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에 다섯 살짜리 눈먼 아이 하나가 어미 희명이 시키는 대로 분황사의 천수대비관음상 앞에 엎디어 노래 하나 지어 올렸다. 노래로 올린 기도는 곡진하여 마침내 눈이 다시 보이는 응험을 받는다. “희명希明” 은 아이의 눈이 다시 밝아지기를 바랐던 한 아낙의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뜻이 그러하거니와, 온갖 고통 거두어 밝음 한가운데로 이끌어 주십사 관음을 칭념하는 뭇 중생을 일컫는 말이리라. 어제 있었던 그 일은 천 년이 지난 오늘에 끝나고 만 것이 아니었다.
칠월 초승 장마 한중간 밤 아홉시 무렵, 남해 보리암 가는 길, 그 옛날에 세존이 금산 중턱의 쌍흥굴을 지나 세존도라는 섬 하나 떨궈 놓고, 돌로 된 배를 타고 일망무제의 바다 위로 사라져 갔다는 곳이다. 그 날도 오늘과 같았을까. 안개가 깊어 한 치 앞이 안 보였다. 한 해에 많으면 오십 일이나 안개로 휩싸인다 했다. 그 안개와도 같은 미망에서 벗어나고자 이 곳을 찾는 중생의 발걸음은 밤새 이어질 모양이었다.
밤새도 깃을 접고 나뭇잎 밑에 앉았고, 길섶의 싸리꽃도 작은 잎 더욱 작게 오므리어 습기 피하는 밤이었다. 사람들은 절 아래 빈터에 차를 세워 두고 두셋씩, 또는 몇 십 명씩 말없이 젖은 산길을 짚어 오르고 있었다.
스물네 시간 삼백육십오 일 기도하며 마음을 모두는 곳, 그 밤의 어둡고 축축한 기운을 떨쳐 줄 법당의 환한 불빛을 향해 움직여 갔다.
그러나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비손하는 내용이 무엇이든 그저 잘 이루어지는 “영험한” 암자가 아니라, 궁극으로는 “받아 지닌 이 내 몸이 밝고 빛나는 깃발이요, 받아 지닌 이 마음이 신통력의 근원” 임을 깨치게 될 곳이라야 했다.
양양의 낙산사, 강화의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 기도 도량으로 손꼽히는 이 곳에 상주하는 대중은 십여 명,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무엇보다 기도에 열심인 스님들이고, 이들을 공궤하는 한편으로 적잖은 기도객을 공양해야 하는 네댓 공양주들도 틈만 나면 기도를 올리는 도량이다. 붙박이로 사는 사람이나 일시로 들러 기도하는 사람이나 그저 안온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도량이 되게 하는 일, 네 해에서 꼭 한 달 빠지는 동안 이 곳의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동욱스님이 첫째 일이자 마지막 일로 삼고 애써 온 것이다.
덤달이라 무탈한 윤달이니 생전에 미리 갈 길 닦는 예수재 따위의 제목도 당치 않다. 그저 사분정근 한 가지만큼만 깍듯이 지켜 나갈 따름이다. 신도의 편의에 따라 그 시간이 옮겨지거나 주는 법은 없다. 외부의 요청이 있어 극락전에서 법회를 볼지언정, 보광전 주 법당만큼은 스물네 시간 기도하는 사람을 위한 절대 공간으로 배려한다. 산신각의 탱화와 단청을 보수하고, 극락전 앞으로 얕고 살가운 돌담을 둘러친 것말고는, 공언했던 대로 신축 불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은 옷에 절할 일” 있겠는가. 그저 천 길 벼랑 위에 위태로이 지어진 절의 뜻을 되새겨 보게 할 따름이다. 놓치면 깊이 모를 바다 속으로 아주 잠기고 말 곳이다. 기도란 일을 당한 처지로 아쉬워 급하게 치르는 의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사력을 다해”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그는 이르고 또 이른다.
사람 대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라서요.
