밥을 짓는데 아침결에 혼난 일은 까마득하고 그렇게 마음이 흐뭇하고 푸근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는 매사에 조심하고 긴장하는 행자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무렵 나옹 선사께서 주석하셨다는 북대암에 홀로 생식만 해 가며 수행하던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가끔 내가 쌀을 가지고 올라가곤 했다. 먼 산길을 올라가면 스님께서 퇴락한 암자에서 나와 반기곤 하셨는데, 퇴락한 암자의 겉모습과는 달리 스님의 모습은 맑고 빛났다. 한없이 적정한 가운데 뿜어져 나오던 그 빛과 향기를 나는 볼 수 있었다.
‘왔느냐’ 하는 한마디 말고는 다른 말씀이 없었으나 나는 그분에게서 무한한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수행이 무르익어 내뿜는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마음을 뒤흔들고 지나가는지 알았다.
그 뒤 상원사로 파견되어 행자로 일 년쯤을 살았는데, 그 곳엔 어찌나 뱀이 많았는지 그야말로 뱀과의 전쟁이었다. 공양을 지으려고 공양간에 나오면 솥 뒤로 뱀들이 무리지어 우르르 지나가는 모습을 예사로 볼 수 있었다. 한암스님께서 그 곳에 주석하고 계실 때는 흰죽을 쑤워 말구유에 부어 놓으면 뱀들이 나타나 먹어치우곤 했다고 한다.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책이었겠으나 ‘놀고 먹는 스님들이 모두 뱀이 되었다’ 는 소문이 있었으니, 어쨌거나 출가자로서는 등골에 한기가 도는 얘기였다.
그 때 상원사에는 태옹, 법달, 법능스님 등 여러 스님께서 정진하고 계셨는데, 스님네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법이요, 도였으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곤 했다. 그 때 행자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터라 그렇게 행자시절을 보내다가 군대 영장이 나와 월정사에 가 스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일주문을 나서니 눈이 내려 길은 없어지고 눈보라만이 내 등을 산문 밖으로 떠밀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길을 찾아 진부 사거리까지 삼십리 길을 걸어 내려오니 눈보라로 얼굴이 얼어붙어 나중에는 아무런 감각조차 없게 되었다. 나는 그 때 출가 사문의 길이란 이렇게 뼛속 저리게 춥고 고독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혼자 힘들게 내려와 진부에서 난생 처음 먹어 본 해장국 맛을 어찌 잊으랴. 그 뒤 제대하고 백양사에서 수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으니 뜨끈뜨끈한 해장국 한 그릇을 끝으로 내 월정사에서의 행자시절을 마감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내 월정사나 상원사에서 보낸 행자시절은 불가와의 인연이 다져지던 시절이 아니었다 싶다.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