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한 산중음악회가 지난 5월 16일, 가평 봉덕사에서 그 첫 공연의 문을 열었다. 그 후 동명불원, 동학사, 동화사, 낙산사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 막을 내렸다.
이 산중음악회는 흔히 요즘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라고는 없는 작은 음악회였다. 특별한 무대도 화려한 조명도 편안한 객석도 없는 이 산중음악회를 단지 국악인 김영동 씨가 이끌어간다는 것 외에는 그저 조촐하다고 말할 수박에 없는 음악회였다.
가평 봉덕사의 산중음악회에서는 대웅전을 무대배경으로 삼고 댓돌을 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첫날 공연부터 비가 내려 비닐로 칠흙 같은 어둠의 하늘을 가리고 빗물을 막았다. 음악회 내내 빗물 받는 소리와 어우러진 김영동의 산중 음악회는 피리소리와도 그 빗물 소리가 어우러지다가 다시 대금, 거문고 등의 소리와도 합주를 이루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김영동의 대금소리는 더 명징하고 청아하게 울려나왔다. 그리고 이 산중 음악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산사에서의 우중에 있었던 음악회는 그 첫 회의 공연을 이렇게 마쳤다. 비록 옷과 몸은 비에 젖고 불편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개어 있었다. 그런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 환히 다 보였다.
이번 산중음악회가 다시 공주 동학사에서 열리는 전날부터 비가 내려 공연을 앞두고 큰 걱정이 앞섰다. 결국 그 당일 오전에는 마치 장마비가 오듯이 비가 퍼붓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동학사 산중음악회는 더욱 초라한 음악회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 누구가 이 먼 곳까지 비가 퍼부어내리는 날 음악회에 올 것인가. 더욱이 산중의 야외에서 진행되는 음악회에 비가 내리니 그나마도 변변치 못한 무대도 없는 이 음악회는 어디서 해야 될 것인가.
남한강물이 거세게 불어나는 것을 보며 차를 몰아 공연 현장에 도착한 것은 저녁 5시쯤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공주 동학사 어귀서부터 빗속에서도 사람들이 가지런히 줄을 지어 가고는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엿보였다. 오히려 실망스러움이나 걱정스러움을 찾아본다는 것이 더 이상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빗속에서도 여기에까지 찾아온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계룡산 산중의 사찰, 동학사에서 음악회를 연다는 것이 좀 색다른 이벤트 공연 행사쯤으로 여겨져서일까, 아니면 이들 모두가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내가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 7월이었다.
나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다큐멘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일은 몹시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할머니들의 지나간 과거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 일 그 자체가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잊고 싶은 과거의 역사, 그러나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치욕의 역사, 그 풀어지지 않는 증오와 굴욕.
취재 도중 간간이 할머니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한순간에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지금 바로 일어난 일처럼 되살아나는 듯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당황하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벼락같이 화를 내시며 지금와서 이런 인터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취재를 거부하기도 하셨다.
역사의 증언자로 세상앞에 선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그러나 광복 51주년인 1996년, 그 당시 할머니들은 피해 신고 사실을 몹시 후회하며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무엇이 이 할머니들을 그토록 지치게 한 것일까?
할머니들의 짓밟힌 청춘, 죄인 아닌 죄인의 삶, 그러나 할머니들에게 그보다 더 무섭고 아픈 현실은 이 세상의 외면과 무관심이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이제 고인이 되신 강덕경 할머니는 거의 들리지 않는 혼잣말처럼 그 소리를 중얼거렸다. 한동안 할머니의 눈길은 한 쪽 벽면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그 낮은 목소리는 절망과 어둠의 목소리였다. 광복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에 대해, 아니 자신은 역사의 진실 앞에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절망과도 같은 침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은 주검과도 같은 치욕의 역사를 가슴에 묻고 침묵의 반세기를 보내며 살아왔다. 그 동안 일본도 이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해왔다. 거짓과 위선의 역사 왜곡의 길고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서 나올 줄을 모르고 있다.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우리나라와, 필리핀, 대만 등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지급하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필리핀 등지에서는 개별적으로 이 위로금을 받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다르지 않는 이 민간기금을 거절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강덕경 할머니는 이 민간 기금 거절을 유언으로 남기셨다.
아무튼 이 날 산중음악회는 동학사의 강설전을 무대배경으로 삼고 또다시 그 댓돌을 무대로 삼았다. 영산회상의 첫 거문고 줄이 힘차게 튕겨지자 계룡산의 준봉들이 마치 열을 지어 달려와 산중음악회를 경청하려는 듯 운무에 가렸던 그 신비한 푸른 봉우리들을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마치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온 제자들처럼 동학사 강원의 비구니스님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우리의 소리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감동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가 보여준 음악의 소재들도 하나같이 의미가 있고 귀한 것이었다.
귀소歸巢란 작품은 김영동이 깊은 묵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것을 대금의 소리와 거문고가 만나 이루어내고 있다. 그 차분하고 깊은 울림이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산행은 어느 스님이 당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은 작품인데, 가야금 한줄한줄이 긴장과 경쾌함으로 타질 때마다 그 스님의 무소유와 침묵의 정신이 여름 한날 푸른 잎사귀처럼 반짝이며 걷는 모습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듯하다. 이외에도 역사의 강, 한네의 이별, 아침의 소리, 등의 작품에서 우리들의 맑은 영혼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하나가 되어 바로 이 산중음악회를 열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느낌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들려주는 음들이 생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에 있다. 가공하지 않은 소리, 그 자연음의 음색들이 살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증폭기도 신디사이저도, 대형의 스피커도 없는 우리의 악기 소리들이 깊은 산중을 열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들과 어우러져 열려있는 자연의 숨을 느끼게 한다. 겹겹으로 둘러쌓인 계룡산이, 그 동학사 산중의 음악회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야 만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삶이 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이 순간에 나는 치욕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도록 울리는 산중음악회의 메아리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산중음악회가 이루어진 것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다.
본디 올해 3월 1일, 일본군위안부 역사교육관이 개관될 예정이었으나, 그 기금마련이 여의치 않았다. 나눔의 집 혜진스님과 이 일을 기획단계에서부터 추진해 온 추진위는 8월 14일로 개관을 미루고 기금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이 산중음악회는 김영동 씨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는데 개관전까지 공연을 하며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문을 연다. 이 역사관은 앞으로 아시아의 여성들이 일본의 성노예로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는 증언의 장이 될 것이며 나라와 민족, 시대를 넘어서 민족문제, 계급문제, 성문제가 얽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 인권, 평화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