이 곳을 찾는 이만큼 그가 맞는 손의 수효도 만만치 않으니, 그의 하루는 곤하여 머리맡에 자명종 시계를 세 개씩이나 두고 잔다. 자신은 다섯시에 아침 예불을 보는데, 축원까지 끝내면 사십 분쯤이 걸린다. 열시 반에 올리는 사시마지 때도 그리 한다. 저녁에는 일곱시에 예불만 올리고 처소로 돌아와 백서른아홉 번 절을 하며 마니예송문을 왼다.
그가 불쑥 묻는다. 대종 소리 울리는 것 “느껴 본” 적 있나요. 대종 소리 못 듣고 잠에 빠지는 일 잦은 고단한 나날, 이 곳이 한가한 때는 한 해에 딱 두 번, 설과 추석날 이틀쯤에 그친다. 걸망 지고 걸어 들어가다 사무치게 듣던 저녁 종소리를 다시금 느끼는 때도 그 때이다. 사월 보름쯤이면 이 곳에 만개하는 산벚도 장하지만, 그런 날 혼자 듣는 종소리만 못하다 했다. 여럿이 함께 들어도 혼자 듣는 종소리, 모여서 함께라지만 혼자 올리는 기도일 터였다. 혼자 깨쳐 갈 길이지 더불어 함께 갈 수 없는 사문의 길이다.
크지 않은 키이기는 하나, 나이 서른다섯이 되도록 오십 킬로그램을 넘어 보지 못했었다. 그런 몸과 마음을 강건히 지탱해 준 것은 무엇이었던지. 열다섯 동진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승랍이 마흔이 가까와진 지금, 그가 엮어 온 삶은 열린 방문 안으로 불쑥 들었다 사라지곤 하는 저 안개처럼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어서, 그가 사진으로 찍어 벽에 걸어둔 백련처럼 더 없이 오롯한 것도 있다. 그의 나이 열아홉일 때 청암사 수도암에서 혼자 올린 백일 기도도 그러했다.
해발 1150미터, 추운 날은 영하 29도까지 내려가는 곳이니 눈이 와도 녹지 않아 무릎이 빠지게 쌓이곤 했다. 새벽에 도량석 끝내고 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약수를 길어와 부처님 전에 올려 바쳤었다. 그리고 법당에서 혼자 기도를 올렸었다. 열네 시간 동안 기도를 올린 적도 있었다. 발 한번 옮기지 않고 서 있다 보면 관절이 굳어져 절을 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저 남만큼만 공부하게 해 주소서. 부디 부처님 슬하를 떠나 살지 않게 해 주소서. 발목과 어깨 등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거니와, 온몸에 동상을 입어가며 몰두했던 간절한 때였다.
이듬해 봄, 청암사에 정식으로 방부를 들이고 고산스님 아래서 경전 공부를 하다가 범어사로 옮아가신 그분을 따라가서 강원 과정을 마쳤다. 그 뒤로 동국대 승가학과(선학과 전신)를 1기로 졸업하고, 해인사 율원 1기생의 과정을 끝마치기까지 구비구비 신묘한 일이 그의 행보를 도우니, 그 때의 간절한 기도의 응험이라 믿는다.
좁쌀과 콩과 시레기뿐, 쌀알은 헤아릴 만큼만 넣고 지은 밥을 삼이레 동안 먹어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족해 했을 시절, 해가 저물도록 울력을 하고 나면 천근으로 몸을 덮는 잠을 떨치려고 누각에서 잠을 자곤 했다. 초가을이라 하나 산 기운은 이미 겨울 문턱에 이른 듯 싸늘할 때, 담요 한 장 덮고 이룬 잠은 일찍 깨었다. 그러면 쪼그리고 일어나 앉아 공부를 했다. 졸다가는 필연으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니, 그렇게 해서 잠을 쫓으려고 그랬다. 작심하고 날 받아서 올리는 기도만 기도겠는가. 산문에 든 뒤로 뼈와 살을 야물리던 첫세월이 힘든 만큼 그렇게 오롯하였다. 떠났어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는 곳, 수다한 세월 보낸 지금까지 한 해에 꼭 한번은 그 곳에 가서 참배한다. 지난 봄에는 올들어 처음 본 버찌를 사서 들고 가 부처님전에 올렸었다.
