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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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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법타 1998년 08월 198호
‘금강산 일만이천 봉, 팔만아홉 암자’ 를 가 보고 싶지 않은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금강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수려하게 봉우리를 이루고, 그 골짜기마다 절들이 들어차 있는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자 세계적인 명산이다.
1989년부터 91, 92, 96년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하면서, 갈 때마다 금강산을 순례하였다. 더욱이 91년에는 내금강을 찾아 현존 사찰로 가장 큰 표훈사表訓寺를 참배할 수 있었다. 표훈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 의상 대사의 수제자인 표훈 대사가 창건했다. 금강산 주불인 법기法起 보살을 모신 사찰로 그 때에는 오백 척의 놋시루와 쉰셋 부처님을 새긴 철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가 없었다. 또 부도 한 기와 돌수조(石水檀), 깨진 기와 조각뿐이던 장안사터에서 흘렸던 감격의 눈물과 비탄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죽 금강산이 아름다웠으면, “중국 사람들조차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 한번 보고 죽어도 한이 없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고 했을까!
89년 처음 방북했을 때, 그동안 분단으로 인해 쌓아 온 망각 같은 두려움과 기대가 범벅이 되었을 때도 가장 큰 용기를 나게 한 근원은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었다. 금강산을 오르기 전날은 온통 설레임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금강산에 처음 올라 찬란한 아름다움을 접하고는 “금강산은 보고 느끼기나 할 것이요. 형언하거나 본떠 낼 것은 못됩니다” 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판문점 소떼 행진” 을 시작으로 금강산 관광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북한 잠수정의 출현도 이 같은 전 국민적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본디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제보살주처품(第32)’ 에서 유래했다. 금강산은 법기 보살이 천이백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주석하고 있는 불국토이며 극락세계이다. 한국전쟁의 폐허가 그대로 남아 있는 신계사터,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과 함께 54.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물기둥이 13미터나 되는 물 깊이로 쏟아져 내리는 구룡연九龍淵은 외금강산의 으뜸이었다.
구룡연 오른쪽 절벽의 미륵불(金剛山九龍瀑彌勒佛大刻書)은 1919년에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의 글씨인데, 미륵불 세 글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글자이고, 예서체로 음각을 하였다. 또 미륵불 세 글씨는 폭이 3.6미터로 한 획마다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울 수 있는 크기가 되고, 불佛자의 길게 내린 획이 1.3미터로 못의 깊이와 같다고 했다. 옆에는 시주자로서 그 때 전국 31본산 주지 스님들의 법호法號가 새겨져 있어, 그 무렵 불교도들의 원력불사願力佛事 규모를 가늠하게 했다.
내금강산의 보덕암은 고구려 때에 창건된 암자로 한국전쟁 이후 개축되었다 한다. 한 개의 가는 구리 기둥이 7미터 높이로 삼 층이나 되는 암자를 떠받들고 있어 건축 기교가 아주 뛰어나고,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보덕각시’ 전설로 더 유명하다. 아울러 하늘과 맞닿은 천선대天仙臺와 그 아래 ‘선녀와 나뭇꾼’ 의 아름다운 전설이 깃든 상팔담上八潭 계곡, 계곡마다 오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디 맑은 구슬 같은 물이 흐르는 시내들, 금강산 산행은 늘 흥분과 환희로 충만했다.
철 따라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이 뒤덮여 ‘금강산金剛山’ 이라 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게 깔려 ‘봉래산蓬萊山’ 이라고 한다. 가을에는 일만이천 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산 자태가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 지달산’ 으로 일컬으며, 또 금강산을 한 번이라도 찾게 되면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에 이른다 하여 ‘열반산涅槃山’ 이라고 한다.
이러한 금강산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만으로 이 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그 비경을 더욱 비경으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의지가 살아 움직이고, 그래서 그 곳에 간직된 자연의 무언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잠자던 무지無知를 일깨워 준다. 자연의 시현示顯과 인간의 미적 이해, 그리고 마음으로부터의 감응이 어울릴 때 비로소 우리는 금강산의 그림자라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옛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 금강산을 겨레의 영산으로 숭앙하여 왔고, 금강산 골짜기마다 명찰이 들어섰고, 봉우리마다에는 불보살의 명호名號가 붙여져, 막연한 민족의 영산이 불교적 성지로 발현되었다.「삼국사기」제사조祭祀條에 이미 금강산의 명칭이 기록되어져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다음과 같이 금강산을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금강산은 장양현長楊縣의 동쪽 삼십 리에 있다. 부府와의 거리는 일백육십칠 리이다. 산 이름이 다섯 있는데, 금강, 개골, 열반, 풍악, 지달이니, 백두산의 남쪽까지이다. 회령부會寧府의 무라한현無羅漢峴으로부터 갑산甲山에 이르러 동쪽은 두리산頭里山이 되고, 영흥의 서북쪽에서 검산劒山이 되었으며, 장양의 동쪽 고성의 서쪽에서 이 산이 되었다. 분수령分水嶺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무릇 팔백삼십여 리이다. 산은 무릇 일만이천 봉이니, 바위가 우뚝하게 뼈처럼 서서 동쪽으로 창해滄海를 굽어보며,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일출봉․월출봉 두 봉우리가 있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산과 외산에 모두 일백여덟 곳의 절이 있는데, 표훈사, 정양사, 장안사, 마하연, 보덕굴, 유점사가 가장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금강산을 명산 가운데 명산으로 풍악이나 개골이라 명명한 것은 모두 이 산의 경치를 두고 표현한 이름들이지만, 나에게 금강산은 우리 구도자들의 수행처로, 순례지로 여긴 만큼, 그 감동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제 한국전쟁 전의 백팔 사암 가운데 현존하는 표훈사, 정양사, 불지암, 보덕암 외에 신계사를 시작으로 장안사, 유점사, 장연사, 마하연 등을 복원하기 위하여 “금강산문화유적복원추진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외금강의 기기묘묘함과 섬세함이 여인이라면, 내금강은 위용과 절륜을 자랑하는 대장부이다. 이 곳 동쪽 바다에 온갖 바위의 신비한 작품을 쏟아 부은 해금강은 미의 완성이랄까. 성자의 모습이랄까. 삼일포三日浦의 포근함도 잊을 수 없다.
남북한이 모두 다 어렵고 괴로운 이 때, 금강산문金剛山門의 열림은 우리에게 살맛나는 불국토가 되기에 충분하다. 모처럼의 남북한간의 대화가 성사되기를 빌고 또 빌면서, 금강에 살으리랐다가 ‘금강에 살고 있네’ 로 바뀔 날을 기다려 본다.