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한번 뵈었던 강기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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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이호철
1998년 08월 198호
삼일운동 때의 보성전문 학생대표로 널리 알려진 강기덕 선생님은 내 조부와 바로 외육촌간으로 원산시 북쪽 외곽 농촌마을인 ‘당모루’ 마을에 사셨다. 그 곳은 바로 인기 역사 드라마 ‘용의 눈물’ 로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해 있는 비극의 여인 강비가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강기덕 선생님은 강비와 같은 문중이어서, 등극하기 전 이태조는 아득한 옛날에 바로 그 ‘당모루’ 마을에서 강비와 첫 해후를 가졌다.
한편, 내 증조모도 같은 강씨 문중으로, 19세기 중엽에 ‘당모루’ 마을에서 원산시 남쪽 끝의 농촌마을인 우리 마을, ‘전산’ 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렇게 내 조부는 ‘당모루’ 의 그 댁이 외갓집이 되었고 강기덕 선생과는 외육촌간이었다. 그러니까 내 증조모는 바로 강기덕 선생의 ‘당고모’ 였다.
1875년 한일수교로 원산이 정식으로 개항되기 전에는, 원산도 ‘원산포’ 라는 이름으로 당모루나 전산과 맞먹는 조그마한 포구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덕원군에 속해 있었다. ‘덕원군 적전면 당모루’ 였고, 우리 마을도 ‘덕원군 현면 전산’ 이었다. 그리고 역시 원산도 ‘덕원군 현면 원산포’ 마을이었다.
그런데 개항 뒤에 시정은 급격하게 달라진다. 조그마한 바닷가의 포구마을이었던 ‘원산’ 마을로 일본 상인들이 몰려들며 일본인 거리가 생기고. 사처에서 장사쪽으로 약삭빠른 사람들이 원산으로 원산으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근대도시로 커져 가다가, 끝내, 1942년 일제말에 이르면서 행정 개편으로 ‘당모루’ 와 우리 마을 ‘전산’ 을 통틀어 ‘원산시’ 안으로 편입이 되어 버렸고 ‘덕원군’ 은 물론이고 ‘적전면’ 이나 ‘현면’ 이라는 행정구역 이름마저도 사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근대적인 대 변화의 문턱에서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에서 일제에 반대하는 ‘독립만세 사건’ 이 터졌고, 그 때 내 조부와 외육촌간이던 강기덕 선생은 보성전문 학생대표로 급부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단 그 쪽으로 급부상을 하게 되자, 그이는 계속 대여섯 번에 걸쳐 감옥을 드나들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계에 이름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연히 그랫을 일이었다. ‘불사신의 독립투사’ 라는 영예로운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다.
그 무렵,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으니까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1937, 8년 경이었을 것이다. 어느 여름 날, 그이가 오셔서 우리 사랑방에서 조부와 같이 주무신 일이 있었다. 그 때 불과 예닐곱살인 어린 나도 대강 눈치로나마 알 수 있었다. 더운 여름날이라, 옷을 벗기도 수월하였을 터이지만, 그이는 등이며 허벅지의 고문 자국 흉터를 드러내 보이며 껄걸 웃기도 하였다. 그런 그이의 모습은 과연 온 세상이 다 아는 ‘불사신의 독립투사’ 답게 툭 틔어 있어, 그런 쪽으로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 하던 내 조부께서도 그 때만은 평소와는 달리 시종 한풀 꺾여 있었다. 드세고 강한 내 조부도 그이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듯하였다. 응당 그랬을 터였다.
그날 우리 사랑방에는 조부와 그이말고도 마을 어른 두어 분이 더 계셨던 것 같은데, 조부보다 열살 정도나 연하임에도 그이는 지나치다 할 만큼 방약무인, 혼자서만 종횡무진 떠들어대는 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조금 밉살머리스러웠다. 생긴 허우대며 목소리며 자리를 압도하는 그 분위기며 어느 모로나 ‘불사신의 투사’ 에 합당하였지만, 종당에는 자기 혼자서만 너무 과하게 우쭐거리며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긴, 그 점도 상대적이긴 할 것이다. 서울 중앙의 저보다 선배 어른들 ‘명망가’ 들이 줄줄이 모인 자리였다면 그이도 그렇게까지 방약무인하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막말로 우리 마을쯤 되니까 ‘촌 것들’ 앞에서 마음껏 호기를 부렸을 것이다.
그 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지금 나는 그 일로 그이를 깎아내리자는 뜻은 추호도 없다. 누구나가 그런 정도의 객기나 치기는 있는 법, 더구나 한 시대의 맨 앞장을 선 사람들의 경우, 더러는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객기이다. 그날 첫대면했던 강기덕 선생의 인상은 그렇게 일종의 뜨거운 열 덩어리 같은 것으로 남아 있거니와,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주안점은 그 점만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 바로 며칠 뒤에는 강기덕 선생과 친사촌간으로 그 무렵 풍산군수인 분이 또 오셔서 우리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주무셨는데, 조끼 받친 양복차림에다가 까만 스틱에다 중절모까지 쓴 그 차림부터가, 이건 또 완전히 별종의 사람이었다. 사촌간이라면 선친끼리 형제간일 터이고, 한 조부의 손자들일 터인데, 한쪽은 열렬한 독립투사요, 한쪽은 식민지 치하의 풍산군수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도 도무지 정신이 산란하였다. 어찌 저렇게 될 수가 있는 걸까?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엄연히 그러했다.
조부께서는 두 사람 똑같이 외육촌간인데, 바로 며칠 전에 강기덕 선생을 대한던 때와는 달리 이 참에는 시종 조용조용하였고, 단 두 분 뿐이어서도 더 그러했겠지만 어느 구석인가 오순도순, 은밀하기까지 하였다. 서로 사촌간이라고는 하나, 며칠 전의 강기덕 선생이 시원시원하게 인품이 타악 트인 쪽이라면, 풍산군수라는 이 사람은 오밀조밀하게 잘고, 심지어 조금 자발머리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두 사람에게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저마다에게 상대 생긴만큼으로 자연스럽게 응대를 하셨다. 말하자면 조부께서는 시쳇말로 제법 ‘정치적’ 으로 응대를 하신 셈이었다. 사촌간이면서 한쪽은 ‘독립투사’ 이고 한쪽은 ‘풍산군수’ 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특별히 모순당착으로 의식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응당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듯하였고 그런 정도는 이미 거의 선험적으로 조부 내부에서 이미 처결處決되어 있었다. 아니다, 그 뒤 언젠가 우리 사랑방에 늘 오던 ‘갠 집 할아버지’ 와 단 둘이 마주앉아, 조부께서 그 일을 한 집안 사촌끼리 한쪽은 혁혁한 ‘독립투사’ 이고 한쪽은 식민 당국의 ‘군수’ 자리에 있는 당신의 두 외육촌을 비아냥거리는 말 몇 마디로 정리하시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도 신랄하게 기억한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나이에 섬뜩하게 충격적이기까지 하던 것까지도.
조부의 그것은 시쳇말로 일종의 ‘계급적 관점’ 이기도 했고, 보기에 따라서는 ‘달관’, ‘체관’ 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그거야말로 더 깊은 강인하고도 질긴, 그리고 슬기로운 우리 민중, 백성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바로 그 지점에 태반의 우리 백성들은 자리해 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