대학 일학년 겨울 방학 때도 그 곳을 찾아갔다. 지금은 찾아 보기 힘든 귀한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 때만 해도 스님들도 기도금을 내고 기도하는 줄로만 알던 때였다. 사흘기도를 끝내고 나오려니 그 곳에 주지로 계시던 법전스님이 자신이 내놓았던 기도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학비로 쓰라며 주셨다. 그로부터 스무 해쯤 지난 뒤에 법전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실 때에 해인사 재무 소임을 보면서, 당신은 기억도 못하시는 그 일을 일깨워 드린 다음 그 고마움을 갚아 드렸다. 그 전에도 “돈 만지는 것이 싫어서” 다른 큰스님의 청도 어렵사리 물리친 바 있었거니와, 그 마음 빚도 그 때에 함께 갚아 드렸다. 두 해 동안 소임을 맡아서 “해인사 이십 년 적자를 흑자로 돌려 놓는” 야문 끝을 보이고 나온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기색 또한 순량하니 마주 대하는 이를 부당히 누르는 바가 없는 그이다. 그것은 학인 무렵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것이 될 만했다. 그가 발원했던 바도 그러했거니와, 스스로 생각해도 “행정승” 쪽은 아닌 듯한데, 산문에 든 지 마흔 해가 가까운 지금껏 거의 대중 속에서 살아온 나날, 그 끝에 저절로 얻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부리기” 보다는 “이끌어 주기” 로 애쓰거니와, 제 주장 내세우기보다는 상대의 뜻에 맞추려 애써 왔다. 그의 입 가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혼자 얼굴로 돌아갈 때 설핏 느껴지는 매서움이 만만치 않건만, 그 순간은 짧아서 착각인 듯 싶게 여기게 한다. 실제로 거울을 보며 자신의 매서움을 찾아서 버리는 “훈련”도 했다 한다. 그런 그가 연밭에서 버린 것은 무엇이고, 애써 구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처렴상정의 꽃을 찾아 연밭을 헤맨 지도 스무 해 남짓, 사진기를 처음 지니게 된 때로 치면 삼십 년 세월이 된다. 영호남으로 꽃이 장한 곳이면 안 다닌 곳이 없다. 뻘탕보다 더 지독한 더위, 연꽃은 칠월 말에서 팔월 초까지의 한여름에만 핀다. 대책 없이 길 떠나 대여섯 시간씩 땡볕을 쬐다가 고생 참 많이 했다. 이제는 엷게 우린 작설차를 지니고 다니며 더위를 미리 방색하지만, 밤 동안 장독 위에 올려 두어 이슬을 맞힌 오이즙, 약 안 친 벼논에 밤새 내려앉은 쓴 이슬을 떨어 먹고 간신히 살아나곤 했다. 동남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백련이 귀한 것이 아닌데, 우리나라에도 그것이 피는 줄은 겨우 세 해 전에야 알았다. 산청의 어느 집 바깥 정원 연못에 흐드러지게 핀 백련을 대하고는 스님 복색이 아니었으면 춤을 출 뻔했다.
불도가 아니더라도 진흙에서 피워 올린 그 고결한 떨기에 눈부시지 않을 사람 없을 터였다. 가섭을 미소짓게 만든 꽃, 사문으로서 불전에서 허다히 만나온 그이임에랴. 마음 먹은 구도를 그림으로 그려 가서 맞추고, 물뿌리개로 “이슬” 을 뿜어 주기도 했던 치졸한 시절 다 보내고, 이제 그는 제 마음 속의 연꽃, 제 마음 속의 부처를 찍는다. 좋아서 한 일이기는 하나 여느 사람과 다른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혼자 품고 볼 것이 아니라, 제가 느낀 기꺼움을 사람들과 나눠 가지면서, 부처의 뜻이 연기처럼 스미어 훈습되기 바라고 그리 한 일이었다.
한 해에 사진을 찍는 날은 일여드레쯤, 지금도 그 사이에 그가 쓰는 필름은 통틀어 봐야 서른 통을 밑돈다. 곤궁했던 시절, 그나마 시은을 축내는 일이라 여기었으니 필름 낭비는 당치 않았다. 줌으로 잡는 영상, 그는 오래오래 참으며 그의 마음과 연꽃이, 그리고 부처와 황홀히 만나는 순간을 숨죽이고 기다리다 찍는다. 연출도 트리밍도 안 될 말이었다. 잘못 짚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도 제 삶이다. 그것은 되풀이하지 않도록 참회할 바이지 연출이나 트리밍 따위로 얼버무리고 왜곡시킬 바는 아니니 애초에 찍힌 대로 그대로 뽑는다. 사진 콘테스트에 출품해 본 일도 없다. 제 마음으로 찍은 심상이니 그것을 심사할 사람은 부처님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저 그 심상을 두루 나눠 갖기 원하니 제작 비용이 싸고 수월한 네거티브 필름을 쓸 수밖에 없다. 십 년 만에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듬해에 「꽃을 드니 미소 짓다」사진집을 펴냈다. 그 책에다 “하늘을 덮는 연꽃 장엄은 아닐지라도, 삼세 제불께 ‘있는 그대로’ 공양 올리는 바” 이라 적었다.
“있는 그대로” 란 그의 말이 읽는 이의 가슴을 친다.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명적明寂한 본연의 마음자리. 그 마음에 이르러 가 닿기가 곤고하고 곤고하다. 부디 부처의 무릎 아래서 벗어나지 않게 해 주소서. 어느 겨울날 아침, 그가 뵈온 석불의 얼굴에 덮힌 얼음처럼, 그저 그 얼굴처럼 싸늘히 문닫아 놓고 계신 것만 같은 부처님, 가섭이 알아채고 지은 미소의 뜻은 알 수 없고, 향해야 할 길은 멀어서 그 끝은 가늠해 보기도 벅차다.
네 해 동안만 소임을 맡아 살되 평생 살듯이 성심을 다하겠노라 다짐하고 살던 곳, 그 말대로 올 칠월 말에 앉은 자리 맑게 털고 그는 이 곳을 떠난다. 비웠으니 채울 바 있을 터였다.
불혹 직전, 이태쯤 준비한 끝에 한 달 가까이 길 위에 있은 적 있었다. 노천에 서 계신 석불들을 찾아 차 공양을 올리러 다닌 길이었다. 통도사 보굴에 참배한 뒤 시작한 길이 전라도 나주에서 끝이 났으니 일주가 아닌 반주였다. 단임으로 소임 끝내고 그는 다시 차 공양길에 올라 나머지 반주를 채우려 한다. 달과 별과 바람 소리뿐. 그저 비는 것이 소박한 마을 아낙의 뜸뜸한 발길뿐, 찾는 이 드물어 적적한 돌부처님 찾아 차 한잔 올리러 떠나려 한다.
가다가 다다르니 물길 다한 곳
앉아서 바라보니 구름 이는 때
그렇게 가다가 지나치게 될 절집의 종소리도 다시금 느껴 보려 한다. 길은 고될 것이나 그로서는 혼자 올리는 기도 기간일 터이니 마음은 향기롭고도 넉넉할 터였다. 비운 바 깊고 맑으니 그 기도 끝에 다시금 채워질 것도 그러할 터였다.
그는 처소 앞에 횡목 기둥 하나 질러 세워 경계로 삼으니, 그 바깥은 속俗이요, 그 안은 승僧이다. 그 나무 기둥 아래로 줄 지어 맺힌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남해땅에도, 바다 건너 저편 하동땅에도 노량露粱이 있어, 그 옛날 유배객이 이편에서 뭍을 바라보는 심사나 그 땅에 갈라져 사는 피붙이들의 애끓는 심사가 한가지임을 이르더니, 이 곳에도 노량이로구나. 그것이 눈물로 보이는 것은, 죽어서도 몸을 받지 못하여 의초부목依草附木하며 떠도는 영혼의 기척만 같은 댓잎의 술렁거림 때문이로구나. 구천이요, 사바로구나.
글/김영옥 사진/홍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